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역 칼부림 사건’ 한 달이 지난 2023년 8월23일 밤 10시30분. 사건 발생지인 서울 관악구 신림역 4번 출구와 3번 출구 사이엔 여전히 경찰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인근에서 만난 경찰은 “아직도 장난전화나 예고글이 있어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신림역에서 다세대주택가로 이어지는 길목에 ‘안심이 앱을 켜고 안심귀가스카우트를 신청하라’는 펼침막과 ‘자율방범대 대원을 모집한다’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신림동에서 흉기난동과 성폭행, 살인 등 흉악범죄가 잇따르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경찰력 집중 배치’ ‘가로등·폐회로텔레비전(CCTV) 설치’ ‘마을 순찰 보안관 확대’ ‘범죄예방환경디자인’ 등 각종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신림동에서 30년 이상 거주한 ㄴ(38)씨는 “안 하는 것보단 (범죄 예방에) 나을 거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대책들이 흉악범죄를 예방하는 근본 방안이 될 수 있을까? 밤늦은 시각 신림역에서 다세대주택가까지 걸어봤다.
밤 10시25분, 펼침막에서 본 대로 내려받은 ‘안심이 앱’을 켜고 ‘스카우트’를 눌렀다. 만날 장소(신림역 2번 출구)와 만날 시간(밤 10시30분)을 입력하자 곧바로 관악구 스카우트 상황실에서 ‘신청하신 스카우트 서비스가 정상적으로 예약됐다’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하지만 곧이어 상황실에서 ‘이동 시간이 있기 때문에 최소 30분 전에 예약해야 한다. 죄송하지만 예약을 취소해달라’는 요지의 안내 전화가 왔다. 펼침막이나 앱에 ‘최소 30분 전 예약’이라는 문구가 있거나, 당초 앱에 30분 이후 시간만 설정하도록 시스템화됐다면, 시민 입장에선 더 편리할 듯했다. 예약이 가능했다고 해도 한계는 뚜렷하다. ‘자율방범대 대원 모집’ ‘의무경찰 재도입 검토’ 등이 언급되는 상황에서, 밤길을 무서워하는 수많은 시민을 위한 인력을 확보하기란 애초 불가능해 보였다.
신림역에서 서울대입구 쪽으로 다세대주택가가 이어지는 길목을 걸었다. 이곳엔 아파트 단지가 드물고 원룸과 빌라가 많다. 주로 강남과 여의도로 출퇴근하는 젊은 직장인이나,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대학생과 취업준비생이 몰려 사는 동네다. 골목이 너무 많기 때문에 CCTV가 설치된 골목도, 그렇지 않은 골목도 있다. CCTV 설치가 범죄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분석이 많지만, CCTV 한 곳을 설치하는 데 약 25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가는 점을 고려하면 사각지대를 완전히 극복하기는 어렵다.
특히 서울 열린데이터광장에 공개된 ‘서울시 5대 범죄 발생 현황 통계’와 ‘서울시 자치구 목적별 CCTV 설치수량’ 자료를 보면. 서울 25개 자치구 중 CCTV가 가장 많은 곳(2022년 기준)은 강남구(7243개)에 이어 관악구(5398개), 성북구(4842개) 순인데, 5대 범죄가 많이 발생한 곳 역시 강남구(6146건), 송파구(4714건), 관악구(4444건) 순이다. 카페, 술집, 영화관 등 상업시설이 모여 있고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은 CCTV가 많아도 범죄율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왜 신림동이었을까. 7월21일 신림동에서 흉기난동을 벌여 4명의 사상자를 낸 조선(33), 8월17일 신림동의 한 공원 둘레길에서 젊은 여성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최윤종(30), 둘 모두 신림동 주민이 아니었다.
우선 조씨는 범행 당일 인천 서구에서 서울 금천구까지 택시를 무임승차하고, 이후 금천구의 한 마트에서 흉기 2개를 훔친 뒤 신림동까지 다시 택시를 무임승차해 범행을 저질렀다. 조씨는 범행 장소를 신림역으로 잡은 이유에 대해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어, 사람이 많은 곳이라는 것을 알기에 범행 장소로 정했다”며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가 범행을 저지른 장소는 젊은 연인과 친구들 간 만남이 잦은 장소다. 범행지인 신림역 4번 출구 쪽에는 술집과 식당이, 맞은편엔 영화관·대형서점·쇼핑몰 등이 몰려 있어 유동인구가 많다. 범행을 저지른 뒤 칼을 들고 걸터앉아 있던 장소(도림천 공원 입구)도 ‘산책하는 가족’이 많은 동네다. 어린이 물놀이터, 별빛 조명 등이 설치돼 밤에도 산책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최씨가 범행을 저지른 장소는 정반대다. 관악산을 잇는 신림동 주택가의 공원 둘레길이라, 조용한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찾는다. 둘레길 인근 아파트 주민인 ㄱ(66)씨는 “아침이면 새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산책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간혹 들리면 기분 좋은 길”이라고 설명했다. 금천구에 거주하는 최씨는 경찰에 “CCTV가 없단 걸 알고 범행 장소로 정했다. 강간 목적이었고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진술한 것을 본다면, ‘CCTV가 없고 조용한 공원’ 어디든 범행지가 될 수 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이 있다면 범행을 저지른 이도, 피해를 입은 이도 모두 ‘청년’이라는 것이다. 30대 조선의 ‘칼부림 사건’으로 20대 남성 한 명이 숨지고 30대 남성 세 명이 다쳤다. 30대 최윤종의 ‘성폭행·살인 사건’으로 30대 여성 한 명이 숨졌다.
잇따른 흉악범죄자에겐 유사한 특징이 있었다. 조씨는 전과 등으로 취업이 어려웠고, 술에 의존한 생활을 해왔다. 최씨는 자택과 피시(PC)방을 오가며 은둔생활을 했다.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에서 무차별 흉기난동을 벌인 최원종(22)도 대인기피증으로 학교를 자퇴한 뒤 고립된 생활을 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23년 5월 ‘고립·은둔 청년 현황과 지원방안’ 보고서에서, 고립 청년이 2019년 34만 명에서 2021년 54만 명으로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서울시가 2022년 5~12월 고립 청년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시에서만 12만9천여 명에 이른다. 가장 큰 원인은 취업난과 심리적 어려움이었다.
남녀 청년들이 잇따라 목숨을 잃은 이때, 관악구 정치인들은 청년 사이의 혐오와 분노를 부추기는 데 몰두하고 있다. 2022년 12월 관악구 ‘여성친화도시’ 정책을 비판하며 “(여성안심귀갓길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한 것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홍보한 최인호 관악구의회 의원(국민의힘)은 사건 뒤 페이스북에 “(범죄 장소에 여성안심귀갓길이) 설치됐다고 하더라도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보장은 없다”고 말해 논란을 키웠다. “여성안심귀갓길 예산 삭감 규탄한다”는 진보당의 펼침막은 신림역 인근 행인들에게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렸다.
반면 ‘안심귀가스카우트를 신청하라’는 생활밀착형 펼침막은 유동인구가 적어지는 주택가 도보 구석, 인도가 아닌 차도를 향해 걸려 있었다. 펼침막에 기재된 정보무늬(QR코드)를 찍으려면 위험하게 차도로 내려가야 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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