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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유급병가제도 1년…아프면 쉬는게 당연했다면

서울시, 사회적 첫 유급병가제 1년째 운영… 21대 국회에서 법 발의돼
등록 2020-06-27 16:13 수정 2020-07-02 10:07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오른쪽 둘째)과 시민·노동단체가 5월12일 국회에서 상병수당과 유급병가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오른쪽 둘째)과 시민·노동단체가 5월12일 국회에서 상병수당과 유급병가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9년의 크리스마스. 김병수(45·가명)씨는 동네에서 ‘무차별’ 공격을 당했다. 길을 가던 한 남성이 시비를 걸며 김씨의 머리와 팔을 둔기로 수차례 내리쳤다.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남성을 제압한 뒤, 김씨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전치 4주의 부상이었다.

극심한 통증과 정신적 충격이 조금씩 잦아들 때쯤, 경제적 압박감이 커졌다. 그는 인테리어 가게를 혼자 운영하는 자영업자였다. 주 6일 도배, 미장, 목공 일을 해도 매출은 한 달 600만원 남짓. 가게와 집의 월세, 공과금, 생활비, 대출이자를 가까스로 맞췄다. 쉬면 한 달 수입은 ‘0’이었다. 한 달에 600만원의 손해가 나는 것이다.

입원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더 쉬라”고 했지만 김씨는 가게를 열었다. 병원비 200만원은 실손보험으로 그럭저럭 감당했으나, 줄어든 소득을 메워야 했다. 충분히 몸이 회복되지 않아 “가끔 어지럽고 손아귀에 힘이 없어 장비를 자꾸 놓쳐”도 일을 나갔다. 게다가 한 달간 영업을 못하고 코로나19까지 겹쳐 일감이 70~80%나 줄었다.

“국가 보살핌 받았다는 생각”

생활비가 바닥을 보일 때, 온라인 검색으로 ‘서울형 유급병가제도’를 알았다. 서울에 사는 일용직·특수고용직·자영업자 등이 업무 외 질병이나 부상으로 입원, 건강검진을 받으면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할 수 있도록 생활임금(1일 8만4180원)을 최대 11일간 지급하는 제도라고 했다. “혹시나 싶어” 지원했더니 2월 말 84만1800원이 입금됐다. “처음 경험한 복지 혜택”이었다.

돈은 생활비로 금세 사라졌지만 가족은 오랜만에 웃었다. “실질적으로 돈이 큰 도움은 안 됐을지 몰라도, 큰 사고를 당해 황망할 때 국가가 케어(보살핌)를 해준다는 자체”만으로도 가족에게 “위로와 안정감”을 줬다. “입원할 때 (제도를) 알았다면 조금은 더 마음이 편했으리라”고 그는 생각한다.

서울형 유급병가제도가 도입된 지 1년. 2019년 6월~2020년 5월 김씨처럼 입원하거나 건강검진을 받고서 생활임금을 지원받은 시민은 5933명. 신청자(8310명)의 71.4%다. 1인당 평균 43만2천원을 지원받아 총 25억6천만원의 예산이 들어갔다.

이 제도는 업무와 관련 없는 질병이나 부상으로 아픈 노동자의 소득을 보장하는 첫 “사회적 유급병가제도”(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직업환경의학 전문의)라고 한다. 유급병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대개 “고용주가 아픈 노동자에게 (휴식 기간과 소득을) 주는”(김수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 제도로 풀이된다. 법적으로 고용주가 없는 특수고용직이나 자영업자는 이런 복지 헤택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아프면 일자리를 잃거나 일터에 남더라도 소득 감소를 감수해야 한다. ‘아프다 가난해지는’ 빈곤의 경로를 끊으려 “서울시가 고용주와 같은 역할을 하겠다”(김수진 부연구위원)며 내놓은 사회안전망이 서울형 유급병가제도다.

물론 고용주가 있는 직장인이라고 모두 유급병가를 보장받지는 못한다. 유급병가가 있는 기업은 2018년 기준 전체 7.3%에 그친다.(제1261호 표지이야기 ‘7.3%만 유급병가 보장한다’ 참조) 근로기준법에 ‘유급병가’는 물론 ‘병가’라는 단어도 나오지 않는 한국에서 업무와 유급병가를 법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자는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원뿐이다.

감염병 확산 땐 방역 대책의 의미

‘아파서 쉴 권리’가 생긴 노동 취약계층의 만족도는 높았다. 2019년 유급병가비 신청자 100명을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이 설문조사한 결과, 지원 대상 선정 여부와 상관없이 응답자의 76%는 “이 제도가 생계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했고, 80%는 “지원액이 충분하다”고 했다.(‘서울형 유급병가 기술지원 및 효과 평가 연구’ 보고서) 한계는 있다. 공공보건의료재단은 소득 기준(현재 대상 중위소득 100% 이하)과 재산 기준(2억5천만원 이하)이 엄격하고, 중복 수혜가 허용(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등 제외)되지 않으며, 저소득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지역가입자)를 제외한 현재 제도가 재설계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울형 유급병가나 외국의 상병수당(사회보험 등을 통해 업무 외 질병과 부상으로 아픈 노동자에게 주는 현금성 급여)처럼 아픈 노동자에게 소득 상실분을 보전해주는 ‘공적 상병소득보장제도’는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고 사회 불평등을 완화하는 사회보장제도다. 여기에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이 퍼질 때는 중요한 “방역 대책으로서 의미”(이상윤 대표)도 가질 수 있다.

‘아프면 쉰다’는 제도와 문화가 정착됐다면 코로나19의 전염 양상이 조금은 달랐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A(H1N1)가 유행할 때도 유급병가가 있는 독일과 달리 유급병가가 없는 미국에선 아픈 노동자들이 무리하게 일터로 나와 700만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해석이 많았다고 한다.

‘K방역’의 선전으로 폭발적인 코로나19 감염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상병소득보장제도 부재만 놓고 보면 한국은 독일보다 미국에 가깝다. 쿠팡 물류센터와 서울 구로 콜센터 등 일터에서 집단감염이 나왔을 때 “아파도 일했다” “의심 증상이 있어도 출근했다”는 노동자들의 증언이 줄을 이었다. 불안정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에게는 ‘아프면 집에서 3~4일 쉬기’라는 방역 수칙을 지키는 일보다, 해고와 소득 상실의 위험을 피하는 일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현행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은 코로나19로 확진받거나 자가 격리된 노동자에게 유급병가를 주고 있으나, 발열과 콧물 같은 의심 증상이 있는 노동자에겐 ‘회사에 안 갈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OECD 중 유일하게 유급병가·상병수당 없어

코로나19 확산 이후 스웨덴과 덴마크 등 복지국가들은 원래 있던 상병수당이나 유급병가의 지급 대상과 기간을 늘리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상병수당과 유급병가가 모두 없는 한국에서도 제도화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 김강립 보건복지부 차관은 5월20일 “생활 속 거리 두기 수칙 가운데 가장 지키기 힘든 것이 ‘아프면 3∼4일 쉬기’다. 상병수당을 논의할 좋은 기회가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21대 국회에서도 ‘아프면 쉴 수 있는 법’이 이미 발의됐다. 지금도 국민건강보험법 시행령 개정으로 상병수당을 지급할 수 있으나 법적 근거를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과 노동자의 유급병가를 법제화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사회보장위원회 관계자는 “(상병소득보장제도에 대해) 이제 탐색 수준이라 (관계 부처에서도) 아직 구체적인 검토가 시작되지 않은 거로 안다”면서도 “최근 국회에서 이뤄지는 논의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고 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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