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우리만의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계로 넘어간 것 같아. 대법원 판결을 보고 저승에 있는 (피해자) 친구들이 우리에게 잘했다, 잘됐다 할 것 같아.”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에 종사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2022년 9월29일 대법원이 원고들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가 군사동맹, 외화 획득을 위해 미군 기지촌을 운영·관리하면서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조장했다는 점, 다시 말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국가폭력의 희생자였다는 점이 대법원 판결로는 처음 인정된 것이다. 대법원은 “원고들에게 각 300만~700만원씩 지급하라”고 한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기지촌 피해 여성들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지 8년3개월 만에 나온 판결이다.
피해자 김숙자(77)씨는 이날 대법원 앞에서 판결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도 떠올렸다. 2014년 소송을 낼 때 122명이던 원고 가운데 그사이 24명이 숨졌다. “처음엔 우리가 자발적으로 이 세계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인정을 못 받을 줄 알았다. 그동안 좋게 말하면 ‘아가씨’, 나쁘게 말하면 ‘양공주’ 소리 들으며 살았다. 드디어 나라에서 잘못을 시인해주니 기뻤다. 이제는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친구들이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먼저 떠나서 슬프다.”
대법원 판결이 있은 지 열흘가량 지난 10월11일 경기도 평택 안정리 햇살사회복지회에서 김숙자씨를 만났다. 2002년 설립된 사단법인 햇살사회복지회는 기지촌 여성들을 지원하는 단체다.
김씨가 기지촌에 발을 들인 것은 18살 때였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그는 딸이라는 이유로 구박받다가 12살 때 집을 나왔다. “기차를 타고 전남 장성에 갔더니 어떤 아줌마가 군인 가족을 소개해줬어. 그 가족을 따라 서울 용산으로 가서 식모살이를 시작했지.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18살 때까지 식모살이했어. 하지만 돈 한 푼 못 받았지.”
식모살이를 그만둔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친구들을 따라 경기도 송탄 기지촌으로 갔다. “또래 애들 서넛이 송탄 기지촌에 갔는데 난 적응하지 못했어. 포주집에서 청소하는 일만 했지. 그런데 나를 눈여겨본 언니가 있었어. 돈을 잘 벌고 알아주는 언니였는데 미군과 결혼할 예정이었어. 그 언니가 엄마(포주)한테 나를 1년 동안만 데리고 있겠다고 했어. 그래서 그 언니 집에서 청소하며 살았어. 월급은 못 받았어. 1년이 지난 뒤 언니는 미국으로 가게 됐는데, 나를 불러 1년치 월급을 주더라. ‘얘, 너 포주집에 들어가지 마라. 이 돈 갖고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했어.”
김씨에게 그 언니는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19살 김씨는 기지촌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어린 소녀가 돈을 벌 방법은 또래가 있는 기지촌 생활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언니 집에서 미군이랑 같이 살다보니 영어도 할 줄 알았고,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에게 잘해준다고도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들어간 기지촌은 충남 천안시 성환읍에 있었다. 이후 충북 진천, 충남 태안, 경기도 평택까지 기지촌을 전전했다.
김씨와 친구들은 매주 두 차례 보건소에서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검사받고 탈락하면 낙검자 수용소에 들어갔다. “탈락하면 ‘몽키하우스’(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원숭이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에 갇혀 있어야 해. 꽃 이름이 붙은 방에서 치료받는데 며칠씩 있어야 했어. 진천 기지촌에 있을 때 친구가 검사에서 떨어졌어. 그래서 페니실린을 맞았는데 30분 만에 쇼크로 죽었어. 걔는 누워 있고 나는 기다리는데 그사이에 죽은 거야. 20대 초반 귀한 딸이 그런 식으로 죽었으면 나라에서 가만히 있었겠어?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우리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어.”
기지촌에서 일하며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다. 쿠바 출신 미군 ‘철수’였다. 쿠바식 이름이 길고 어려워 김씨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내 성인 김씨를 따라 김철수라고 지었어. 그가 20살, 내가 27살이었지. 2년 동안 같이 살았는데 철수가 미국으로 발령 나서 2년을 (한국에서) 기다렸지. 다시 한국에 와서 또 2년을 같이 살았어. 철수가 미국에 갈 땐 결혼해서 같이 가고 싶었는데 잘 안 됐지. 그 사람이 떠난 뒤 미국에 편지를 몇 번 보냈는데 답이 없더라고. 그러다가 철수 어머니가 답장을 보냈어. 한국 여자랑 결혼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다신 자기 아들에게 편지하지 말라고. 그 뒤로 연락하지 못했어.”
가끔 철수가 생각날 땐 그가 즐겨 불렀던 <꽃반지 끼고>라는 노래를 부른다. “10월6일이 철수 생일인데 잘 살고 있나 가끔 생각나. 철수가 떠나면서 사준 이불이 있는데 아직도 덮고 있어. 세상에 50년 된 이불을 덮는 사람이 있을까. 철수가 사준 일제 선풍기도 몇 년 전까지 썼는데 고장 났어. 선풍기 버릴 땐 눈물이 나더라고.”
31살에 평택 기지촌으로 온 뒤 김씨는 평택에 정착했다. 줄곧 혼자 지냈다. 58살까지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그때 모아둔 돈으로 지금 생계를 꾸려나간다. 일주일에 한 번씩 햇살사회복지회를 찾아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이 그에겐 큰 힘이 된다. “노인정 가면 다들 자식 자랑, 손주 자랑 하는데 난 듣기만 하고 어울리지 못하거든. 이 세상에 나 혼자인데, 그래도 여기 오면 편안해.”
김씨는 “평생 마음속에 바위만 한 짐을 지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2012년 연극 공연에 도전하면서 마음속 바위는 작은 돌이 됐다. 기지촌 위안부 할머니들은 연극 <일곱집매>(2012)와 <숙자 이야기>(2012)를 공연했고 2016년엔 뮤지컬까지 도전해 <그대 있는 곳까지>를 무대에 올렸다. 2020년엔 연극 <문밖에서>를 공연했다. “나는 배우가 아니니까 대사 없이 즉흥으로 말하면 되는데 내 삶 이야기니까 말이 술술 나오더라고. 공연할 때마다 다른 말을 하긴 했지만.(웃음) 원래는 내성적인 성격인데 연극을 하면서 내 성격이 바뀐 거야.” 김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 같은 사람의 인생도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구나 싶어서 보람이 생기더라고. 연극하고 나서부터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놨어.”
김씨는 연극 공연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한편 소송으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갈 수 있기를 염원했다. 기지촌 ‘위안부’ 할머니들이 세상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법정까지 갈 수 있게 용기를 준 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언니들, 형님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어. 형님들이 ‘얘들아, 너희 잘못 아니니까 후회하지 말고 나서라’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시작할 수 있었어.”
2014년 6월, 원고 김숙자 외 122명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면서 “성매매가 쉽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가 불법적인 기지촌을 조성해 운영하고 불법행위를 방치했을 뿐만 아니라 ‘애국교육’ 등을 통해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강제격리시켜 폭력적으로 성병 치료 등을 했다”고 주장했다.
2017년 1심 재판부는 원고 122명 가운데 1977년 8월 이전에 ‘낙검자 수용소’에 격리수용된 57명만 피해자로 인정하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1977년 8월19일 ‘전염병예방법’ 시행규칙이 생기기 전에 이뤄진 성병 감염인의 격리수용 치료는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위법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기지촌 성매매를 조장·권유했다는 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의지로 기지촌 내 성매매를 시작하지 않거나 그만두지 못할 정도의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1심과 달리 국가가 기지촌 내 성매매를 방치·묵인하거나 최소한도의 개입·관리를 넘어 성매매 행위를 적극적으로 조장·정당화했다고 판단했다. 2018년 2월 항소심 법원은 원고 117명 모두에게 국가가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김씨에겐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했더라도 피해자가 맞다’는 재판부의 말이 힘이 됐다. “설령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시작했더라도 피고가 이를 기화로 원고들의 성 내지 인간적 존엄성을 군사동맹의 공고화 또는 외화 획득의 수단으로 삼은 이상, 원고들은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봄이 타당하다.”(서울고등법원 제22민사부 2018년 2월8일)
이후 시간은 4년이나 흘렀다. 대법원도 기지촌 할머니들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의 기지촌 조성·관리·운영 행위 및 성매매 정당화 및 조장 행위는 법을 위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권존중의무 등 마땅히 준수되어야 할 준칙과 규범을 위반한 것이다. 원고들은 국가의 위법행위로 인해 인격권 내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함으로써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대법원 2부 2022년 9월29일)
김씨는 대법원 판결을 듣고 “이제야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앞으로 눈치 안 보고 살 거야. 이제 떳떳하게 살려고.”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 엄숙자씨가 쓴 시가 김씨의 마음을 헤아려준다. “나 여기 있네/ 한겨울 헐벗은 나무처럼/ 텅텅 비었고/ 아무것도 없어도/ 서리 맞은 국화꽃처럼/ 청초하게/ 순결하게/ 그렇게 피고 싶네/ 그렇게 있고 싶네”
글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사진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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