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 11월, 전남 화순군 도곡면 주민인 김씨 사촌형제(당시 44살, 26살)는 마을 뒷산에서 땔나무를 지게에 지고 내려오다가 경찰에 사살됐다. 화순 일대에서 빨치산 토벌 작전을 벌이던 군경이 민간인 김씨 형제를 빨치산으로 간주해 즉결 처형한 것이다. 당시 3살 꼬마이던 동생 김씨의 아들은 70년이 지나서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정근식, 진실화해위)에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그는 “무기도 없고 나뭇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라 붙잡아서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무조건 총을 쏘아 죽였다. 빨치산들이 있는 깊은 산도 아니고 바로 마을과 가까운 뒷산이었다”고 주장했다.
진실화해위는 1950년 11월부터 1951년 6월까지 화순군 일대에서 군경의 수복 작전 중 부역 혐의나 빨치산 협조, 입산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주민 47명이 살해된 사건에 대해 2022년 6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당시 희생자는 농부, 목수, 주부, 광업소 직원 등 무고한 민간인이었으며, 2~3살 어린이 3명과 부녀자 9명도 포함됐다.
1950년 9~10월, 충남 홍성에선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하던 인민군과 지방 좌익 세력이 대한청년단 등 반공·우익단체 회원과 공무원, 군경 가족 48명을 학교 운동장에서 인민재판을 연 뒤 처형했다. 강제 북송 중 피살된 민간인도 많았다.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 서기이던 박○○은 집 마당에서 아들과 새끼줄을 꼬던 중 내무서로 연행됐다. 9월 말께 인민군은 후퇴길에 박씨 등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우익 인사 10여 명을 트럭에 싣고 가다가 미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았다. 사람들이 트럭에서 뛰어내려 몸을 숨기려 하자 인민군은 탈주를 막으려 총을 난사했다. 희생자는 모두 20살 이상 남성이었다.
앞서 1950년 7월, 홍성 경찰은 물밀듯 내려오는 북한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기 직전에 예비검속돼 수감됐던 국민보도연맹원 100여 명을 상부의 지시로 폐광에서 집단 사살했다. 두 달 뒤 좌익 적대세력이 벌인 우익 주민 학살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는 총 19명의 희생 사실을 확인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관련 용어(과거사정리법 제3장)
진실규명 신청(제19조): 희생자, 피해자 및 그 유족, 이들과 친족관계자, 특별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의 신청
진실규명 조사 개시(제22조): 진실규명 신청이 이 법에서 정한 각하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에 결정 및 지체 없이 조사
진실규명 결정(제26조): 조사가 종료되어 진실규명이 된 경우 조사 결과를 의결로써 결정(재적위원 9명 중 과반수 찬성)
보고 및 의견 진술 기회(제32조): 보고서에는 진실규명 피해자·희생자의 명예 회복, 사건의 재발 방지, 법령·제도·정책·관행의 시정 및 개폐 등에 관하여 국가가 해야 할 조치 등에 대한 권고를 포함해야
1956년 10월, 북한 황해도 용연군 용정리 바닷가 집에 살던 당시 19살 늦깎이 중학생 김주삼(85)씨는 밤늦게 집에 들이닥친 무장 괴한들에 의해 혼비백산했다. 야근하는 홀어머니를 기다리다가 잠이 든 참이었다. 괴한들은 남한에서 잠입한 공군첩보대 소속 북파 공작원이었다. 김씨는 어린 여동생 4명을 집에 남겨둔 채 목선에 태워져 남한으로 끌려왔다. 김씨는 서울 구로구에 있던 공군 첩보대 기지로 이송돼 황해도 지역의 인민군 부대 위치와 교량 등 지형 정보에 대해 1년이나 신문당했다. 그 뒤로도 3년 동안 아무런 보수도 받지 못하고 온갖 잡일과 노역에 동원됐다.
1961년에야 풀려난 김씨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편입됐다. 신규 발급된 호적의 주소지는 첩보부대 인근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한 땅에서 김씨는 비닐하우스에 집을 짓고 일용직을 전전하며 힘겹게 생계를 이어갔다. 공안당국의 사찰과 감시는 평생 풀리지 않는 족쇄였다. 김씨는 나이 팔순을 훌쩍 넘긴 2020년에야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김씨에게 북에서 납치됐다는 증거를 요구했다. 막막했다. 고심하던 김씨는 2021년 진실화해위의 문을 두드렸다. 2022년 8월10일, 진실화해위는 1년3개월에 걸친 조사 과정에서 국방부 문서 등 증거물을 확보해 김씨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국가의 사과와 김씨의 명예 회복, 북한 가족과의 상봉 추진도 ‘권고’했다.
1961년 11월, 임○○씨는 충남 서산군 인지면 모월리에서 가족 7명과 살던 주민이었다. 어느 날 낯선 남자 15명이 들이닥쳐 잠잘 곳을 내놓으라며 집을 빼앗았다. 서산개척단 단원들이었다. 임씨는 “당시 아버지는 간첩이 온 줄 알고 경찰과 서산군청에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이후 개척단 사람들에게 밭이랑 농작물도 다 빼앗겨서 생계가 힘들어지자 아버지는 개척단에 수용돼 배급받아 생활했다”고 진실화해위에 진술했다.
간첩인 줄 알았던 서산개척단서산개척단은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사회 부패와 구악 일소’라는 구실로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 전국에서 ‘고아, 부랑인, 윤락여성, 무의탁자’ 등을 불법체포해 강제수용하고 끔찍한 인권유린을 저지른 간척사업장이다. 서울역 앞 구두닦이 손○○씨는 고학생 숙소에서 잠자던 새벽에 군경에 끌려갔다. 김○○씨는 냉차와 아이스크림 노점상을 하다 단속됐다. 이○○씨는 전북 김제에서 가족과 서울로 기차를 타고 가다가 대전역에서 정차 중 이유 없이 경찰에 붙잡혀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성○○씨는 야간 통행금지에 걸려 간척단에 끌려왔다. 다른 김○○씨는 “개척단 간부들이 서울역과 대전 지역에 밤에 가서 여자들을 납치해 데리고 왔다. 통행금지 시간에도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다”고 증언했다.
수용소 생활은 지옥이었다. 수용자들은 군 조직을 본떠 소대-중대-대대-연대로 편성됐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채 험난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면회와 서신 교환은 금지됐다. ‘구호반’(경비대)이 24시간 순찰을 하며 삼엄하게 감시했다. “도망가다가 붙잡힌 사람은 간부들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반 죽을 만큼 때렸다.”(성○○ 진술) 삽과 곡괭이만으로 돌밭을 일구고 갯벌을 팠다. 일하다 한눈을 팔아도 무차별 폭행이 뒤따랐다. “심하게 맞아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사람들,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맞은 사람이 의무실에 실려가도 약이 없었다. 사망자는 장례도 없이 그냥 가마니에 싸서 공동묘지에 묻었다.”(이○○) “의사의 사망진단서는 형식적이었고, 사인은 하나같이 ‘병사’였다.”(행정반 송○○) “개척단은 죽어서야 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기술반 손○○)
1961년 11월부터 1967년 8월까지 ‘서산 자활정착사업장’에 수용된 피해자는 1700명이 넘는다. 이 중 287명이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2022년 5월, 진실화해위는 서산개척단 집단수용 사건에 대해 국가기관으로는 처음 ‘진실규명’을 의결했다. 피해자와 가족들에 대한 국가의 사과, 피해와 명예의 회복을 위한 후속 조치, 정당한 토지 분배와 경제적 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권고’했다.
2020년 12월 출범한 제2기 진실화해위가 그동안의 조사 결과물을 본격적으로 내놓고 있다. 2022년 8월16일에는 <2022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2021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이어 세 번째 보고서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정리법)은 진실화해위가 활동 기간 중 “매년 2차례 조사보고서”와 “활동의 최종 종료 뒤 6월 이내에 종합보고서를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하도록 규정했다.
2021년 상반기 첫 보고서에는 조사 신청 접수 현황과 조사 개시를 결정한 사건 목록만 수록됐다. 2021년 하반기에는 첫 진실규명 사건이 2건 나왔다. 둘 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돼 법원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한 피해자를 확인한 사건이었다. 100년 가까이 묻혀 있던 명예가 회복됐다.
이번 2022년 상반기 조사보고서에는 2기 진실화해위가 해당 기간에 조사를 마치고 ‘진실규명’을 의결한 사건(8건)의 자세한 사건 개요와 조사 과정, 결정 내용과 권고 사항 등 결정서 전문이 담겼다. 남북한의 극한 대립이 낳은 민간인 학살과 냉전에 기생한 권위주의 정권의 인권침해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건들이다. 국가폭력에 의한 억울한 피해와 그 회복의 필요성을 뒤늦게나마 국가기구가 공식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과거사정리법은 진실규명의 범위를 ①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 ②일제강점기 이후 주권 수호 및 국력 신장 해외동포사 ③1945년 8월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 시기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④1945년 8월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발생한 사망·상해·실종, 중대한 인권침해와 조작 의혹 사건 ⑤1945년 8월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적대세력에 의한 테러·폭력·학살·의문사 ⑥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건 등으로 규정했다. 2기 진실화해위의 활동 기간은 첫 번째 조사 개시 결정일(2021년 5월)부터 3년이며, 1년 이내 범위에서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이에 따라 2기 진실화해위는 최소 2024년 5월까지 활동이 보장된다. 앞서 1기 진실화해위는 2006년 4월부터 2010년 6월까지 4년2개월 동안 활동했다.
2기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진실규명 접수는 1기 때보다 크게 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된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인권침해 사건이 급증하는 흐름도 뚜렷하다. 2기 진실화해위에는 2020년 12월 최초 접수부터 2022년 6월까지 1년7개월 동안 누계 1만5429건의 진실규명 신청이 접수됐다. 이 가운데 한국전쟁 시기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희생(56.1%)과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희생(17.7%) 사건이 가장 많았고, 인권침해 및 조작 의혹 사건은 6.7%였다. 그러나 최근 6개월 신청만 놓고 보면 전체 2766건 중 인권침해 사건이 413건(14.9%)으로 비중이 크게 늘었다. 이런 흐름은 앞서 1기 진실화해위(2005~2010년) 때와 확연히 대조된다. 1기 진실화해위가 접수한 진실규명 신청 사건은 모두 1만860건이었다. 이 중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시기 군경과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 9609건(88.5%)으로 대부분이었고, 인권침해 사건은 612건(5.6%)에 그쳤다.
1기 활동 뒤 국가에 대한 기대 커져진실화해위 관계자는 2기 들어 인권침해 사건을 포함해 진실규명 접수가 급증하는 배경으로 ‘국가에 대한 기대’를 들었다. “1기 때는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않은 피해자가 많았다. 국가폭력 피해자 상당수가 수감 중이거나 보안관찰법 감시 대상이었고, ‘이거 하다가 또 당하는 거 아냐?’라는 의심을 할 만큼 국가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그런데 진실규명 결정이 나오고, 국가가 사과하고, 재심이 진행되고,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하고, 이런 식으로 세상이 바뀌어가니까 과거사 진실규명의 길을 다시 열어달라는 요구가 계속 빗발쳤다. 진실화해위 2기가 재출범하게 된 계기였다.” 위 관계자는 “1기 때는 한국전쟁 관련 사건을 하기에도 벅찼는데, 2기 들어 집단적 인권침해 사건 신청이 많이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이 된 사건들에는 피해 회복을 위한 국가의 책임을 명시한 ‘이행 권고’를 붙인다. 그러나 이 ‘권고’는 법적·행정적 강제력이 없다. 국가기관의 실질적 후속 조처는 행정부 관련 부처의 몫이다.
행정안전부는 임시조직으로 ‘과거사 관련 업무 지원단’을 두고 있다. 지원단에서 이행 관리 업무를 총괄하는 이행·송무관리과 관계자는 “현재 우리 과의 3개 팀 중 이행 권고 업무팀 직원은 파견 공무원 2명뿐이다. 현재 1기 진실화해위의 권고 396건을 처리하고 있으며, 2기 권고의 이행 관리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진실화해위는 행안부에 이행 권고 통지서를 전달하려 했지만 접수를 거부당했다. 행안부 업무 지원단 관계자는 “(진실화해위 쪽과) 실무 협의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 조율해야 할 사항”이라고 말했다. 앞서 1기 위원회 때 노무현 정부가 진실화해위 이행 권고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 국무총리실에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 권고 사항 처리 기획단’을 설치·운영한 것과 크게 대조된다.
진실화해위 쪽은 2022년 6월 말 이후 최근까지 행안부 사회통합지원과를 통해 ‘권고 이행’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장관 면담을 요청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국가폭력 희생자와 인권침해 피해자는 언제쯤 명예 회복과 피해 배·보상이 이뤄질지 알 수 없이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일부 피해자는 손해배상 소송을 냈거나 준비 중이지만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는 또다시 국가와 힘겨루기를 해야 한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피해자들은 국가가 진실을 규명했으니 당연히 국가가 보상도 해줄 거라고 생각할 텐데 그게 가시화, 구체화하지 않고 있다. 2019년 헌법재판소는 과거사 사건의 손해배상 소멸시효를 ‘진실규명’이 결정된 날로부터 3년이라고 결정했다. 피해자들은 시간이 없고 마음이 다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기 진실화해위의 과거사 진실규명 신청 접수 기간은 2022년 12월9일까지다.
문의 02-3393-9700, 자세한 신청 방법은 누리집 참조(www.jinsil.go.kr/fnt/bbm/bbs/selectBoardArticleView.do?nttId=22956)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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