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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법 밖으로 몰아낸 재판부

2015년 한·일 합의는 ‘권리구제 수단’으로,
인간 존엄성 회복 위한 재판청구권은 ‘사익’으로 판단
등록 2021-05-01 22:54 수정 2021-05-02 10:21
2021년 4월27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정의기억연대와 여성·인권·평화·종교 등 130여 개 단체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 소송 각하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가운데, 한 참가자가 재판부를 비난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2021년 4월27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정의기억연대와 여성·인권·평화·종교 등 130여 개 단체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 소송 각하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가운데, 한 참가자가 재판부를 비난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법원이 엇갈린 판결을 내놨다. 2021년 1월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정곤)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으나, 4월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재판장 민성철)는 ‘각하’ 판결했다. 2015년 한·일 합의로 일본 정부가 10억엔을 출연해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하고 일부 피해자에게 현금을 지급했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다른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 국내 법원이 재판권을 갖지 않는다는 ‘국가면제’ 이론도 근거로 들었다. 반면 1월 판결에선 반인권적 범죄행위에는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피해자를 대리한 이상희 변호사가 4월21일 판결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글을 썼다. _편집자

2021년 4월21일 오전 10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1심 판결이 예정된 서울중앙지법 558호 법정.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용수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 계셨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의 민성철 재판장은 한 손에 텀블러, 다른 한 손에는 판결문을 들고 법정에 들어와서 원고 당사자를 ‘호명’하는 과정도 없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대한민국 법정에서 재판장 입을 통해 자신의 명예와 존엄에 대해, 인권 회복 선언을 직접 듣기 위해 두 손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휠체어에 앉아 있는 93살 피해자에게 재판장은 끝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단호한 말투로 “2015년 한·일 합의는 대체적 권리 수단이다” “원고들이 강제집행 시기와 범위를 정할 것인데 그러면 외교관계에 충돌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 말들은 ‘각하’ 판결 선고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판결을 읽는 동안 그의 입에서 ‘피해자 인권’이란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판결이 선고되는 중간에 나는 이용수 할머니를 모시고 법정을 나왔다. 피해자들이 ‘법 테두리 밖의 사람’으로 선언되는 그 자리에 차마 할머니에게 끝까지 계시라고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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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국가주의

재판부는 80쪽이나 되는 판결문에서 피해자들의 재판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를 제시했다. 법리적으로 국가면제 이론을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실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2015년 한·일 합의가 그 이유였다. 그러한 판단의 바탕에 개인 인권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하는, 철저한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고 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번 판결에 대해, 나는 피해자를 대리한 변호사로서 다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첫째,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피해자의 인권은 무엇인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지난 30년간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우리에게 지속해서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사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는 전쟁범죄나 공권력을 통해 중대한 인권침해를 저지른 가해국의 책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피해자들은 과거에 무자비하게 그리고 지속해서 침해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신체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을 요구했다. 진실을 알 권리, 배상받을 권리, 실효적 구제를 받을 권리는 유엔도 인정하는 공권력 피해자의 기본 권리다. 이 권리는 상호보완 관계에 있으므로, 어느 하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는 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실의 인정이 없는 배상이나 사죄는 없고, 사죄 없는 사실의 인정이나 배상도 없다.

피해자들이 2015년 한·일 합의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일본 정부가 끝내 ‘위안부’ 피해 사실과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참의원에서 2015년 한·일 합의가 전쟁범죄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고 했고, 기시다 후미오 당시 외무상도 ‘성노예’는 사실에 반하고 강제연행은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2016년 2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증거가 없고 ‘위안부’는 조작됐으며 ‘위안부’가 성노예라는 것도 잘못된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원고 대리인 이상희 변호사가 소송 각하 판결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원고 대리인 이상희 변호사가 소송 각하 판결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인권침해 여부는 판단하지 않겠다”

2019년 헌법재판소는 △2015년 한·일 합의에 피해의 원인이나 국제법 위반에 관한 국가 책임이 명시되지 않은 점, △일본 정부가 합의 이후에도 계속 ‘법적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인 점을 지적하면서, 2015년 한·일 합의가 피해 회복을 위한 법적 조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번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는 2015년 한·일 합의를 ‘대체적 권리구제 수단’으로 보고 인간 존엄을 회복하려는 피해자들의 구제 수단을 원천봉쇄해버렸다. 게다가 재판부는 일부 생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화해·치유재단에서 현금을 지원받은 사실을 지적하며 2015년 한·일 합의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의사에 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비겁하게도 현금 지원을 받은 피해자들을 탓했다.

또한 재판부는 일본이 피고가 될 수 있는지가 선행 판단의 문제이므로 인권침해 여부는 판단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피해자들의 재판청구권을 ‘사익’으로 보고, 공익을 위해 사익의 제약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피해자들이 갖는 재판청구권의 무게와 내용을 가늠하려면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일본 국가의 책임과 피해자들의 권리를 깊이 있게 심리해야 하는데, 재판부는 ‘사익’이란 두 글자로 이 모든 의미를 축소해버렸다.

둘째, 국제질서 속에 인권의 자리는 어디인가?

피해자 인권은 국제질서 속에 침해되거나 뒷전으로 밀렸다. 일제강점기 체제에선 일본 제국의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돼 성적 학대를 당했고, 1965년에는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에서 피해구제도 받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눈치만 보다가 2005년에야 ‘위안부’ 문제를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고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발표했다.

피해자들은 국제질서라는 미명하에 잔인하게 자행된 인권침해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존중받고 ‘인권’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다. 국제사회도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인권 질서로 발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유엔은 국제인권조약을 제정해 주권 행사와 긴장관계에 있는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많은 국가와 지역 인권법원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다른 국가에 책임을 묻는 판결을 선고하거나 국가면제 이론에 도전하는 판결을 했다.

이번 재판에서 변호사들은 7차에 걸친 변론에서 “국제인권조약에 따라 피해자들이 권리 실현을 할 수 있도록 재판청구권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재판부는 국제인권조약에 대해서도 어떠한 판단을 하지 않았다. 판결문 곳곳에서 재판부는 대한민국도 국제질서를 존중해 항구적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 국제질서 안에 인류가 피땀 흘려 어렵게 쟁취한 국제인권조약이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게다가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승소하면 일본 정부와의 외교관계에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고 정부가 이에 관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헌법이 정한 국제 평화주의와 국제법 존중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봤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일본 기업에 대한 강제집행 절차를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교관계 충돌 문제는 법원이 걱정할 일이 아니고 정부(외교부)가 해야 할 외교 영역이다. 법원이 외교관계 충돌을 걱정해서 국민의 인권을 내팽개친다면, 국민 기본권은 어디에서 보호한다는 말인가. 지금이 ‘절대적 면제론’이 대세이던 1800년대도 아닌데 말이다. 이번 판결이 국가 중심 국제질서를 우위에 두고 판결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반인도주의 범죄엔 국가면제 인정 안 돼

이미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싱가포르 등은 입법을 통해 법정지국 영토(법정이 있는 국가)에서 발생한 사망, 상해, 재산상 손해의 책임을 묻는 소송에서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피고가 외국이라 하더라도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유엔 국가면제협약이나 유럽연합(EU) 국가면제협약도 유사한 규정을 두고 있다. 미국은 더 나아가 1996년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납치·고문·테러 등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설사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테러지원국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했다.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면제의 예외가 확대되고 있으며, 기존 국가면제 이론이 발전 진화하고 있다.

그런데 재판부는 193개 유엔 회원국 중 19.2%만이 영토 내에서 발생한 불법행위에 관해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국가면제를 둘러싼 국제관습법은 변화하거나 발전하지 않았다고 봤다. 국제관습법은 단순히 숫자로 계산해서 답이 나오는 산술의 문제도 아니고 만고불변의 원칙도 아니다. 국제관습법도 변하는 것이고 변화는 그 포문을 열어젖히는 한 국가의 실행에서 시작된다. 재판부는 이 점을 간과했다. 재판부는 국가면제를 인정한 사례를 나열했지만, 변호사들은 그 반대로 반인도적 범죄에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들을 제시했다.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면제를 배제해야 한다는 국제관습법도 없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국가면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국제관습법도 없다. 재판부가 좀더 정교하게 피해자 인권을 살펴보고 국제인권조약에 따라 실효적인 권리보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도, 강제집행에 따른 외교관계 충돌을 우려해 피해자 인권을 살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보편적 인권 향해, 다시 시작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은 ‘위안부’ 문제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권에 관한 문제다. 2021년 1월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정곤)는 고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법원은 전통적 국제법 질서에서는 보편적 인권 가치가 국익 앞에서 밀렸지만 더 이상 반인도적 범죄나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서 국익을 이유로 인권을 희생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9개국 법률가 410명이 이 판결을 지지하는 성명도 발표했다. 많은 나라에서 국가면제 이론에 도전하며 자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의 판결은 이런 국제인권의 도도한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4월21일 ‘각하’ 판결 선고 뒤 유족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어머니 유언이 일본의 사죄를 받는 것이었다”며 “조금만 더 애써달라”고 말했다. 다시 시작한다. 피해자들이 인류에게 남긴 소중한 자산을 위하여!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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