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5년 2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인 베어링스가 파산했다. 싱가포르 지점에 근무하던 닉 리슨이란 직원이 상부의 허가 없이 수만건의 파생상품을 거래하다 회사에 천문학적 규모의 손실을 입힌 것이 계기가 됐다.
이번에는 미국 회계법인업계 ‘빅5’ 중 하나인 아서 앤더슨이 파산 직전에 내몰렸다. 발단은 미국 최대의 에너지 기업인 엔론사에 대한 부실회계. 그러나 앤더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앤더슨이 회계 부실을 감추기 위해 관련문서를 파기하는 등 수사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미국 휴스턴 연방지방법원은 지난 6월15일 앤더슨에 대해 사법방해죄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판결에서 법을 위반한 사람으로 앤더슨의 시카고 본사 변호사인 낸시 템플(사진)을 지목했다. 템플 변호사는 지난해 10월 엔론사 회계부실에 대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가 시작되기 전, 앤더슨 회계감사에게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 가능성을 시사하는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지난 5월 검찰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 배심원들은 템플 변호사의 이메일을 ‘앤더슨이 단순히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 엔론사의 관련 회계장부를 파기한 것이 아니라, 당국이 추적 중인 서류를 계획적으로 파기했음을 보여준 증거’로 지목했다.
아서 앤더슨 쪽은 “우리는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며 법원 판결에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상황을 되돌리기는 어려울 듯하다. 엔론사의 부실회계 스캔들에 휘말린 이후 주요 고객의 3분의 1이 앤더슨에 결별을 선언했고, 직원의 3분의 2가 회사를 떠났다. 이번 유죄판결로 앤더슨은 상장회사에 대한 회계업무도 할 수 없게 됐다. 게다가 앞으로 추가 기소가 잇따를 것으로 보여 회복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베어링스의 파산이 거론될 때마다 닉 리슨의 이름이 오르내리듯, 아서 앤더슨의 파멸사에 낸시 템플이란 이름이 따라다니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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