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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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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예의를 갖춰라

‘세월호 기억공간’ 설계 참여한 건축가의 호소
2021년 7월5일 서울시의 철거 통보에 부쳐
등록 2021-07-17 07:40 수정 2021-07-18 01:02
서울 광화문 ‘세월호 기억공간’ 옆 광장에서 공연하는 모습. 김종오 사진가 제공

서울 광화문 ‘세월호 기억공간’ 옆 광장에서 공연하는 모습. 김종오 사진가 제공

2019년 3월 세월호 천막 14개 동이 철거되기 전날 가족들은 이운식을 했다. 200여 명 부모의 뒷모습과 걸음걸이에 나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분향소에 영정이 걸릴 때만 해도 304명 중 한 명으로 동일하게 인식됐던 희생자들이, 한 장 사진으로 가족 가슴에 차례로 안길 때 잘 세어지지조차 않는 그 많은 죽음의 개수가 낱낱이 구별되는 고통으로 전달됐다. 영정들이 옮겨지고 빈 벽만 남은 천막 분향소 앞에서 서성대던 시민들은 뜨거운 묵념을 했다. 진작 광장에 오지 않았던 미안함과 뒤늦은 비통함으로 그곳이 분향소였을 때보다 더 긴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천막은 얇았고 고통과 성찰은 깊었다

철거가 시작되자 천막 속 물건이 한꺼번에 밖으로 끄집어내졌다. 최소한의 세간으로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버텨온 4년8개월의 시간이 목도됐다. 유족들의 시간과 물건, 시민들의 시간과 물건이 거친 천막 속에서 치열하게 의지하며 낡아가던 중의 광경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흔적이라고 얘기할 수 없는, 여전히 처절히 현재 진행 중인 지독한 실체임을 보았다. 이 천막들이 치워진 자리에 새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설계를 마친 새 기억공간은 저 천막, 원형의 거처들에 비해 과장될 수도, 진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에 전율이 왔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더 해야, 얼마큼 정성껏 만들어야 그것이 천막을 대신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었다.

세월호 참사를 외면해오던 기자들이 그날따라 유난스러웠던 반면 유족들은 의연했다. 고통을 무표정으로 짓누르던 부모들에게, 걷히는 천막을 보는 심경을 묻는 잔인한 취재가 난무했다. 4년8개월간의 ‘진상규명과 기억투쟁’ 속에 비인륜적 조롱, 폄훼를 견디는 중에도 곁을 지켜준 시민에게 광장을 돌려주고자 천막 자진 철거를 결정했음은 유가족의 고통과 싸우는 방식이 얼마나 성찰적인가를 보여줬다. 언론은 철거에 집중했고 유족들의 정신은 이미 한 걸음 더 앞선 곳을 디디고 있었다.

광화문광장은 촛불항쟁의 발원지고 천막이 있던 자리는 세월호 참사 직후 단식농성을 시작한 곳이다. 광장 그 자리가 유족에게 필요한 이유가 광장 한복판에 저만큼의 바닥이 필요해서였겠는가, 저 공간에 대한 욕심이었겠는가. 세월호 참사가 야기한 가장 고통스러운 마음의 상처는 부모가 아이를 잃은 상황 그 자체에 있다.1

내 아이가 산 밑에 깔려 있다면 그 산 치워 보겠다는 노력이 상상이나 될 텐데, 아이가 바닷속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참혹한 무기력감,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손발을 자르고 싶었던 고통을 잊지 못한다고 단원고 학생 아버지가 얘기했다. 그 앞에서 나는 건축가로서 새로운 기억공간을 만들 것이고, 유족들 모시고 추모공간 답사를 준비한다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 어찌나 속물 같은 비당사자의 위로였는지 그 부끄러움을 잊지 못한다.

61개 기술과 마음 모아 지킨 자리

원인조차 모르는 참척의 슬픔을 호소하는 중에도 유족들은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참사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고 시민사회와 연대했다. 천막은 얇고 연약한 거처였지만, 국가가 놓아버린 아이들의 부모가 와서 실컷 통곡하도록 했고 국가를 잃은 시민이 모여들도록 했다. 광화문 근처에만 가도 세월호의 비극이 처참히 환기되는데 유가족은 천막이 있던 자리의 무엇이 지켜지기를 통렬히 바랄까.

‘기억과 빛’은 천막의 절반 규모로 축소됐지만, 시민들과 함께 이용하는 공간 조성 목표에 맞았고 유가족이 동의했다. 이는 2019년 3월6일 서울시 열린광장심의위원회에서 원안 승인돼 가설건축물 축조신고를 거쳐 3월19일 착공, 4월12일 개관했다.

심의시 결정된 주요 내용은 ‘첫째, 시가 전담직원을 지정해 직접 운영하되 유가족 및 시민 자원봉사자의 참여로 시민과 함께하는 전시공간으로 운영할 것’과 ‘둘째, 광화문 재구조화 사업 일정을 고려해 운영하되 이후 유가족과 지속적으로 협의해나갈 것’이었다.

기억공간 설계·공사에는 61명이 참여했고, 각자 동원할 수 있는 기술과 마음을 모았다. 61명 중에는 참사 직후 단원고 교문 앞 등굣길 의자 만드는 일을 할 때 만난 목수도 있었다. 이번에 그는 동생 목수와 아들 목수를 불러와 함께 일했다. 방수, 도장, 잡철 등 각 분야에서 소문난 기술자들도 광화문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홀린 듯 고통을 나누는 일에 나섰고, 이는 우리 자신이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토록 많은 목수, 봉사자들이 기억공간 이것 하나 짓는다고 이 비극이 덜한 비극이 되겠냐를 자문하며 가슴 치며 자리를 지켰다. 혈세 낭비라고 고함 지르던 유튜버들의 훼방으로부터 24시간 교대로 공사현장을 지켜준 의경들은 아마 단원고 학생들 또래였을 것이다.

열린 기억공간은 엄숙한 추모를 강요하지 않고 시민들을 환대했다. 제도적, 사회적 약자에게 곁을 내주고 같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유대감과 생명안전의 가치를 나눴다. 진실마중대에는 어린 학생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고, 노란 리본 만들기도 지속됐다. 이운식 뒤 시청 서고에 보관되던 사진들은 세월호 어머니들의 꽃누르미(압화) 작품이 돼 다시 광화문광장으로 돌아왔다. 재구조화 공사가 시작되던 2020년 11월, 기억공간은 차로에 자리를 내주고 180도 회전해 광장 서쪽 편으로 옮겨졌다. 일자형 공간이 광장과 마주하도록 만들어진 덕에 필요시 방향을 바꿔도 어색하지 않아 다행스러웠고, 낡은 부재만 부분적으로 교체한다면 다시 위치를 바꾸는 것도 가능한 구조적 적응력을 확인했다.

기억공간이 광화문광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촛불항쟁의 발원지였다는 사실이 기억의 수준을 넘어 당위의 수준으로 시민에게 인식된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고 국가의 존재 이유를 성찰하는 찰나를 부여하는 추모의 일상성이 실천된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쉬고 있는 기억공간이 공사 펜스에 부대끼며 방치와 멸실의 명분만 강화되는 상황으로 몰리는 중에 2021년 7월5일 철거를 통보받았다. 광장에 행사용 조형물 하나를 놓더라도 조직적 성의를 보이던 서울시는 왜 위태롭게 고립된 세월호 기억공간에 철거를 통보하기 전 그 쉬운 예의를 갖추는 일조차 이젠 힘들어졌는가.

그건 국가 책무의 존치

바닷속 아들에 대한 상상을 번번이 멈추지 않고는 숨 쉴 수 없었다던 아버지에게 기억공간은 국가의 마지막 기표다. 기억공간 존치는 공간의 존치가 아니라 국가 책무의 존치다. 침몰 이유를 아직 모르는데, 당신들은 지금 무엇이 간절한가.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달라.

이민아 건축사사무소 협동원 대표

1. 김홍중, ‘마음의 부서짐’, <사회학적 파상력>, 2016
복도훈, ‘애도와 인륜성’, <말과 활> 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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