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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균] “이번 총선은 통일의 중대 기로”

등록 2004-04-15 00:00 수정 2020-05-03 04:23

59년간 통일운동의 선봉에 선 신창균 범민련 명예의장… “수구세력의 색깔론에 치를 떤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앞으로 어떤 희생과 탄압이 따르더라도, 그리고 죽음을 감수해서라도 남은 생애를 국가와 민족의 소망인 통일운동에 몸 바치고자 합니다.”

백수(白壽)를 눈앞에 둔 신창균(97)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쪽 본부 명예의장은 이번 4·15 총선에 몹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이번 선거결과에 민족과 통일운동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몇번씩이나 강조했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모두 투표장에 나가 통일지향 세력을 지원한다면, 국가보안법도 폐지되고 통일운동도 더욱 힘차게 전개될 것으로 ‘확실히’ 믿습니다.” 그는 이번 총선이 본격적인 통일의 물꼬를 트느냐 아니면 그냥 주저앉고 마느냐를 가르는 중대 기로로 여기고 있었다. 그의 쉰 목소리에는 비장한 각오가 배어 있었다.

김구 암살 공모 혐의, 미국 고소한다

그는 반평생을 국가보안법이라는 고릴라와 맞서 싸워왔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아직도 꿋꿋하게 통일운동의 대부로 우뚝 서 있는 이유도 어쩌면 그가 가장 흠모해왔던 백범 김구 선생의 통일 유업을 생전에 이뤄놓고야 말겠다는 옹고집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그는 북녘 동포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철폐야말로 실질적인 통일의 물꼬를 트는 단초로 여기고 있었다. 마치 김구 선생이 ‘민족이라는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적과의 화해’를 강조했듯이 국가보안법의 시퍼런 칼날이 번쩍거리고 있는 한, 진정한 남북화해와 평화는 이룰 수 없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이번에 정말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당선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많이 당선된다면 개혁도 빨라지고, 국가보안법도 철폐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저는 죽음도 사양하지 않고 투쟁할 작정입니다.”

신 의장은 근현대사의 산증인이요, 민간 통일운동의 거목으로 불린다. 그는 해방 이후 무려 59년간 통일운동의 최선봉에 서 있었다. 그는 지치고 힘들 때마다 통일운동의 스승들인 백범 김구, 몽양 여운형, 죽산 조봉암 선생을 떠올리곤 한단다. 그는 통일된 조국에서 자신은 문지기를 해도 행복할 것이라고 했던 김구 선생의 숭고한 족적의 만분의 일이라도 분담하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작 할 말은 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을 만났건만 몸이 따라주지 않은 현실이 못내 안타깝다. 귀가 많이 어두어져 보청기가 없이는 남의 말을 알아듣기도 힘들고, 다리에 힘이 풀려 오래 서 있기도 벅차다. 며칠 전에는 허리까지 다쳐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움직이기도 버겁다. 하지만 그의 진보적인 생각은 열혈청년이 좇아가기도 숨이 가쁠 지경이다. 그가 토해내는 말 속에는 흔들림 없는 의지와 진취적인 정신이 살아 숨쉬는 듯했다.

48년 남북연석회의 뒤 모진 수난

그는 지금 총선이 끝난 뒤 정국이 안정되면 김구 선생의 암살을 이승만 정권과 공모한 혐의로 미국을 고소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남북의 통일정부 건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열린 1948년 평양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구 선생은 남쪽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통일정부 수립’과 ‘미-소 양군의 철수’를 주장했다. 이 주장이 국회에서까지 결의되어 대중으로 영향력이 확산되자 1949년 6월26일 안두희 당시 육군소위에 의해 김구 선생은 대낮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미국이 이승만 정권과 공모해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는 증거가 있어요. 미국의 진보적 정객들이 당시 미 군정이 이승만과 공모해 그랬다는 것을 폭로했지요. 우리가 고소하면 아마 미국도 큰 상처를 입을 거예요.” 그는 남북연석회의에 김구 선생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던 생존자 두 사람중 한 사람이다. “다 죽었어요. 북쪽도 마찬가지예요. 김일성 주석도, 남북연석회의 진행을 맡았던 주영하 전 소련주재 북한대사도 죽었어요. 이남에는 ‘나만’ 살아 있어요. 조아무개라는 사람이 살아 있긴 한데, 일찌감치 통일운동을 포기했어요. 노태우 정권 때 정부 앞잡이가 돼서 의원도 지내고 대학총장도 했지요. 지금은 병석에 드러누워 있어요.”

당시 남쪽에서는 항일민족해방운동에 나섰던 41개 정당사회단체에서 모두 396명이 참석했다. 신 의장은 한국독립당 대표로 협상에 참여했다. 당시 40살이었던 신 의장은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36살로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 전 주석과 남북연석회의 일정을 협의하기 위해 25분간 단독 회담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한독당의 재정부장을 맡고 있었던 그가 이승만 정권의 단독정부 수립안을 반대한 김구 선생을 따라 평양에 다녀온 뒤로 수난과 탄압이라는 딱지는 그에게 유령처럼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는 이승만 정권이 강제로 한독당을 해산시키자 통일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진보당 창당의 주역이 된다. 그는 재정부장을 맡다가 ‘진보당 사건’에 연루돼 죽산 조봉암씨와 윤길중씨 등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나중에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받고 그는 풀려났지만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씨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해방 직전 마카오에 임시정부의 연락책으로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중책을 6년간 맡아왔다.

이런 쓰라린 기억 탓인지 그는 수구세력들이 색깔론을 제기할 때 가장 치를 떤다. “지금 수구세력들은 노무현 대통령도 빨갱이로 몰고 있어요. 이런 기가 막힐 일이 어디 있어요.” 한국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 아직도 빨갱이 운운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투였다. 그래서 그는 이번 선거에서 개혁세력의 대거 국회 진출을 더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앙금이 크게 남아 있다. 특히 그가 1995년 발족 때부터 몸담아온 범민련에 대한 김영삼 정권의 탄압에 가장 분노하고 있었다.

김영삼 정권의 ‘이적단체’ 규정으로…

“김영삼이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는 바람에 지금도 오도 가도 못하고 있어요. 그게 김대중씨에게 고스란히 짐으로 남겨졌어요. 사실 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을 때 국가보안법은 죽은 거나 다름없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간첩으로 지목받았던 비전향 장기수들을 그들이 원하면 다 북쪽에 보냈잖아요. 이북을 조국으로 삼고 있는 조총련 사람들도 단체로 남쪽을 방문했고요. 그런데 김영삼이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한 탓에 우리만 꼼짝 못하고 있어요.”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보수층의 거센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민련을 비롯해 한총련 일부 인사들의 방북을 허용했다. 그래서 신 의장도 2001년 금강산에 열린 ‘6·15 공동선언 발표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를 비롯해 평양 8·15 통일대축전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53년 만에 다시 북녘 땅을 밟아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귀국길은 순탄치 못했다. 정부와의 약속을 어긴 채 정치적으로 민감한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에서 열린 개·폐막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일부 참석자가 연행되고 보-혁 갈등이 분출되면서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 “당시 정부는 반대했지만 진짜 통일을 원하는 사람들은 북쪽이 정성껏 준비한 행사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어요.” 보수층의 질타가 쏟아지자 김대중 정부는 한껏 움츠러들었고 한총련과 범민련 인사들의 활동을 다시 옥죄기 시작했다. 이런 강경 기류는 노무현 정부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에는 3·1 민족대회에 참석하려던 신 의장을 경찰이 행사장에 데려다줄 것처럼 속여 승용차에 태운 뒤 길을 몰라 헤매는 척하며 4시간50분가량 서울시내를 돌며 그의 행사 참여를 저지했다. 또 늦봄 문익환 목사 서거 10주기를 맞아 역사상 처음으로 남과 북이 함께 진행한 ‘늦봄 10주기 추모대회 및 평화통일기원의 밤’ 행사가 열리던 지난 1월17일에도 북쪽 인사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신 의장을 행사장 맨 뒷자리에 앉혔다.

북쪽에서는 이미 수차례 그에게 방북 초청장을 보내왔다. “지금도 (남쪽 당국이) 보내준다면 북한에 가야죠. 그런데 정부가, 김영삼이 한 짓 때문에 눈치만 보고 꼼짝 못하고 있잖아요. 반통일·반민족주의자들이 자꾸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바람에 못 가고 있어요.” 그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의 정신은 오늘날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계승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 때도 그에게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야 통일의 물꼬를 틀 수 있다고 권했어요. 전두환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하지만 그 말을 했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기도 했지요. 하지만 내 예언은 맞아떨어졌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나 6·15 공동선언이 나온 뒤 통일의 물꼬가 트였잖아요. 자꾸 얘기하지만 4·15 총선에 통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당선되느냐에 따라 민족의 운명이 좌우됩니다.” 그는 북쪽에도 수구세력이 건재함을 인정했다. “북한 주민 대부분이 통일을 원하고, 남쪽도 대부분 통일을 원하고 있어요. 하지만 북쪽에도 수구세력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남쪽 수구세력이 더 통일운동을 방해하고 7천만 민족의 염원을 짓밟는 그런 반민족적·반통일적 행동을 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핵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강경정책을 질타했다. “핵 문제는 평화적으로 풀어야 해요. 우선 미국이 강경한 태도를 거둬야 합니다. 세계를 위해서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서 강경한 태도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문제는 순조롭게 풀릴 수 있어요.”

백범 추모 공연, 제대로 열고 싶다

97살의 그에게도 마지막 소망이 있었다. ‘백범 추모 공연’을 제대로 한번 여는 일이다. 그는 “백범 서거 50주기를 맞는 1999년에 국회가 의결한 3억원의 국고보조금과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기부한 3억원 등 모두 7억여원의 기금으로 조성된 ‘백범 추모공연 예산‘이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의 일부 인사들에 의해 탕진돼 평생의 한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민예총이 백범추모공연준비 집행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나 그렇지 않고 불법으로 기금을 써버렸다는 주장이었다. 신 의장은 “국내는 물론 해외동포들을 찾아 ‘순회공연’을 열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하고 조성한 국민성금을 서울 공연 단 한번에 탕진해버렸다”면서 “그런 사람들이 지금까지 공식적인 사과를 하기는커녕 백범 추모공연이 재개되는 것도 방해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백범추모공연은 문화를 매개로 해서 백범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통일운동인데,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한스럽다”고 말했다.

4월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5돌을 기념하는 날이다. 사흘 전 경기도 과천의 자택에서 만난 신 의장은 기념일을 앞두고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설레는 모양이다. 성치 않은 몸이지만 마음은 벌써 행사장에 성큼 달려가 김구 선생의 영정을 쓰다듬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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