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인 임보라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정의한 것처럼 한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유행에 드리워진 암흑을 응시하는 사람이 동시대인이라고 한다면 그를 동시대인이라 부르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이 시대의 암흑인 혐오에 내팽개쳐진 생명을 온몸으로 품으려 하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혐오의 시대는 혐오 대상으로 낙인찍힌 사람을 발가벗겨 삶 바깥으로 내친다.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주하는 존재다. 사이(between)가 존재해야 그 안(in)에 거주할 공간이 생긴다. 혐오는 무엇보다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이-안(in-between)을 파괴한다. 혐오 대상은 거주할 공간을 박탈당한다. 그는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들 사이에 감금당하고 그의 존엄은 완전히 발가벗겨진다.
임보라 목사는 그들에게서 제거된 이 ‘사이-안’을 다시 돌려줬다.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선다면 사이가 만들어지고 거주할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친구가 된다는 것이 위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구는 거주할 집을 돌려주고, 활동할 세계를 돌려준다. 그리고 그가 발가벗겨져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그의 몸을 옷으로 덮어준다.
발가벗겨진 자는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발가벗겨진 몸만을 본다. 그 몸으로 무엇을 말하냐고 조롱한다. 말하기 전에 옷부터 입으라 말한다. 시대의 폭력을 증언하기 위해 혐오 폭력을 받은 상처를 드러내며 항의해도 사람들은 상처를 보지 않고 벌거벗은 몸을 가리키며 비난한다. 무엇을 하더라도 그에게 가능한 유일한 것은 수치뿐이다.
그렇기에 친구가 된다는 건 그의 몸을 가려주는 일이다. 성경에서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잘 때 두 아들이 아비의 벗은 몸을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으로 들어가 덮어줬던 외투처럼 말이다. 몇몇 철학자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노아의 외투’다. 임보라 목사는 혐오로 조롱받고 발가벗겨진 소수자들의 ‘외투’가 됐던 사람이다. 그것도 가장 크고 소중한 외투인 ‘언어’로 그들을 덮어줬다.
언어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한 겹의 옷이다. 말한다는 건 그저 홀로 소리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들려야(to be heard) 말한 것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하는 자가 듣는 자의 말로 이야기하든가, 듣는 자가 말하는 이의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 소수자에게 가장 부정의하고 비참한 것은 자기 언어가 아닌, 자신을 부정하는 자들의 언어로 자기 정당성을 증명해야 하는 일이다. 가난한 이는 국가의 말로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하고, 성소수자는 가부장적 이성애자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 그렇기에 소수자는 말할수록 자신이 부정당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소수자에게 친구가 되려는 사람은 지배자의 언어를 가르쳐주려는 이가 아니다. 우선 소수자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곁에 서고 그 말을 배우는 사람이다. 말을 들어주는 사람, 나아가 자기들의 언어로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친구다. 지배자의 언어를 배워야지만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소수자에게 애초 증명을 요구하는 일이 부정의하고 부당하다는 것을 증언하며 지배에 균열을 내는 자가 바로 소수자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다.
친구는 말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천병희 옮김, 숲출판사 펴냄, 2005년)에서 사람의 삶에서 “마음껏 더불어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갖는 것”(118쪽)만큼 감미로운 일은 없다고 말한다. 그가 내 말을 알아듣기 때문에 내 기쁨을 나보다 더 기뻐하고 슬픔을 나보다 더 슬퍼한다. 키케로는 이런 친구가 없을 때 삶은 정말 불운하고 견디기 힘들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로 이야기하는 친구가 되는 것보다 더 큰 미덕은 없다.
임보라 목사가 바로 그런 친구였다. 그는 어디에서나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 개신교의 활동가 오수경씨가 알려준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임보라 목사는 오키나와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했다. 사실 오키나와에서는 일본어만 할 줄 알아도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오키나와어를 배웠다. 한국인과 함께 오키나와를 방문하면 그들의 말로 통역하며 방문자와 현지인을 연결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오키나와는 식민의 땅이다. 19세기 말 일본에 강제 복속되고, 일본 패전 이후 미군기지가 대규모로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렇기에 오키나와인에게 낯선 외국인이 오키나와어로 그들에게 말한다는 건, 자신들의 역사와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친구의 몸짓이다. 이것을 기뻐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임보라 목사는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소수자의 언어로 듣고 말함으로써 소수자가 존재 증명을 하지 않아도 됨을 증명한 사람이다. 그의 주변에는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많은 소수자가 모여들어 위로받았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배우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며 소수자들의 친구가 됐다.
이 점에서 그는 동시대의 주인공들 이야기에서 삭제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지면에서 이 시대에 유행하는 드라마와 소설의 특징을 말한 적이 있다. 삶의 ‘구질구질’한 장면이 과감하게 삭제되고 등장인물들은 그것을 개인적으로 감내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이야기 전개 속도가 매우 빠르고 특히 주인공들은 자신의 고통과 고뇌를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홀로 감당하며 헤쳐나간다.
이것은 주인공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지만, 사실은 삶의 중요한 측면을 삭제한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경쾌하지도 깔끔하지도 않다. 특히 고통은 깔끔하게 말해지거나 묵묵히 삭이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가장 큰 특징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은 울부짖음으로, 흐느낌으로, 호소로 터져나온다. 구질구질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이야기들이 주인공이 절망하고 나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정밀하게 묘사한 이유는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야기는 이런 장면을 삭제함으로써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 이 시대에 주인공으로 살고 싶다면 자신의 고통에 대해 징징거리지 말고 홀로 감내하며 침묵하라고 말이다. 고통 호소가 아무리 정당한 일이라고 해도 그것은 징징거리는 일이며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라고 가차 없이 비난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무해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수록 우울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임보라 목사는 당대가 이상화한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에 저항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또한 동시대인이다. 그는 사람이 홀로 고통을 감당하며 주인공이 될 수도, 될 필요도 없고,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파괴하는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임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우리는 결코 홀로 감당하는 ‘강인한’ 존재가 아니고 인간의 존재 기반은 ‘취약함’이며 그 취약함을 서로 돌보는 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써야 할 새로운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남겨진 자들이 할 일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위로받던 사람들이 모두 망연자실하며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슬픔에 파묻히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친구가 됐던 사람에게 가장 무례한 배신이 될 터이다. 그것은 키케로가 말한 것처럼 친구의 죽음 앞에서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것은 친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앞의 책, 107쪽)이기 때문이다. 유명을 달리한 친구를 앞에 두고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거기에 매몰되는 것, 이 얼마나 친구에 대한 배신이며 우정에 반하는 일인가 말이다.
키케로는 친구 스키피오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사랑한 것은 “그의 미덕”이라고 말한다. 키케로는 스키피오가 “아직도 살아 있고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저 빈말이 아니라 “그의 미덕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 미덕은 “늘 가까이했던 내 눈앞에서만 아른거리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도 찬란히 빛날 것”이며 “용감하게 큰일을 해내기를 바라는 사람” 모두에게 “기억과 본보기로 간직해야 할 것”(178쪽)이기 때문이다. 키케로가 강조하는 것처럼 우정은 미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 우정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친구가 된 임보라 목사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미덕이 무엇인지, 특히 그가 이 시대에 밝힌 미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이 쓰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슬픔이라는 나의 감정에 묻혀 그의 미덕을 소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회상하고 기억할수록 더 자라나고 불어”(178쪽)나게 하는 것이 바로 미덕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친구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키케로의 말처럼 “우정을 맺어주는 것도 미덕이고, 우정을 지켜주는 것도 미덕”(175쪽)이다.
이 시대는 우정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시대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돌보지 말고 외면하라고 요구한다. “남의 일에도 너무 깊이 말려드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며 근심만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걱정만 만들어내는 우정을 버리고 “근심으로부터 도망”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키케로는 역설한다. “근심으로부터 도망치다가는 미덕으로부터도 도망쳐야 한다”(139쪽)고 말이다. 이렇게 미덕을 내팽개치고 쾌락에나 몰두하라는 동시대에 맞서 임보라 목사는 같이 근심하며 친구가 되는 길을 택해 미덕으로서 우정, 미덕을 추구하는 우정이 가능함을 보여줬다.
이제 우리가 이 시대에 맞서 우정이 가능함을 보여줘야 한다. 우정의 가능성을 보여준 친구의 죽음 앞에서 시대의 불가능성에 환멸을 느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 환멸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가능성에 대해 체념으로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슬퍼하되 환멸에 맞서자. 이제부터는 단 한 사람도 체념하지 않고 서로를 위로하며 ‘함께’ 이기기 위해.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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