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에 닥친 위기는 그 사회의 모순과 시스템의 구멍을 그대로 드러낸다. 메르스가 그랬다. 메르스는 중동에서 처음 출현했음에도 한국은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환자가 생겼다. 정부의 초기 대응 실패와 컨트롤타워 부재, 방역 인력 부족 등이 원인으로 꼽혔다. 이런 실패를 교훈 삼아 방역 시스템을 정비했다. 그 결과 현재 한국은 코로나19 방역 모범국가로 발돋움했다.
취업자 68만 명↓ 실업급여 신청자 15만6천 명↑
노동시장 정책은 어떨까. 통계청이 발표한 ‘3월 고용동향’에서 취업자 수는 2019년 같은 달에 견줘 19만5천 명이 줄어든 2660만9천 명을 기록했다. 2009년 5월 이후 가장 큰 폭의 감소다. 계절조정(경기 요인에 따른 고용지표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계절 요인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 3월 취업자 수는 2월보다 무려 68만 명이 줄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가 노동시장에 곧바로 타격을 준 것이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겐 생계 대책이 필요하다. 3월 실업급여를 새로 신청한 이는 2019년 같은 달보다 3만1천 명(24.8%) 늘어난 15만6천 명.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취업자 수는 전달보다 68만 명 줄었는데, 실업급여를 신청한 이는 15만6천 명뿐이다. 이는 고용보험이라는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드러낸다.
사실 고용보험은 경제위기 속에 자라났다. 1995년 처음 시행된 고용보험은 1997년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1년에 100만 명 남짓 실직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노동시장 안정화에 기여했다. 당시 정부는 사회 합의 등을 바탕으로 실업급여 적용 대상자를 확대하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안전망 안에 포섭하려고 노력했다. 시행 당시 30명 이상 사업장 노동자에게 적용됐던 실업급여를 1998년 1월 10명 이상으로 확대하고, 3월에는 5명 이상, 10월에는 1명 이상 사업장으로 점차 넓혔다. 경제위기가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20년 남짓 지나면서 고용보험 가입 대상은 더 넓어져, 2018년엔 15시간 미만 초단시간노동자도 가입 대상이 됐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급증한 고용형태인 특수고용노동자는 고용보험 가입 대상에서 제외됐다. 사업주들이 노동계약을 회피할 목적으로 또는 사업에 필요한 자산(차량·작업도구 등) 투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동계약 대신 용역·위탁 계약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특수고용노동자는 한 사업주에 전속돼 노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보수를 받지만, 대부분 노동법 보호에서 배제된다. 노동계약을 맺지 않아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특수고용 형태는 골프장 캐디, 대리운전 기사, 학습지 교사 등 몇 개 업종에 그치지 않고 최근 다른 업종에까지 퍼지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은 그 규모를 2018년 10월 기준 221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전체 취업자의 8.2%에 달하는 수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20년 넘게 특수고용노동자의 안전망 개선을 방치해왔다. 최근엔 정보통신기술(ICT) 플랫폼으로 노무를 제공하는 디지털 특수고용노동자, 즉 플랫폼노동자 역시 늘어나 사회안전망이 더욱 필요한 상황인데도 말이다. 외국에서 플랫폼노동자가 2008년 금융위기와 맞물려 늘어났던 것처럼, 코로나19 사태가 계속되면 원래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사람이 많아지고 플랫폼노동자도 늘어날 것이다. 대책이 시급한 이유다.
지역고용대응 지원금 2천억원에 불과
벼랑 끝에 서 있던 특수고용노동자가 코로나19발 고용위기 직격탄을 맞아 순식간에 무너진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부산에서 2009년부터 초등학교 방과후 컴퓨터 강사로 일하던 유아무개(47)씨는 쿠팡플렉스, 배달대행, 선거 사무보조 등을 넘나들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 뒤 초등학교와 1년 단위로 계약해 학생들에게 컴퓨터자격증 과정 등을 가르쳤다. 학생들이 낸 수업료에서 학교가 가져가는 수용비와 세금을 제하고 월 170만원을 벌었다. 이 돈으로 유치원에 다니는 딸과 단둘이 생활했다. 그러나 2월 넷째 주부터 방과후 수업이 중단되면서, 2월 3주치 수업료 130만원이 마지막 수입이었다. 유씨는 “대출이자에 생활비 등을 더하면 숨만 쉬고 있어도 150만원이 나간다. 한 달 10만원 붓던 적금도 깼는데 앞길이 막막하다”고 했다.
대구에서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는 황창현(54)씨도 마찬가지다. “최근 절반 수준까지는 회복된 것 같은데, 2월 말부터 대구는 한동안 유령도시였어요. 길거리에 사람이 없고 점포들 불 다 꺼지고, 얘기하기 싫을 정도로 참담했어요. 보통 저녁 8시에 출근해 하루 10만원 매출이 발생하면 ‘양호’했는데, 하루 2만~3만원밖에 못 버는 날이 한 달 넘게 계속됐죠.” 50대 이상 중년 남성, 1인 가구 홑벌이가 많은 대리운전 기사의 특성상 생계 위기 역시 심각하다. “현금이 안 들어오니, 전달 카드값도 못 내고 돈 빌리러 다니는 동료가 많아요.”
정부는 특수고용노동자 생계지원 대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3월31일 고용노동부는 ‘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사업’ 계획을 발표해, 특수고용노동자·프리랜서, 영세자영업자·무급휴직자 등에게 2개월까지 월 50만원을 주기로 했다. 이에 책정된 예산이 2천억원에 불과했다. 4월22일엔 ‘긴급고용안정지원금’으로 1조5천억원을 추가 투입해 50만원씩 3개월 지급하기로 했다. 이 역시 부족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가 지원 대상자를 93만 명으로 추정했는데, 여기엔 특수고용노동자·프리랜서·영세자영업자·무급휴직자 모두 포함된다. 특수고용노동자만 221만 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다.
한정된 예산을 나눠야 하기에 지원 대상을 선별하는 과정도 험난하다. 4월 초부터 지방자치단체별로 신청받는 ‘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사업’은 대구·경북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지자체가 건강보험료 납부 실적을 기준으로 중위소득 100%, 70% 등에 맞춰 지원 대상을 선별할 계획이다. 이 기준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인천에서 방과후 강사를 하는 최아무개씨는 “학기 중에 170만원 정도를 받았는데 월 건강보험료 몇천원 차이로 지원 대상이 안 돼 신청도 못했다”며 속상해했다. 경기도에서 일하는 오수영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3월 수입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음에도 현재 내는 건강보험료가 2018년 기준으로 이뤄졌기에 지원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정부가 임금노동자에게는 휴업수당의 90%까지 고용유지지원금으로 주고 지급 때 노동자의 소득수준을 따지지 않는데, 특수고용노동자의 경우 엄격하게 선별한다”고 했다.
“임시변통 프로그램뿐… 법 개정 서둘렀다면”
전문가들은 2018년 11월 고용보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한다. 이 법안은 특수고용노동자와 플랫폼노동자에게도 고용보험을 적용하는 내용을 담았는데, 2018년 8월 고용부 고용보험위원회 의결 내용을 반영해 발의됐다. 2년 동안 12개월 이상 고용보험료를 낸 사람이 계약이 해지되거나 ‘일정 수준 이상’ 소득이 줄어든 경우 실업급여를 받도록 했다.
해당 법안을 논의할 때 사용자(기업) 쪽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이직하기 때문에 보험료만 납부하고 혜택은 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 “소득 감소를 제대로 입증하지 못할 것”이라는 논리로 반대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순식간에 소득이 줄어 실질적인 실업 상태에 놓인 것을 보면, 당시의 반대 논리가 옳지 않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정부는 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사업에서 소득 감소 정도에 따라 지원금을 차등 적용했는데, 이 기준을 고용보험 실업급여 지급 과정에도 적용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코로나19 대응 고용지원정책의 현황과 개선과제’ 보고서에서 “정부가 (코로나19 고용위기 대응책으로) 발표한 대책들은 현행 제도가 미비하기 때문에 임시변통으로 마련된 것이어서 급하게 마련한 프로그램성 정책이 갖는 한계를 모두 갖고 있다. 이 정책의 제도화를 위해 준비된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인데, 조금만 서둘렀다면 이번 위기를 넘기는 데 큰 힘이 됐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쉽기 짝이 없다”고 밝혔다.
고용보험 적용 대상이지만 사실상 사각지대에 놓인 고용보험 미가입 노동자에 대한 대책 역시 추가돼야 할 것이다. 3월 고용동향에서 임시·일용직 노동자는 2019년 3월보다 각각 42만 명, 17만3천 명 줄었다. 주 1~17시간 노동 취업자 역시 19만6천 명이 빠졌다. 그런데 2019년 8월 기준, 일일 노동자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5.7%, 초단시간노동자(주 15시간 미만)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2.3%에 그친다. 초단시간노동자는 대부분 보건사회서비스업(28.5%), 숙박·음식점업(17.3%), 교육서비스업(13.8%)에 분포해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적 타격이 심각할 것으로 추정된다.
가입률 획기적으로 개선할 방법은
정흥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임금노동자의 경우 고용보험 적용 대상은 굉장히 넓어졌지만, 가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용자도 모르고 노동자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정부가 가입 홍보를 포함해 적극적인 노동행정을 펴지 않는 게 아쉽다. 일단 고용보험 미가입 노동자 가운데 소득 단절을 겪는 사례를 파악해 일시 지원책을 마련하고, 이들의 가입률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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