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제공합니다!’(행정안전부 누리집)
분명 정부는 ‘모든 국민’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자녀 1명과 함께 사는 김지숙(42·가명)씨는 5월21일까지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조차 못했다. 대한민국 모든 개인이 아닌, 정부가 분류한 전체 ‘가구’를 대상으로 지원금을 지급하면서 김씨 같은 개인이 소외되고 있다.
세대주이지만 ‘신청 대상’ 아닌 이유
이혼 소송 중인 김씨는 지난해부터 남편과 헤어져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주민등록상 2인 가구이므로, 긴급재난지원금 60만원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5월14일 온라인 신청 페이지에 들어가 본인 정보를 입력해보니 ‘신청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은 ‘가구’이다.
정부는 가구를 구분 짓기 위해 세대별 주민등록표와 국민건강보험 직장가입자·피부양자 정보를 종합하고 있다. 직장가입자가 부양하는 사람, 즉 피부양자로 건강보험에 등록된 배우자·자녀는 가입자와 다른 주소지에서 살더라도 하나의 경제공동체인 ‘가구’를 구성한다고 본다. 법적으로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김씨와 자녀는 직장가입자(김씨 남편) 피부양자로 건강보험에 등록돼 있다. 이에 따라 3인 가구 구성원으로 분류됐다.
그런데 김씨와 자녀에겐 지원금 신청 권한이 없다. 정부는 행정 효율을 이유로 가구를 대표하는 세대주가 신청하도록 정했다. 가구원은 세대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야만 신청이 가능하다. 이러한 원칙에 대해 ‘불합리하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가해 행위를 한 세대주를 피해 다른 거주지에서 사는 가정폭력·성폭력·아동학대 피해자나 법적 분쟁이나 불화가 심각한 가구 구성원은 지원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대주로 등록된 부모나 배우자, 자녀로부터 지원금을 받지 못해 속앓이한다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혼 소송 중인 오지은(30·가명)씨가 그렇다. 주민등록상 2인 가구 공동세대주로 돼 있는 그의 배우자가 지원금을 먼저 신청해 지급받은 사실을 오씨는 뒤늦게 알게 됐다. “지금 상황에서 지원금 절반을 달라고 하기가 모호해, 이혼 절차를 마무리하면서 변호사를 통해 따로 지급을 요청할 생각이에요.”
이혼 소송 중인 남편이 형의 주소지에 등록돼서…
5월15일 김씨는 거주 지역 주민센터를 찾아 이혼 소송 중인 사정을 털어놓았다. 담당 공무원은 가구 분류에 대한 이의신청을 통해 그와 자녀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5월8일 행안부는 이의신청 기준을 마련해 세대주가 행방 불명, 실종되거나 국외에 있다면 가구원이 신청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가정폭력·성폭력·아동학대 피해자의 경우 별도 가구로 인정하겠다고도 했다. 김씨의 남편은 현재 국외에 체류 중이다. 자신이 세대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등본을 비롯해 이혼 소송 중에 자녀를 양육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서류 등을 마련해 주민센터에 제출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왔다.
“제가 아닌 (배우자) 형님이 가구 분류에 대해 이의신청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주민센터에선 그분 연락처를 모른다며, 제게 연락처를 물어보더라고요. 저도 연락처를 몰라요. 수년 동안 보지 않은, 헤어져 사는 배우자 친형에게 왜 저희 지원금의 신청 권한이 있는 건지….”
<한겨레21>은 김씨 배우자의 거주 지역 주민센터에 상황 설명을 요청했다. 주민등록상 남편은 친형과 함께 사는 것으로 돼 있고, 그쪽 세대주는 형이다. 세대원인 동생(김씨 배우자)은 건강보험상 배우자와 자녀를 부양하는 것으로 돼 있다. 세대주(형) 밑에 3명의 세대원(동생 가족)이 쪼르르 달린 4인 가구로 분류됐다는 것이다. 국외에서 1개월 이상 장기 체류하는 경우엔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 이 조건에 따라 김씨 배우자를 뺀 나머지 3명을 가구로 묶어 80만원 지급이 결정됐다. 이의신청도 수년간 보지 못한 ‘아주버님’만 할 수 있으며, 그로부터 위임을 받아야만 김씨가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방무 행안부 재정정책과장은 “이 경우도 보완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정부가 마련한 기준엔 해법이 담겨 있지 않다. 김씨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조성된 재정에서 긴급한 상황이라는 전제로 지원금을 분배하는데, 저는 그 분배에서 제외됐네요. 대신 누군가 저와 제 아이 몫을 취하는 것이 사회적 형평성에 맞는지. 지원금 수령 여부를 떠나 이의제기권조차 없다는 게 화가 납니다.”
행정 효율성 이유로 가구 단위 복지 시스템
익명을 요청한 서울시 사회복지공무원은 ‘개인별’로 지원금을 지급하지 않는 한 이러한 사각지대는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등록상 자녀와 함께 살고 건강보험도 피부양자로 등록돼 있지만, 사실은 혼자 살고 있는데 지원금을 왜 받을 수 없냐고 묻는 어르신들도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당·정·청이 소득 하위 70%에서 100% 가구로 지급 대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지원 방식은 세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사회보장의 일차적 책임을 가족에게 전가하고 가구 단위로 ‘선별적 지원’을 해온데다, 행정 효율성 등을 이유로 세대주에게 복지 급여 신청 권한을 과하게 부여해온 관행이 뿌리 깊기 때문이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광역지자체 공무원은 “가구 분류와 관련해 하루 1500통의 민원전화를 받고 있다”며 정부가 지급 방식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다”고 성토했다.
주민등록법에 따르면 세대주가 되는 데 특별한 자격 조건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성 세대주가 다수다. 통계청이 발간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8>을 보면, 주민등록상 세대주이면서 생계 책임을 진 여성 가구주 비중은 27.9%(2015년)이다. 2015년 여성가족부는 성별영향분석평가(주요 정책 수립과 시행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의 사회·경제적 격차 평가)에서 “주택 공급, 조세지원, 복지급여 전달 등이 세대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생계를 책임지는 세대주인 남성과 배우자인 전업주부, 그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가족을 통상의 1세대로 가정하기 때문”이라며 “맞벌이가 늘면서 세대 구성원이 경제적 부담을 나누고 재산권 형성에 기여하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지만, 세대주 관련법은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고 분석했다.
개인의 보편적 권리 보장을 위해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논란을 계기로, 시민 개인의 보편적 권리 보장을 위해 가구 단위에서 개인 단위로 복지 제도 틀을 바꾸어야 한다는 지적이 거듭 나온다. 특히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제정됐지만, 부양의무자 기준에 따라 수급 기준에 부합할 정도로 가난하더라도 일정 이상의 소득·재산을 가진 부모나 자녀가 있으면 생계급여와 의료급여를 받을 수 없게 돼 있다.
이승윤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가난한 가족에게도 부양의무를 지우는 건 가부장이 돈을 벌어오면 가구 내 낙수효과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전통적 사회보장 제도를 근간으로 한 것”이라며 “최저생계 보장 등 개인에게 부여된 기본적 권리 실현을 위해선 가구 단위가 아닌 개인 기반의 복지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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