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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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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식 관리’는 누가 했나

등록 2002-01-23 00:00 수정 2020-05-02 04:22

87년 책임자 처벌은 공소시효에 막혀…13년 동안 윤씨 비호한 관련자들의 행방은?

단순한 살인범을 반공영웅으로 둔갑시켰던 옛 안기부의 ‘파렴치한 조작’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수지김 살인 피의자 윤태식씨의 정관계 ‘로비 지도’도 속속들이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베일에 가려진 일이 있다. 87년 당시의 조작·은폐에서 2000년의 내사중단 압력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정권이 세 차례나 바뀔 동안 안기부(국정원)는 윤태식씨를 어떻게 관리해왔는가. 그가 벤처 기업가로 승승장구한 과정에 안기부의 조직적인 비호는 없었는가.

현재까지 진상이 밝혀진 것은 87년 1월 당시의 조작·은폐 부분, 그리고 2000년 2월의 경찰 내사중단 부분이다. 87년 당시의 해외담당국(해외공작국) 지휘라인과 대공수사국 지휘라인은 물론 최고 윗선인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의 직접적인 연루 사실이 밝혀졌고, 2000년 2월의 내사중단 압력 과정도 진상이 드러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구속기소된 사람은 내사를 중단시킨 혐의를 받고 있는 이무영 전 경찰청장과 그에게 압력을 넣은 혐의를 받고 있는 김승일 전 국정원 대공수사국장이다. 검찰 조사대상은 모두 73명에 이르렀지만 그중에서 단 두명만 법정에 섰다.

윤씨 ‘전담마크맨’은 도피중

그렇다면 87년 사건발생 뒤 2000년 경찰 내사중단 사이의 관계자 수사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검찰은 “장세동씨를 비롯해 87년 당시의 조작·은폐 관련자들은 모두 업무가 이월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윤태식씨 역시 그뒤 국정원과의 관계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며 “정황 증거만으로 13년간의 모든 지휘라인 해당자를 불러 조사할 수도 없고, 조사해봤자 혐의사실을 밝혀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승일 전 대공수사국장 역시 “캐비닛 안에서 과거 관련 자료를 찾아내 알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또 “87년 당시의 조작·은폐 책임자들은 공소시효가 만료됐고, 그뒤의 ‘관리’라는 것도 성격이 모호하다”고 말한다.

이런 가운데 책임자 처벌은 점점 먼 일이 돼버렸다. 수사를 지휘했던 박영렬 외사부장은 “현행 법 테두리 안에서 샅샅이 뒤져봤지만 처벌할 방법이 없었다”며 “검찰로서도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안기부가 “이러이러해서 간첩이다”라며 근거를 허위로 적시한 게 아니라 윤태식씨의 말을 그대로 받아 “간첩이다”라고 천명했기 때문에 사안별로 공소시효가 연장되는 국가보안법상 날조·무고죄 적용은 어렵다는 설명이다. 수지김이 이미 고인이 된 상태여서 적극적으로 적용한다고 해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가족들에 대한 불법구금, 가혹행위, 중상모략 역시 모두 공소시효가 훨씬 지났다.

남은 것은 최소한 2000년까지 범인은닉을 해온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검찰은 87년 당시 대공수사국 수사요원으로 윤태식씨를 밀착감시해오다 98년 국정원을 떠난 뒤 패스21의 자회사 이사를 맡았던 김아무개(55)씨를 잡으면 단서가 잡힐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는 윤태식씨가 살인혐의로 구속기소된 직후인 지난해 11월 말 사라져 행방이 묘연하다. 그가 국정원 대표자격으로 윤태식씨와 인연을 이어간 것인지, 정관계 로비스트로 윤태식씨에게 고용된 것인지, 아니면 윤태식씨의 돈을 노리고 개인적으로 지위를 얻어낸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은 안기부가 87년 4월 윤씨를 풀어준 뒤 밀착감시해오다 91년부터는 출국금지 조처를 의뢰했고, 그 실무자가 사라진 김씨였다는 것이다. 윤태식씨는 재판과정에서 “계속 출국금지 상태였고, 벤처인으로 뜨자 국정원으로부터 ‘나대면 좋지 않다’는 협박과 경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모든 일들을 사라진 김씨 혼자서 할 수 있었을까. 검찰은 “김씨를 붙잡아봐야만 알 수 있는 일”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이와는 별도로 윤태식씨의 정관계 로비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특수3부는 윤씨를 협박해 2천만원을 뜯은 혐의(공갈)로 지난해 12월18일 김씨를 수배한 상태이다. 김씨는 동거녀, 두 아들과 함께 계획적으로 도피한 뒤 최근까지 세입자에게 월세 납부를 요구하는 등 이웃과 접촉한 사실이 일부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됐지만 검찰은 “국내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종적을 알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특별법 제정

진상이 상당부분 규명된 15년 전의 사건임에도 책임자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 우리 법이 가진 맹점이다. 법이 바뀌거나 특별법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마지막으로 남은 처벌방법은 수지김 유족들이 국가와 관련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는 것이다. 100% 이길 수 있는 것으로 점쳐지지만,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처벌’일 뿐이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인 조국 교수(36·서울대 법대)는 “원칙적으로 국가보안법을 거는 것과 국제인권법을 기초로 기소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현실성은 약하다”며 “가장 확실한 방법은 특별법을 만들어 그에 따라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반인권적·반사회적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중단시키거나 연장시키는 것은 형법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며 “가족들에 대한 공무원들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중단시켜 처벌하는 것도 대안”이라고 덧붙였다.

수지김 간첩조작 사건에 대해 앞장서 진상을 밝히고 유족과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할 국정원은 아무런 해명조차 없다. 지금까지 밝힌 것은 “수지김 사건을 올바르게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며 1월8일부터 18일까지 신건 원장을 비롯해 모든 직원들이 국실별로 자정결의대회를 갖고 새출발을 다짐하고 있다”는 보도자료를 낸 게 전부이다. 국정원은 13년 동안의 진실이 “캐비닛 안에 잠자고 있었다”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관련자들은 꽁꽁 숨어 있다. 이런 태도를 국가안보 때문이라고 여길 국민들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한 중소기업인은 개인 명의로 “수지김 사건 조작·은폐 관련자들에 대한 형법상의 공소시효가 유효한지 유권해석을 내려달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헌법재판소에 보냈다. 최근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장세동씨 처벌을 위한 서명운동을 준비하고 있는 수지김 가족들은 “장씨가 와의 인터뷰에서 분수 운운하며 우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이런 일을 하는 것처럼 얘기했는데, 이는 우리 가족을 두번 짓밟는 후안무치한 처사”라며 “우리는 가족된 도리와 국민된 도리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이 일을 하려는 것이다”는 뜻을 전해왔다.


“장세동씨, 정말 비겁하군요!”

최근 발간된 2월호는 전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씨 인터뷰를 19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실었다. 장씨는 이 인터뷰에서 수지김 사건은 “조작이 아닌 실수이고, 은폐가 아닌 방치”라고 말했다. 아울러 두 가지 ‘어리둥절한’ 주장을 했다.
하나는 안기부가 자신도 속였다는 주장이다. 87년 1월 당시 윤태식씨의 현지 기자회견을 강행하도록 재지시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싱가포르 파견 안기부 직원들은 윤씨가 횡설수설하는 것을 의심해 예정된 기자회견을 미루도록 본부에 건의했고 이에 따라 기자회견은 보류됐다. 그러나 불과 4시간 뒤인 1월8일 새벽 1시께 다시 “부장 지시다, 국가정책 판단이다”라고 쓰인 재지시 전문이 내려가 곧바로 기자회견이 강행된 것이다. 장씨는 이 인터뷰에서 “이 전문을 검찰 수사에서 처음 보고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본의 아니게 윤태식씨를 그대로 방치했다는 주장이다. 윤씨를 국내에 데려온 뒤 곧바로 살인자백을 받았으나 북한이 역선전할 것 등을 고려해 검찰 송치를 미루다가 그해 5월 안기부장직에서 물러나면서 그냥 넘어갔다는 것이다. 장씨는 “조직이 망신을 당하겠구나 하는 가벼운 부담은 있었지만, 관계자들이 윤태식을 잘 처리(검찰로 조용히 송치)할 것으로 믿었으나 제대로 처리가 안 됐다”고 말했다.
장씨의 주장에 대해 검찰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다. 수사를 지휘했던 서울지검 외사부 박영렬 부장검사는 “정말 비겁하고 치사한 이야기”라며 “검찰 수사발표문에도 나와 있지만 재지시를 하달한 전문 여러 통이 증거로 있는데도 장씨가 계속 모르는 문서라고 해서 그의 지시를 받았던 당시 해외담당국장 정아무개씨와 대질심문까지 한 뒤 판단한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검찰은 장씨의 기자회견 강행지시 부인 사실을 지난해 12월19일 수사발표 때 이미 공개하기도 했다. 수사발표문 가운데 ‘싱가포르 기자회견 보류 뒤 강행 지시 경위’ 부분에 별도로 *표시를 달아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 기자회견 전면 보류 지시가 있은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1월8일 01:00경 장세동 안기부장의 지시에 따라 당초 방침대로 윤태식의 납북 관련 기자회견을 하라는 안기부 본부의 지시가 싱가포르 현지 안기부 직원에게 하달되었음. *이에 대하여 장 부장은 재지시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나 정주년 해외담당국장 진술 및 당시 전문에 의하여 장 부장이 지시하였음이 확인됨.”
박 부장검사는 또한 장세동씨의 “방치” 주장에 대해서도 “눈가리고 아웅식”이라고 한마디로 일축했다. 장씨는 와의 인터뷰에서 “그해 5월 안기부장직을 물러나면서 사건을 마무리짓지 못해 안타깝다”며 “소극적으로 처리하다가 윤태식을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기부가 윤씨를 풀어준 것은 4월이다. 장세동씨가 안기부장으로 재직할 때 방면된 것이다. 박 부장검사는 “자기 손으로 도장 찍어 풀어줘놓고 왜 뒷사람 탓을 하는지 모르겠다. 대체 부장이 풀어준 사람을 누가 무슨 근거로 또 잡아와 송치할 수 있겠는가”라고 장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조작이 아니라 실수이며 은폐가 아니라 방치였다”는 주장에서 나아가 장씨는 ‘실수와 방치’마저도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변명을 하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장씨는 공소시효가 끝난 걸 알고 수사에 응했고, 모든 걸 자신이 책임진다는 언론플레이까지 했다. 수사과정에서도 대부분 시인해놓고는 결정적인 책임은 부하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씨의 주장이 특별법이 만들어질 것을 염두에 둔 ‘멀리 보아 한 일’인지, 당장의 책임추궁을 모면하려는 ‘얕은 꾀’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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