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14일 저녁 7시. 서울 용산구 이태원 광장엔 희미한 향냄새가 났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이마저도 금방 흩어졌다. 기자들과 유튜버들의 말소리 외엔 이따금 탄식 소리가 들렸다. 몽골텐트 4개를 붙여 만든 추모 공간.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는 이날 오후 4시가 넘어 이곳에 시민분향소를 만들었다. 사진과 이름을 공개하는 데 동의한 희생자 76명의 영정이 이름과 함께 놓였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체감온도 영하 10도를 넘어선 날씨에도 시민들은 퇴근길 분향소를 찾아 희생자를 애도했다. 어리고 환한, 아름다운 사진들 앞에서 추도하는 시민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시민은 76명의 희생자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고 묵념을 이어갔다. 참사 발생 46일 만에, 얼굴을 보고 이름을 부르며 하는 추모였다.
나흘 전인 12월10일,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모인 협의회가 공식 출범했다. 유가족들은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 모여 유가족협의회 창립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고 이지한씨의 어머니 조미은씨가 먼저 발언을 하자마자 유가족들은 눈물을 흘렸다. 각자가 잃은 희생자 이야기를 하며 유가족들은 오열했다. 한 유가족은 기자회견 중간에 쓰러져 119 구급대에 실려가기도 했다.
유가족협의회 창립선언문엔 △철저한 국정조사와 성역 없는 수사 등을 통해 그날의 진실을 밝힐 것 △책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유가족 소통 공간 마련 및 추모 공간 설치 △2차 가해에 대한 적극적 대처 등이 담겼다. 이들이 지금 바라는 것은 간단했다. 진심 어린 정부의 사과와 진상규명,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외침이었다.
“여기 왜 우리가 모여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평범한 사람이고 평소에 일기예보나 보지 뉴스는 보지도 않아요. 꼭 진상규명 해주시고 꼭 책임자 처벌해주세요.”(유가족 ㄱ씨)
“이 죽음이 당연한 죽음인가요. 저희가 왜 이렇게 협의체를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유가족 모아놓고 책임자로서 진정 어린 사과 한마디라도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안 왔을 거예요. 그런데 외면했잖아요.”(이정민 유가족협의회 부대표)
이들의 간절한 외침은 되레 공격으로 돌아왔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 출범 사실을 알리며 “세월호처럼 정쟁으로 소비되다가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썼다. 장제원 의원은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를 두고 “애초 합의해줘서는 안 될 사안이었다”고 말했다. 김미나(54·국민의힘·비례) 창원시의원은 입에 담기 어려운 막말을 퍼부었다.
국정조사를 촉구하기 위해 유가족협의회는 출범 이후 처음으로 12월1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정민 유가족협의회 부대표는 “국민의힘에 공식적으로 면담을 요청한다”며 “최근의 막말이 공식 입장이라면 한 분도 빠짐없이 면담에 응해서 유가족들에게 입장을 전해달라”고 했다. 이종철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국정조사가 왜 필요한지를 강조했다. “158명의 희생자가 오후 6시34분부터 외쳤지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유가족들 중 희생자가 어떤 시점에 어떻게 세상을 떠났고, 병원에는 어떻게 이송됐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정부의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정조사는 책임자만을 가리는 과정이 아니라 참사가 발생한 구조적 원인을 밝히고 참사 이후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는 과정이다.”
애초 여야는 2022년 11월24일 본회의에서 국정조사 계획서를 통과시키면서 2023년 1월7일까지 45일 동안 국정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다만 2023년 예산안 처리 직후 현장방문과 청문회 등 본조사에 들어가기로 합의했다. ‘예산안 처리 직후’라는 조건 때문에 국정조사는 시작부터 공전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처리하자 국민의힘 소속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들이 사퇴 의사를 밝혔다.
12월15일까지도 국회에서 예산안은 처리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이 15일 오후 예산안 중재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지만, 국민의힘은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히지 않았다. 문제는 16일 극적으로 예산안이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국정조사기간이 20여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조특위 위원인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12월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겨레21>과 만나 “지금의 국조 파행 책임은 오롯이 국민의힘에 있다. 야3당은 여당 복귀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확인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1월7일이 마감인데 조사보고서 채택까지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연말까지 조사를 마무리해야 한다”며 “야3당과 유가족들이 합의한 조사위원이라도 먼저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국정조사 기간 연장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용 의원은 이태원 국정조사에서 △사전 예방 △현장에서의 대응 △참사 이후 수습 과정 △재난 컨트롤타워 부재 등이 다뤄져야 한다고 꼽았다.
김남근 변호사(참여연대 정책자문위원장)는 “참사 직후 희생자들이 왜 고양과 용인, 평택에 흩어졌고 유가족들은 합동장례를 하지 못했는지, 유가족들이 같이 만날 수 없도록 했는지 국정조사에서 밝혀져야 할 부분”이라며 “2017년부터 있던 이태원 핼러윈 행사에 대한 대비가 왜 올해만 없었는지는 현재 수사 대상에 없다”고 말했다. 김혜진 생명안전넷 공동대표(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진상규명 시민참여위원회 위원)는 “수사는 법적 책임에 국한해 그날의 행위를 중심으로 하지만, 국정조사는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책임까지 물어야 재발 방지 대책이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당 참여 없이 야3당 단독으로만 국정조사를 끌고 갈 경우 정부가 자료 제출이나 증인 출석 등에 얼마나 협조할지가 관건이다. 민주당 국조특위 위원인 윤건영 의원은 12월15일 한국방송(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야3당 단독으로 간다면 정부 쪽에서 자료 요청에 대한 답도 안 하고 기관증인도 안 보낼 가능성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국정조사가 공전을 거듭하는 동안 안타까운 생명이 또 세상을 떠나는 일이 일어났다. 참사 당일 이태원을 방문했던 10대 고등학생이 12월12일 서울 마포구의 한 숙박업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 학생은 친구 2명과 함께 이태원을 방문해 홀로 구조된 뒤 트라우마를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12월16일 서울 이태원역 앞 도로에서 ‘참사 49일 시민추모제’를 연다. 추모행사 이름은 ‘우리를 기억해주세요’다.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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