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약을 상품으로 취급한다 . 아플 때나 건강을 챙기려 약을 사고 , 주식시장에서 제약 · 바이오 회사의 주식을 구매하며 , 그 회사가 약을 많이 팔아 주가가 오르기를 기대한다 . 이는 약의 시장적 특성이다 . 하지만 약은 일반 소비재 같은 시장적 특성만 존재하지 않는다 .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하다는 ‘ 인권 ’ 중 하나인 건강권의 구성요소로서 약의 접근권이 포함된다 .
약의 접근이란 단순히 돈을 내고 약을 살 수 있다는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인지 검증 가능해야 하며 , 보건의료인의 도움을 받아 정보의 접근도 보장받아야 한다 . 그리고 누구든지 공평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 이는 약의 공공적 특성이다 . 우리는 이런 특성을 반영해 약의 판매를 허가하는 과정과 구매하는 과정에 공적 통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 하지만 명백히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약임에도 접근이 제한된 약이 있다 . 미국 , 중국 , 일본 , 대만 등 우리가 알 만한 국가의 국민은 접근 가능하지만 , 대한민국에서는 접근할 수 없는 약 . 바로 유산유도제 이야기다 .
낙태약, 인공임신중절약, 임신중지약, 미프진, RU-486, 미페프리스톤, 미프지미소….
유산유도제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사람들이 지난 30년 동안 유산유도제를 요구하며 그때마다 부른 이름이 달랐기 때문일지 모른다.
유산유도제가 처음 한국에서 도입 논의가 이뤄진 시점은 1994년이다. 미페프리스톤(Mifepristone) 성분의 유산유도제가 1990년 프랑스에서 미프진이라는 이름으로 허가되고 4년이 지난 시기다. 프랑스에서 허가된 이후 영국, 스웨덴 등에서 허가가 이어졌음에도 한국에서 수입은 이뤄지지 않았다. 프랑스 제약사 ‘루셀 위클라프’가 미페프리스톤 제조방법 특허를 가졌기 때문에 회사가 한국에 수출하지 않으면 이를 구매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미페프리스톤을 자체 생산하자는 요구가 촉발됐고, 실제 미페프리스톤 관련 특허 보호를 일부 제한하자는 ‘강제실시’가 청구됐다. 특허는 주요 목적인 기술의 사용이 충분히 달성되지 못하거나 특허 보호가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 보호를 제한하는 ‘강제실시’ 같은 제도가 있는데 이를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특허청은 ‘낙태법’이 있는 상황에 낙태 목적 의약품이 국내에서 허가되지 않은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불실시로 판단해 청구를 기각했다.
두 번째로 유산유도제 도입이 논의된 시점은 2000년이다. 그해 9월 미국 식품의약청(FDA)이 미페프리스톤 성분의 유산유도제를 허가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한국에서 유산유도제 도입 논의가 다시 일어났다. 당시 국정감사에서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은 6년 전 특허청처럼 한국이 낙태를 금지하므로 유산유도제 수입 허가가 어렵다는 의견을 표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사후피임약이 종교계와 산부인과협의회의 반대에도 2001년 11월 허가됐다.
이후 유산유도제 도입이 다시 논의된 것은 2010년대부터 임신중지 시술 병원에 대한 고소·고발과 임신중지 관련 처벌이 강화되고서다. 사람들은 병원을 방문하는 대신 약물적 임신중지를 하기 위한 방안을 살펴봤고, 2016년 대중적인 낙태죄 폐지 운동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미프진 합법화 요구가 등장했다. 2017년 23만여 명이 참여한 미프진 합법화 국민청원이 이루어졌고,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있었지만, 여전히 유산유도제 도입에는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유산유도제를 매우 위험한 약물로 생각한다 . 수년 전까지 유럽 몇몇 국가나 북미에서도 다르지 않았으며 , 이를 통제하기 위해 각종 사용 규제를 시행했다 . 하지만 2020 년 초 코로나 19 대유행이 발발하고 사람들이 병원에 가기 힘들어지자 여성의 임신을 중지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들은 기존 유산유도제 사용에 대한 제약 조건을 대부분 철회했다 . 그러고 나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
사람들이 수술 대신 유산유도제를 선택했고 , 더 저렴하면서 자율적인 방식의 유산유도제를 선호했다 . 그리고 사용이 늘면서 유산유도제가 위험하다는 편견도 자연스럽게 해소됐다 . 일상에서 코로나 19 위험이 사라진 지금 많은 국가는 유산유도제를 코로나 19 이전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 그동안 유산유도제의 위험을 강조하면서 만들어놓은 규제가 사실상 약물에 대한 편견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
통계적으로 유산유도제는 병원에서 쉽게 처방받는 항생제보다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적으며 , 약국에서 일반의약품으로 사먹는 진통제보다 부작용으로 병원에 입원할 확률이 더 낮다 . 우리가 쉽게 접하는 다른 의약품보다 안전한 약물이다 . 오히려 유산유도제 도입을 막음으로써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구한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복용하거나 지역에서 임신중절수술을 할 곳을 찾지 못해 임신중지 시기를 놓치는 위험이 훨씬 클 것이다 . 이는 우리의 편견이 불러오는 위험은 보지 못한 채 약물에 대한 위험을 따질 때 범하는 실수다 .
인슐린이 당뇨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 에이즈 치료제가 후천성면역결핍증(HIV)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것처럼 의약품 도입은 때로 사회 인식에 큰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를 제공한다 . 한국은 오랫동안 가족계획사업이나 출산장려정책 등으로 정부가 여성의 재생산을 통제했다 . 그런 면에서 유산유도제 도입 운동은 여성이 오롯한 재생산 주체가 되는 운동이며 , 유산유도제의 온전한 접근을 달성하는 날 재생산에 대한 사회 인식도 크게 변화할 것이다.
이동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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