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피해자‘지원’센터가 아니라, 재난피해자‘권리’센터라는 말에 상당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2024년 1월31일 저녁 7시30분께, 서울 중구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의 개소식에서 축하의 말을 부탁받은 민동일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참사 유가족협의회 공동대표가 말했다. 참석자 일부는 무언의 동의를 나타냈다.
당장 전날인 1월30일만 해도, 정부는 ‘이태원참사 특별법’(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지원’하겠다는 종합지원대책을 발표했다.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시민대책회의는 “유가족들이 언제 재정적 지원과 배상을 요구했던가? 유가족들이 오직 바라는 것은 진상규명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유가족들의 요구를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묵살했다”고 했다.
재난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이 절실히 원하는 것은 정부의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구호활동에 가까운 지원이 아니다. 2017년 제천 화재참사로 어머니와 동생, 조카를 잃은 민동일 공동대표는 다른 유족들과 함께 2020년 충청북도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23년 3월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소를 제기하기 이전, 충북도와 협상하던 유족들은 화재참사에 대한 충북도의 책임을 협상안에 명시하길 바랐지만 충북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협상이 결렬되면서 충북도는 사망자 1명당 약 2억원을 지급하기로 한 계획을 백지화했다.
정부의 ‘지원’이 목적이었다면 수년에 걸친 법정 다툼을 감내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센터장은 “국가가 안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재난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시민 인권이 침해됐는데, 이들을 지원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표현”이라며 “인권중심적으로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재난피해자권리센터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날 문을 연 ‘우리함께’는 재난 피해자들의 권리 증진을 주목적으로 한 상설·전문 기관이다. 4·16재단 부설로 만들어진 센터는 향후 재난 피해자 중심의 접근을 통해 재난 피해자들의 권리 증진, 정책과 제도 변화, 시민의식 개선을 추진할 예정이다. 구체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의료·심리·법률, 진상규명·인권보호 등 도움이 필요한 분야에 전문 인력을 연결하고 기금을 지원하며, 피해자들을 연결하고 연대체를 지원하는 역할 등을 한다.
시간대와 장소가 제각기 다른 재난이지만, 대다수 재난 피해자들의 바람은 비슷하다. 도대체 왜 이런 참사가 발생했는지 과정을 낱낱이 살펴보고, 이 참사엔 정확히 누구의 책임이 있으며, 마침내 책임자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하지만 재난 피해자들은 재난 발생 직후부터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기 권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일방적 통보에 익숙한 행정기관의 언어 탓이 크다.
자녀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인 이요한(48)씨는 최근 들어 ‘누군가는 죽어야 끝날까, 아니면 죽어도 변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떠올리는 일이 늘었다. 올해 중학교를 졸업한 막내딸은 학교에 가는 대신, 온종일 집에 머무르며 원격으로 수업을 듣는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대인기피증, 우울증 등도 있다. 서서히 기도가 좁아지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일상생활조차 쉽지 않다. 수증기 때문에 호흡이 가빠져 홀로 목욕하는 일도 불가능하고, 때때로 새벽에 자다가 깨서 “아빠, 숨이 안 쉬어져”라고 다급하게 말한다. 요양생활수당과 치료비 일부를 지원받지만,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은 지원받지 못한다. 빚을 계속 내다 더는 은행에서 대출도 해주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녀의 간병비를 지원받기 위해 2023년 구제급여를 신청했지만, 공공기관에서 “적정성 검토 결과” 간병비 지급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씨는 “도대체 적정성 검토 결과가 뭔지, 어떤 것을 어떻게 검토해서 비지급 대상이 됐는지 설명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너희는 알 것도 없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우리가 검토한 결과만 봐라’라는 식의 대응은 피해자들의 알 권리를 침해한 게 아니냐”고 했다.
담당자에게 수차례 메모를 남기고, 2024년 1월 정보공개 청구를 한 뒤에야 자문회의에서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를 대략이라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피해자가 납득하도록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내가 유난이라고 반응하고, 피해자를 도와야 하는 기관이 오히려 이런 2차 피해를 계속 주니 잠도 못 자고 미쳐버릴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는 이씨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만 겪는 일이 아니다.
재난 참사 뒤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당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국가인권위원회는 2023년 5월 ‘재난 피해자 권리보호를 위한 인권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피해자는 수동적인 지원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이고, 국가가 이들의 회복과 지원에 의무가 있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한발 더 나아가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유해정 센터장은 “참사 현장에서나 의료·교육·추모 등에서 재난 피해자들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한데, 지금은 어디에도 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현재 기존 재난 피해자 권리 매뉴얼을 대폭 수정하고 이주민을 위한 매뉴얼도 만드는 센터는 향후 피해자권리보장법 등 재난 피해자를 보편적으로 지원할 방안을 법제화하는 활동도 할 계획이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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