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잔치 벌어지니 다 떠나라?

등록 2003-05-29 00:00 수정 2020-05-03 04:23

탄생 300주년 축제에 들어간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상회담 준비 등으로 시민 고통 심해

5월27일로 도시 탄생 300주년을 맞는 러시아 제2의 도시, 옛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라고 불렸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5월23일을 기점으로 도시 탄생을 축하하는 10일 축제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구력 1703년 5월14일 피터 대제가 도시를 관통해 흐르는 네바강 중간에 위치한 일명 토끼섬에 요새 건설을 지시함으로써 탄생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후 3세기 동안 러시아 근현대사 격변의 한가운데 자리잡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이같은 도시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300주년은 세계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날짜별로 주제 선정

‘전 세계적 잔치’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시 정부는 물론 연방 차원에서도 발렌티나 마트비엔코 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300주년 기념 특별 준비위원회’(300주년 위원회)를 일찍이 구성해 지난 3년여 동안 대대적인 준비작업에 몰두해왔다. 5억달러 상당의 정부 특별예산과 외부의 대규모 후원에 힘입어 도시 곳곳에서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주요 사적 복구, 도로 보수, 건물외관 수리 등 전반적인 개조작업이 진행됐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예년에 비해 특별한 행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도시 탄생과 무관한 상업 단체들의 광고효과를 노리는 행사가 대부분인 가운데 그나마 학문·문화·예술 부문에선 나름의 자존심을 지켰다. 특히, 이 분야에서 한국계 동포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져 주목을 받고 있다. 레핀 국립미술아카데미 교수 이클림씨는 지난 4월부터 에르미타주·러시아 박물관 등 주요 박물관에서 열리는 ‘파스텔화로 본 페테르부르크’라는 전시회에 초대받아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작품은 레핀, 믈리니코프 등 러시아 미술사 대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었다. 또한 현역 예술사진 작가 강에밀씨는 도시 300주년 위원회 공모 프로젝트에 선정돼 ‘페테르부르크 300주년 사진전’의 주역이 되었다.

이번 행사의 특징은 무엇보다 행사 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날짜별로 적절한 주제를 선정해 그에 맞는 행사를 당일에 집중시킴으로써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명실상부하게 문화·예술·스포츠·학문·과학기술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도시임을 과시한다는 점이다. 이를 잘 나타내듯 축제 첫날 개막된 ‘전 세계 문화인 회의’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계문화의 수도’로 명명했다.

5월25일은 서민의 날이다. 그간 상트페테르부르크 5월 축제의 전통적인 행사 중 하나로 자리잡은 카니발 행사가 주요 포인트인데, 이날 시 정부는 권력을 카니발 정부로 임시 이양했다. 그 상징으로 카니발 정부의 수장은 시장의 넥타이를 자르며 “권력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 밖에 5월26일은 ‘학문과 현대과학의 날’이고 5월29일은 ‘극장의 날’이다. 축제 마지막 날인 6월1일에는 자라나는 새싹들이 준비한 ‘꼬마 카니발’ 행사가 펼쳐져 도시의 미래를 기원하는 것으로 10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그러나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보다 현지 언론이나 외신이 주목하는 점은 축제 후반기에 개최할 예정인 각종 외교행사다. 5월30~31일 막을 올리는 ‘국제 기념식’과 축제 마지막 날로 예정된 러시아와 미국의 정상회담이 행사의 백미라는 평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우선 30일은 독립국가연합 주최 기념식이 열리는데 이날 비공식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고 31일은 러시아-유럽연합간 정상회담이 개최된다. 특히 이번 회담에는 새로 유럽연합에 가입한 10개국을 포함한 유럽연합 회원국 정상이 모두 참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그 무게를 더하고 있다. 그와 함께 6월1일로 예정된 푸틴과 부시의 단독 정상회담에서는 이라크전 이후 변화된 환경 속에서 전략 핵공격무기에 대한 적절한 합의안이 도출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 외교의 중심으로

축제기간에 입국 의사를 밝힌 정상의 수만 48명이며 그들을 수행할 각국 고위관리들 수가 1만2천명을 훨씬 웃돈다. 300주년 축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일약 국제외교의 중심으로 부상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각국 정상의 입국사태로 보안대책이 엄중하다 보니 시민들이 축제를 즐기는 데 이만저만 고충이 따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시민들은 경호병력의 권한이 막강한 점을 강조하며 “어떤 경우라도 경찰들과 싸우지 말 것”을 얘기하고 있다. 공식기관이 각국 정상들이 입국하는 5월28일부터 아예 다차라 불리는 인근 교외별장 등 타 지역으로 떠날 것을 권고했다는 소문도 있다. 한 일간지는 당국자가 사실 여부를 묻는 기자에게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쓸데없는’ 도심 통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지방경찰청이 축제기간에 도로를 폐쇄한다고 발표했고, 심지어 전철 운행이 일시적으로 중단될 것이란 소문마저 들린다. 결국 축제기간에 도시를 떠나거나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라는 말밖에 되지 않으니 시민들이 “축제가 시민을 위한 잔치인지, 고위 관리들을 위한 잔치인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는 것은 당연하다.

웃기는 소문이 하나 있다. 도시경계에 위치한 교통경찰 검문소가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차량에 300주년 위원회가 기증한 보드카를 선물한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전러시아여론조사연구소’가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는 이번 잔치가 서민용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5월23일 에 발표된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9%가 정치 엘리트만을 위한 잔치가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누구를 위한 잔치인가”라는 암울한 질문 외에 잔치 이후의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5억달러가 훨씬 넘는 연방 특별예산을 도입하고 외부 스폰서까지 이곳저곳에서 끌어들이는 준비과정에서 예산의 부적절한 사용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물론 복구사업으로 많은 유적들이 옛 영화를 되찾았고, 올 봄 들어 거의 매일 2~3회씩 도시 곳곳을 물청소해 지난 300년간의 때를 다 씻어내는 듯했다. 가장 큰 성과로 꼽히는 것은 이미 20년 전 복구가 필수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복구 불능으로 여겨져온 라도쥐스키 역을 복원했다는 사실이다.

일부 시설 여전히 공사 중

하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이 미완의 작업으로 남아 있다. 국가건설위원회 지정 복구 대상 71개 문화 사적들 중 아직도 10여개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로 있고 스몰리 사원같이 외부 귀빈들의 행차가 예상되는 지역도 여전히 ‘공사 중’이다. 행사 이후 대통령 하계 전용별장으로 사용될 콘스탄니노프스키 궁전의 인부들은 축제 시작일인 5월23일에도 작업에 땀을 흘리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귀빈 행차가 전혀 예상되지 않은 지역의 복구 정도는 물어볼 필요가 없다.

시의회 의장 바딤 툴리파노프는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현 지사 야코블레프는 축제 뒤 자신의 임기를 채울 생각을 하지 말고 곧바로 퇴진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라며 책임을 추궁했다. 300주년 위원회도 복구작업의 부진에 대해 신중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위원장 발렌티나 마트비엔코 부총리는 “행사 이후 다방면으로 엄밀한 분석을 할 것이며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가 시 정부에 내려질 것”이라고 못박았다. ‘300주년 맞이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기도 한 그의 말은 간단명료했지만 현지 언론은 그가 “자기가 언급한 것 외에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평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도 있지만, 그간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300년 이후 다시 탄생할 페테르부르크를 기대해본다.

상트페테르부르크=글·사진 박현봉 전문위원 parkhb_spb@yahoo.com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