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2월10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정문 앞에서 ‘재벌 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이 기자회견을 열고, 과로로 쓰러지는 반도체 노동자를 형상화하는 다이인 행위극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영원 기자
“3개월 내내 야근하고 사흘째 밤을 새우는데 ‘이러다 쓰러질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심장이 엇박자로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같이 야근하던 선배가 화장실 가다 쓰러졌는데 바로 조치 못한 적도 있고요. 계속된 야근으로 저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거든요. 그때 스스로에게 놀랐고 소름 끼쳤어요. ‘어떻게 이렇게 상식적이지 못한 사람이 될 수 있지’ 하고요. 지금도 그 기억이 죄책감과 충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삼성전자 연구개발자 한기박씨의 말이다.
‘몰아서 일하면 왜 안 되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근 삼성 노동자들에게 건넨 질문이다. 주 52시간 상한을 면제해달라는 반도체 업계의 주장에 동조하면서다. 노동계는 장시간·불규칙 노동 부활 조짐에 강하게 반발했다. 양대 노총과 시민사회단체는 2025년 2월10일 ‘반도체특별법 입법 저지 공동행동’을 꾸리고 총력 투쟁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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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프로젝트 기간이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입니다. 그거 끝나도 다른 프로젝트 도와야 하고요. 몰아서 일하면 뇌·심혈관 질환 발병률도 높아지는데 이미 나빠진 몸을 어떻게 되돌리나요. 쉰다는 건 인력이 충분히 있을 때나 가능한 거예요.” 한씨가 말했다. 그는 전국삼성전자노조 기흥·화성 지부장이다.
또 다른 연구개발직 노동자 ㄱ씨도 야근하던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신체를 다친 건 회복될지 몰라도 정신적 트라우마는 평생 간다. 몰아서 일하면 정말 ‘사고’ 난다”고 경고했다.
삼성전자 연구개발자 배아무개씨도 그런 일을 겪은 이들 중 하나다. 그는 2019년 과로에 따른 우울증을 뒤늦게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주말도 없이 주 99시간씩 일하다 사달이 났지만 그 뒤로도 업무를 줄이지 못해 우울증이 만성질환이 됐다.

2025년 2월10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정문 앞에서 ‘재벌 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이 기자회견을 열고, 과로로 쓰러지는 반도체 노동자를 형상화하는 다이인 행위극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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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주52시간 제외’ 요구가 삼성 안에서도 다수 의견이 아니라고 했다. 단기 성과가 필요한 임원들의 이해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게 국가정책으로 풀어야 하는 사안인지 모르겠어요. 같은 규제 안에서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돈을 잘 벌잖아요. 그러면 제도를 건드릴 게 아니라 삼성전자 안에서 해결해야죠. 회사가 ‘인재를 붙들어둘 만큼 좋은 직장인가’라는 관점으로 문제를 봐야 하는 거예요.”
반도체특별법 논의는 2024년 11월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채택하며 본격화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막대한 산업용수와 전력을 공급하고 연구개발직의 노동시간 상한을 없앤다는 조항이 담겼다. 당시 민주당은 다른 산업과의 형평과 노동조건 후퇴 등을 들어 거절했다. 언론에도 “반도체특별법의 노동시간 문제는 근로기준법상 유연근로제도를 활용하면 된다”며 제외 방침을 밝혔다.
일단락된 주제를 다시 꺼낸 건 이재명 대표다. 2025년 1월2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주 52시간 적용 예외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과감하고 전향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 2월3일에도 ‘정책 디베이트’를 열어 “(반도체 업계가)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당사자) 동의할 경우 몰아서 일할 수 있게 해주자고 하니 할 말이 없더라” 며 재계 주장에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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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연구개발 업계는 이미 수년에 걸쳐 서서히 노동시간 무법지대로 변했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를 이유로 고용노동부는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산업에 한해 특별연장근로(법이 정한 사유에 한해 1주 64시간까지 일을 시킬 수 있는 제도) 신청 사유를 확대했다. 기존에는 재난 수습 등 극한 상황에서만 특별연장근로 사용이 가능했는데 그 사유를 확대한 것이다. 2022년엔 ‘반도체 연구개발 생산직’으로 범위를 넓혔다. 이때부터 반도체 연구개발자들의 노동시간 상한은 1주 64시간으로 훌쩍 올랐다.
바늘 도둑은 소도둑이 됐다. 업계는 이제 우회로를 건너뛰고 아예 ‘주 52시간 상한 자체를 면제해달라'고 요구한다. SK하이닉스 김재범 R&D담당 부사장은 “현장에선 (특별연장근로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지만, 구성원 개별 동의와 고용노동부 장관 인가 등 절차로 어려움이 있어 적극적으로 활용 못하고 있다”고 2월3일 토론회에서 말했다. 그러나 법정 노동시간을 넘겨 일을 시키면서 노동자에게 동의를 안 받는 건 강제노역과 다름없다. 노동부 장관 인가 절차도 관련 서류를 노동청에 제출하면 별다른 쟁점 없이 승인된다.
반도체 업계는 사실상 노동시간 유연화가 아니라 장시간 노동을 원하고 있다. 김태정 삼성글로벌리서치 상무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하는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개발 직원들이 월초엔 늦게까지 실험하지만 월말이 되면 (노동시간 상한 때문에) 출근을 못한다”고 같은 토론회에서 말했다. 총량을 지킨다면 ‘몰아서’ 일한 만큼 잔여 근무시간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데 이를 애로사항으로 꺼낸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재명 대표는 2월10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노동시간 유연화가 총노동시간 연장이나 노동 대가 회피 수단이 되면 안 된다”며 선을 그었다.

‘삼성 백혈병’ 사망자의 아버지 황상기씨(위)를 비롯해 피해자 유가족들이, 지난해 7월 근로복지공단이 법원의 산업재해 인정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자 서울 영등포동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더구나 반도체 연구개발직은 생산 라인도 자주 드나든다. 백혈병 등 반도체 직업병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종란 반올림 노무사는 “반도체 연구직도 생산직처럼 기술 적용을 위해 라인을 드나드는 일이 많다. 노동시간이 길수록 유해물질에도 더 많이 노출된다”고 지적했다. 2019년 32살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숨진 삼성에스디아이(SDI) 수원연구소 연구개발자 황아무개씨 사례가 이 문제와 이어진다. 황씨는 2014년 삼성SDI에 입사해 3년간 웨이퍼 코팅 샘플을 제조하다 벤젠 등 발암물질에 노출됐다. 사망 뒤 뒤늦게 산재를 인정받았지만 삶을 되돌릴 순 없었다.
예외가 한 번 받아들여지면 다른 업종으로 확대될 위험도 있다. 홍성국 민주당 최고위원은 2월5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주 52시간 적용 예외 규정을 반도체에 국한하지 않고 소프트웨어 전 분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주영 노무사(민주노총 법률원장)는 “경영계가 장시간 노동을 못해서 연구개발을 못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이미 존재하는 예외 제도를 충분히 쓸 수 있는데도 더 풀어달라는 건 사용자가 언제든지 노동시간으로 ‘갑질’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2017년 대선에선 ‘저녁이 있는 삶’이 화두였지만 2025년 대선에선 ‘몰아서 일하는 삶’이 거론된다.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한 것이다. 주 52시간 상한제가 수년에 걸쳐 조금씩 허물어진 탓이 크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법 개정으로 주 52시간 상한제를 공식화했으나 재계 반발에 밀려 다양한 우회로를 만들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와 탄력근로제도는 최장 6개월까지, 특별연장근로는 반도체 연구개발로 확대했다. 이런 기조를 윤석열 정부가 이어받아 ‘주 69시간’ 노동시간 연장까지 꺼냈다.
박한솔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는 노동시간 논의가 사람의 삶을 다루는 일임을 명확히 한다. “노동시간 상한을 제외하자는 법은 노동자들이 삶을 살아갈 권리를 빼앗는 법입니다. 주말에 가족, 친구들과 저녁 먹으며 이야기 나누고 좋아하는 오티티(OTT) 시리즈 보며 ‘나의 삶’을 살아갈 기회를 빼앗는 법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곁을 살아가는 노동자가 특정 업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더 오래, 더 불규칙하게 일하는 사회를 원치 않습니다.”
반도체특별법이 서민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단 비판도 있다. 기후정의동맹의 은혜 활동가는 “2g의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1600g의 화석 연료가 필요하고 반도체 클러스터 운용에 하루 80만t 이상의 물이 필요하다. 농민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민중이 가스비에 덜덜 떠는 기후 불평등 시대에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산천을 파괴하고 노동자들을 뼛속까지 착취하도록 규제를 활짝 푸는 것이 맞는지, 그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성장인지 질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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