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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성 기자들이 뭉치는 이유

보수적·남성중심적 일본 미디어 업계에서 처음 생긴 여성기자협회… ‘젠더 표현 안내서’ 출간 등 변화 물결
등록 2025-02-21 22:20 수정 2025-02-27 06:50
2024년 10월25일 서울에 모인 한국과 일본의 여성 기자들. 한국여성기자협회가 주최한 한일여성기자포럼은 일본여성기자협회 발족의 주요한 자극제가 됐다. 앞줄 왼쪽 셋째가 일본여성기자협회의 대표를 맡은 아키야마 리사 가나가와신문 이사. 한국여성기자협회 제공

2024년 10월25일 서울에 모인 한국과 일본의 여성 기자들. 한국여성기자협회가 주최한 한일여성기자포럼은 일본여성기자협회 발족의 주요한 자극제가 됐다. 앞줄 왼쪽 셋째가 일본여성기자협회의 대표를 맡은 아키야마 리사 가나가와신문 이사. 한국여성기자협회 제공


“지금까지 일본의 신문사, 방송국, 통신사 등 언론사에는 여성기자협회가 없었습니다. 한국여성기자협회가 주최한 ‘한일여성기자포럼’에 참석해 한국에서는 이 같은 협회가 1961년 발족했고 33개사 1700여 명의 회원이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해당 포럼에 참여한 일본 여성 기자 6명이 뜻을 함께해 우선 지난해(2024년) 말 일본여성기자협회를 세웠습니다. 저를 초대 대표로 해 준비 기간을 거친 뒤 2025년 11월 공식적인 설립식을 열고자 합니다.”

이제 막 첫발을 뗀 일본여성기자협회의 대표를 맡은 아키야마 리사 가나가와 신문 이사의 말이다. 2024년 11월 6명으로 임시 발족한 협회는 앞으로 1년여의 준비 기간을 통해 세를 불린 뒤 오는 11월 공식 발족할 예정이다. 그의 말처럼, 일본 언론계에 여성 기자들만의 협회가 세워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이기로 유명했던 일본 언론계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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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미디어에서 쓰는 표현부터 바꿔야

“미디어 업계는 지금도 압도적인 남성 중심 사회입니다. 신문이며 티브이(TV)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아이나 여성도 이해할 수 있는 표현’ ‘내조의 힘’ ‘여성다운 섬세함’과 같은 말이 사용돼왔습니다. 이 책은 현역 기자들이 느낀 강한 위기감에서 태어났습니다.” 2025년 1월 한국어판이 출간된 일본신문노련의 젠더 표현 안내서인 ‘실패 없는 젠더 표현 가이드북’의 첫 대목이다.

이 책은 일본 내 신문 관련 산업의 노조 86곳이 가입한, 일본 유일의 산업별 노동조합인 일본신문노동조합연합에서 특별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던 여성 기자들이 나서서 집필한 것이다. 처음엔 언론계 내부용으로 배포할 계획이었지만 ‘누구나 콘텐츠 생산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널리 활용되도록 책으로 출판됐다.

2025년 1월 한국어판이 출간된 일본신문노련의 젠더 표현 안내서인 ‘실패 없는 젠더 표현 가이드북’.

2025년 1월 한국어판이 출간된 일본신문노련의 젠더 표현 안내서인 ‘실패 없는 젠더 표현 가이드북’.


젠더 표현과 관련한 안내서는 해당 언어와 미디어 업계의 관행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만 정리 가능하기 때문에 그 사회의 여성 기자들의 노력이 없이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일본에서 이와 같은 젠더 표현 안내서가 출판됐다는 사실과, 여성 기자들만의 협회가 구성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일본 언론계에서 소수였던 여성 기자들이 제대로 뭉치고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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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은 일본여성기자협회 설립을 주도하거나 ‘실패 없는 젠더 표현 가이드북’ 제작에 참여하는 등 ‘뭉치고 있는’ 일본 여성 기자들을 수소문해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직까지는 회사 안팎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익명을 요구한 이도 있었지만 모두 자신감 있는 어조로 ‘우리가 뭉치는 이유’와 ‘뭉치고 연대해야 하는 절박함’에 대해 설명했다.

일본여성기자협회의 대표 아키야마는 일본 가나가와현의 지방 신문사인 가나가와신문사에 1989년 입사해 시민정보부장, 문화부장, 통합편집국 차장, 경영전략본부 사무국장, 통합편집국장 등을 지낸 뒤 현재 이사직(편집·논설·경영 기획 담당)을 맡고 있다. 그는 2024년 2월 자신의 신문사가 지방지 최초로 다양성·공정성·포용성(DEI) 선언을 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성평등 문제는 개별 언론사의 노력과 미디어 업계 전반의 노력이 공동으로 진행돼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일본 사회의 젠더 문제가 해소되기 위해서는 우선 각자가 소속된 미디어 조직부터 바뀌어야 한다. 독자에게 뉴스를 전달하는 미디어 조직이 성평등을 목표로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각사의 노력과 동시에 미디어 업계 전체 차원에서 성평등을 추진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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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내가 소속된 조직부터

아키야마 대표는 한국여성기자협회와의 교류가 일본여성기자협회의 설립에 자극제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여성기자협회가 주최한 제1회와 2회 ‘한일여성기자포럼’에 연이어 참가하면서 일본에도 이렇게 여성 기자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조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한국과 일본이 직면한 젠더 평등의 과제가 매우 닮아 있어, 함께 공부하는 것이 젠더 균형 보도로 연결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일본 사회는 2010년대 중후반 미국과 한국 등 전세계 곳곳의 ‘미투’(MeToo·성폭력을 사회적으로 고발하는 운동) 흐름에도 뚜렷한 영향을 받지 않았을 정도로 보수적인 면모를 보여왔다. 2017년 일본에서 성폭행 피해자 최초로 얼굴을 드러내고 기자회견에 나섰던 언론인 이토 시오리는 “일본인이라면 부끄러워서 이런 성폭력 피해를 얼굴 드러내고 얘기 못할 텐데 저렇게 나서는 걸 보니 중국인이나 한국인 아니겠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익명을 요구한 일본의 한 여성 기자는 “유명 남성 기자에게 조언을 구하다가 성폭행을 당한 이토 시오리 사건은 언론계에 종사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분노를 일으켰다”며 “이어 2018년 당시 재무부 차관이 여성 기자를 성희롱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디어 산업 전체에서 성평등에 대한 의식이 크게 높아졌지만 남성 우월주의와 성 역할에 대한 일본 사회의 편견이 뿌리 깊어 보도에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2024년 10월25일 한국여성기자협회가 주최한 제2회 한일여성기자포럼의 모습. 사진 한국여성기자협회 제공

2024년 10월25일 한국여성기자협회가 주최한 제2회 한일여성기자포럼의 모습. 사진 한국여성기자협회 제공


2024년 한일여성기자포럼에 참여해 일본의 저출산·젠더 격차 문제에 관해 발표한 오다 마이코 닛케이 크로스우먼 편집위원은 “많은 미디어에서 조직 내부의 젠더 격차와 낡은 가치관 때문에 기자가 젠더 문제를 다루려고 해도 자유롭게 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며 “기사의 내용이 수정돼버리거나 지면을 배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도 일본도 젠더 격차가 큰 사회”라며 “환경이 비슷한 두 나라의 여성 기자들이 함께 손잡고, 젠더 격차 해소를 향해 움직여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언론인·고위 공직자 성폭력이 던진 충격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일본 여성 기자는 “여성 기자의 역량 강화에 기여할 일본여성기자협회 조직이 생겨서 기쁘다”며 “일본과 한국의 여성은 모두 좋은 엄마가 돼야 한다는 기대를 받는 동시에 열심히 일하는 환경에서 경력을 쌓아야 하는 공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한국 여성 기자들과의 교류로 얻은 교훈이 일본 미디어 산업과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일본의 전국지에서 일하는 또 다른 여성 기자는 “한국에서 여성 검사가 성폭력을 고발해 많은 여성에게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고 현재 일본에서도 여성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을 고발한 상태”라며 “공통점이 많은 한국과 일본의 여성 기자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연대해 성차별을 없애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25년 하반기에는 한국여성기자협회의 ‘제3회 한일여성기자포럼’과 일본여성기자협회의 공식 설립식이 연이어 예정돼 있다. 두 자리 모두 한국과 일본의 여성 기자들이 뭉칠 예정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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