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정보라 작가도 불안정 노동자... 연구자들에겐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

비정규교수와 대학원생 연구자, 독립연구자가 말하는 ‘연구자공제회’가 절실한 이유
등록 2025-07-24 22:37 수정 2025-07-31 15:03
2025년 7월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료 ‘연구자의 집’에서 연구자공제회 설립에 관한 좌담이 열렸다. 왼쪽부터 정보라 소설가, 김강리 대학원생 연구자, 한영섭 독립연구자.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025년 7월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료 ‘연구자의 집’에서 연구자공제회 설립에 관한 좌담이 열렸다. 왼쪽부터 정보라 소설가, 김강리 대학원생 연구자, 한영섭 독립연구자.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연구자!”

연구자공제회가 무엇인지 문장 형태로 정의해달라고 하자 소설가 정보라는 ‘단결투쟁가’의 멜로디를 활용한다. ‘진짜 연구자’를 낳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는 강력한 열망이 느껴진다. 익숙한 음률로 머릿속에 반복 재생되는 그의 답변은 역설적으로 연구자가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기 어려운 단절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한 해 10만 명에 가까운 석박사가 배출되지만, 연구자들의 기반은 갈수록 취약해지고 있다. 기업화된 대학 내부에는 30여 개 직급으로 쪼개진 연구자가 있고 다양한 차별이 구조화돼 있다. 내외부의 인정시스템에 의한 미세 차별은 내면화되고, 연구자들은 경제적 곤란과 만성적 불안에 시달린다.

“삶은 형벌이 아니”( ‘아무튼, 데모’)라는 정보라의 말처럼 연구도 형벌이 아니다. 너무나 높은 비율로, 굉장히 빠른 속도로 프레카리아트(불안정 노동자)가 돼가는 연구자들에게 ‘안전’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파편화된 ‘연구자(硏究者)’가 ‘연대의 힘’을 믿는 ‘연구자(連究者)’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가 필요할까. 지난겨울부터 올봄까지 광장을 지켜왔던 연구자들은 그러한 질문에 답하며 이제 일상의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자율적 상호부조 조직인 ‘연구자공제회’를 설립한다.

비정규교수노조 활동부터 퇴직금 소송까지 연구자의 권리를 위해 힘써온 소설가 정보라와 대학원생 연구자이자 대학원생노조 수석부지부장인 김강리, 독립연구자이자 노동공제연합 ‘풀빵’ 학습원 부원장인 한영섭이 2025년 7월8일 서울 마포구 동교로 ‘연구자의 집’에서 좌담을 했다. ‘진짜 연구자’가 되는 길이 연대에 있다는 우리 모두의 ‘오래된 미래’를 확인하면서.

2025년 7월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로 ‘연구자의 집’에서 열린 좌담에서 정보라 소설가가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025년 7월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로 ‘연구자의 집’에서 열린 좌담에서 정보라 소설가가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연구자공제회는 연구자복지법 추진 중간 단계

—2025년 8월27일 연구자공제회가 출범한다. 어떤 이들이 함께하나.

한영섭(이하 한) “공제회(共濟會)는 한자어 그대로 ‘같이 어려움을 건넌다’는 뜻을 가진 상호부조 조직을 말한다. 연구자공제회도 연구자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서로 돕고 협력하는 연대조직이다. 지금 모여서 얘기하는 이 자리에도 대학 강사, 대학원생, 독립연구자와 같이 다양한 위치의 연구자들이 있지 않나.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연구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낀 연구자들과 각종 단체가 ‘연구자의 집’을 중심으로 결합해 연구자들의 사회안전망을 고민해왔다. 연구 분야, 세대, 연령, 젠더, 지역 등의 차이를 넘어서서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공감대 속에 연구자공제회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공제회라는 조직이 연구자들에게 왜 필요한가.

정보라(이하 정) “대학을 서열화하거나 학력을 위계화하는 사고방식을 넘어서 연구자들에게 더 강력하고 단단한 연대가 필요하다. 대학원생노조든 비정규교수노조든, 국립대 소속이든 사립대 소속이든, 연구자의 복지 실태나 후속 세대 양성 실태의 전반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종류의 연대가 아직 작동되지 않는다. 여러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이 폭넓게 모여 다양한 편차에 대해 섬세하고 촘촘하게 정보를 수집하며 의견을 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제회는 다양한 상황에 처한 연구자들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마중물이다.”

—연구자공제회의 설립 배경과 추진 과정에 대해 듣고 싶다.

김강리(이하 김) “2021년 ‘연구자 권리선언’이 있었다. 이후 연구자들은 당사자의 권리와 복지 증진, 사회안전망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법적·제도적 기반에 대한 많은 논의를 단계적으로 전개했다. 7회에 걸쳐 연구자복지법 토론회를 열었고, 유관단체를 중심으로 ‘연구자 욕구대회’를 진행 중이다. 연구자공제회는 연구자복지법을 추진하기 위한 중간 단계라 보면 된다. 지금까지 분절돼 다뤄졌던 다양한 연구자의 문제를 하나로 통합해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조직체를 만들고자 한다.”

—국가 주도의 연구자 지원 법안이나 연구자 복지 정책과는 접근이 다르다. 연구자들이 직접 주도하고 참여하는 자립적 모델로 시작하고 있다.

“연구자 당사자가 생활의 문제들을 일정 부분 해소하면서 동시에 그 힘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연구자공제회법 입법도 추진하고, 장기적으로는 연구자를 위한 연구자복지법도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인복지법 사례에서처럼 국가 주도의 톱다운 방식으로 법안을 만들다보면 한계가 많다. 관변화할 위험도 있다. 수동적으로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제도 개선을 하는 주체로서 세력화가 필요하다. 연구자 스스로가 존재 가치를 증명하면서 새로운 행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해야 한다.”

2025년 7월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로 ‘연구자의 집’에서 열린 좌담에서 사회를 맡은 노지영 경희대 강사가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025년 7월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로 ‘연구자의 집’에서 열린 좌담에서 사회를 맡은 노지영 경희대 강사가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외롭고 배고프고 쓸쓸한’ 불안정 연구자 모여라

—‘연구자 권리선언’ 때부터 정보라 작가는 비정규교수노조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퇴직금 소송을 하며 연구자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연구자의 권리를 보장하려면 권리선언 정도로 그치면 안 된다. 모든 연구자에게 제도적이고 정책적인 보장이 꼭 있어야 한다. 연구자 권리보장법이 제정돼야 하고, 연구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기관에 대해서는 처벌이나 불이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퇴직금 소송을 할 때, 비정규직 상태에서 만들었던 모든 업적이 법적으로는 불리한 증거로 사용되는 것을 봤다. 정규직 교수에게는 연구 성과로 집계되는 논문 실적, 번역 실적, 학술대회 참가 실적 등이 비정규직 교수에게는 퇴직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사유로 변질되더라. 강의를 위한 유기적 활동을 무시하고, 비정규 교수를 초단시간 노동자로 취급했다. 모두의 권리를 위해 나는 연구자가 초단시간 노동자가 아니라는 말을 판결문으로 받으려 한다.”

—연구 생태계는 점점 불안정해지는데, 불안정 연구자가 홀로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연구자가 처한 불안정한 현실이 연구자공제회를 만들려는 배경 중 하나다. 비정규 연구자의 임금수준이 전반적으로 너무 낮고 업무는 과중하다. 소속감을 느끼기 어렵고, 금융지원도 굉장히 제한적이다. 정보라 작가의 퇴직금 소송에서 보듯이 정규직 교수면 당연히 누릴 권리가 독립연구자나 비정규직 강사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문제로 변한다. 외롭고 배고프고 쓸쓸한 불안정 연구자의 처우 문제 해결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2025년 7월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로 ‘연구자의 집’에서 열린 좌담에서 김강리 대학원생 연구자가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025년 7월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로 ‘연구자의 집’에서 열린 좌담에서 김강리 대학원생 연구자가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불안정 연구자에게 일정한 비용을 정기적으로 부담하는 상호부조제도인 연구자공제회가 생긴다면 가입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설문 응답자 74.8%가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경제인문사회연구회, 2023) 연구자공제회에 가입하면 어떤 혜택이 있나.

“공제회 회원이 되면 명절 선물을 준다든지 병원비를 일부 부담한다든지 경조수당이나 재해사망위로금을 지급하는 등 다양한 일상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또 비상금고에 돈을 예치하고 공제회도 후원해 어려운 시기에 목돈을 쓸 수 있는 연구자 비상안전망을 만들려 한다. 추진위원들이 기금을 모았고, 현재 목표금액을 달성했다. 소득이 단절될 때 몇 배수의 대출도 가능하다. 점진적으로 연구자에게 필요한 것을 시도할 예정이다.”


—불안정해지는 연구 현실 속에서 기초학문의 수월성도 보장되기 어렵다. 기대되는 공제회 서비스나 향후 요청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연구자에게 필요한 학술자료 데이터베이스(DB) 접근권이 반드시 보장되면 좋겠다. 국외 데이터베이스 같은 경우, 개인이 가입할 수 없고 학교나 도서관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독립연구자나 학교·도서관에 소속되지 않은 신분의 연구자도 공공도서관에서 DB를 구독할 수 있도록 공제회가 연구자 복지 차원에서 요구해야 한다. 또 앞으로는 인공지능(AI)이 굉장히 침략적인 형태로 여러 분야에서 활용될 것이다. 비정규직이나 독립연구자, 대학원생처럼 연구 생태계 중에서도 취약한 지형에 있는 분들에게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다양한 안전망을 만드는 일에 차차 연구자공제회가 나서주면 좋겠다.”

2025년 7월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로 ‘연구자의 집’에서 열린 좌담에서 한영섭 독립연구자가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025년 7월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로 ‘연구자의 집’에서 열린 좌담에서 한영섭 독립연구자가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는’ 일이라면, 여기서 시작하자

—연구자공제회 출현이 한국 사회에 어떤 정신을 전달할 수 있을까. 케이(K)-연구자가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나.

“동료에게 도움받으며 나도 도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연구노동이라는 측면과 불안정노동이라는 측면에서 대안을 모색하면서, 단순한 경제조직을 넘어 한국 사회에 관계성의 철학을 전달하는 매개체 구실을 연구자들이 해나가야 한다. 공제회는 상호부조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자존감과 소속감을 주는 연구조직이 될 것이다.”

—학문후속세대에 연구자공제회란 어떤 의미인지?

“최근 대학원생노조 조합원 수가 2배로 늘었다. 광장에서 느꼈던 연대의 감각을 광장이 닫힌 뒤의 일상으로 가져가기 위해 가입한 사람이 많다. 이제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우리 삶이 더 이상 운으로 결정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보자고 얘기하고 싶다. 연구자공제회를 설립했다고 당장 내일 아침에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더 먼 길을 가기 위해 비상식량을 챙긴다 생각하고 같이 해보자. 다시 만난 세계, 다시 만들 세계가 그런 것이지 않을까.”

—공제회 가입을 독려하는 말씀을 부탁한다.

“노조 분회를 만들려 했다가 학교에서 해고당했을 때 당장 필요한 생활비를 구할 곳이 있다면, 투쟁 현장에서 다쳤을 때 입원비를 구할 수 있다면,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운동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기존 운동을 보완해서 손잡아주는 관계가 되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좀더 마음 편한 미래를 같이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불안정 연구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10년 전, 20년 전에도 누군가 논의했으리라. 그러나 오늘 모인 연구자들은 지금, 여기, 우리부터 시작하자고 권한다. 10년 이후 달라질 복지, 20년 이후 보완된 제도가 가능하다면 공제회를 설립 안 할 이유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연구 백년지대계’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불안정 연구자와 좀더 안정적인 선배 연구자들이 우선 같은 배를 타야 할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연대’라는 사회적 책임을 이행할 좋은 틀이 생겼으니, 사뿐히 정보무늬(QR) 코드를 찍어 연구자공제회에 탑승하면 된다.

 

진행 및 정리 노지영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