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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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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의 품격] 초짜 편집장의 서툴지만 뜨거웠던, 인사의 밀당

첫 인사에서 좌충우돌한 정은주 <한겨레21> 새 편집장
이병남 전 LG인화원장에게 ‘인사란 무엇인가’ 묻다
등록 2020-04-13 23:07 수정 2020-05-07 10:50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시작의 순간엔 누구나 서툴다. 정은주 <한겨레21> 신임 편집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짜 편집장의 시작은 하필, 대규모 인사(人事)였다. 10여 명의 소수정예 기자가 만드는 <한겨레21>은 인사철마다 기자 몇 명을 <한겨레> 편집국 기자(200여 명) 중에서 맞바꾼다. 정 편집장을 비롯한 신문의 각 부서장은 직함을 받자마자 치열한 ‘사내 스카우트전’에 돌입했다.

인사는 수많은 직장인에게 상흔을 남긴다. 부서원은 간절히 원하던 자리에 가지 못해, 부서장은 함께 손발을 맞출 인재를 얻지 못해 자존감이 무너진다. 회사라는 조직에서 내 위치를 마주하는 순간, 일의 가치와 의미가 흔들리기도 한다. 아무리 ‘내 월급은 욕먹는 값’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하지만 무엇을, 얼마나 참아내야 하는 걸까. 인사철 회오리에서 버티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좌충우돌 첫 인사를 치러낸 정 편집장이 4월8일 이병남 전 엘지(LG)인화원장(사진 오른쪽)의 서울 종로구 자택을 찾아 조언을 청했다. 이 전 원장은 미국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다 귀국해 1995년부터 2016년 퇴임할 때까지 21년 동안 엘지그룹의 인사와 교육을 총괄해왔다. 그는 회사에서 신념을 갖고 일하는 삶은 종교적 수행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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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되고 난 뒤 바로 인사 업무를 해야 했습니다. 기존 부서원들에게는 어떤 <21>을 만들려는지 비전을 밝히지도 않은 채 밖으로 나돌며 스카우트에 몰두했습니다. 뒤늦게 기존 부서원들이 떠나겠단 뜻을 밝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를 놓칠 뻔한 꼴이었지요.

승진 발령이 나면 대부분의 사람 마음이 급해집니다. 회사가 나를 인정했으니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또 기대 이상으로 해내야 한다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거죠. 변화를 도모해 성과를 내고 싶다보니 자연스럽게 바깥사람들을 보게 되지요. 필요한 일이지만 내부 사람들이 소외를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나 혼자 다 할 수 없고 우리가 함께 해내야 하니 부서원 당신들이 인재를 추천해달라, 나와 여러분이 같이 판단하자’ 이런 방식으로 동행할 수 있으면 제일 좋지요. 그러면 조직이 좀더 탄탄해질 수 있습니다.

또한 각 부서장과 사장이 1년에 두 번 정도는 ‘컨센서스(합의) 미팅’을 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생각으로 조직을 이끌고 싶은지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구체적인 실천 방안에 대해 서로 대화하는 거죠. 일방적 지시가 아니라 서로 기대 사항을 이야기하고 맞추다 보면 나중에 엉뚱한 사고가 벌어지는 일도 줄어듭니다. 사장이 각 부서장에게 ‘내 기대 사항은 무엇인지, 임기 동안 어떻게 회사를 이끌어가고 싶은지’ 이야기해주면 부서장도 자신의 미션(사명)이 무엇인지 좀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고경영자(CEO)들이 그걸 잘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서로 생각하는 것에 틈이 벌어지면 나중에는 불필요한 ‘카더라’ 통신이나 뒷말이 생깁니다.

원하지 않는 자리로 인사가 나면 일 못하는 사람으로 명명된 것 같아 업무 의욕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조직이 내가 원하지 않는 자리로 보내면 ‘인사에서 물먹었다’는 느낌을 당연히 가질 수 있죠. 그러나 일단, 나에 대한 수요가 (보내진 곳에) 있는 것이니 이를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게 현명합니다. 조직에서 내가 원하는 자리(공급)와 나를 필요로 하는 부서(수요)가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는 희귀합니다. 그리고 사실 그건 만들어나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사팀장으로 8년을 지내다 인화원장으로 승진하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룹 전체 인사를 하던 자리에서 왠지 밀려나는 느낌이 들면서 새로운 자리가 썩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또 인사팀장으로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했지요. 승진 기회가 자주 오지 않는다는 설득에 인화원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헛헛한 마음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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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취임 직후 약 두 달간 코칭(코치와 코칭을 받는 사람이 파트너를 이루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과정)을 받다가, 저 스스로 미션(임무)을 찾았습니다. ‘아, 다른 (계열사) 사장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장이 되는 게 내(인화원장) 역할이구나.’ 이렇게 마음을 잡으니 그때부터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게 떠오르더군요.

어느 조직이든 주류 혹은 메인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어떤 소명의식을 갖느냐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새롭게 규정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해나갈 수 있습니다. 변방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다양한 일을 해볼 수 있고 또 다른 기회가 열리기도 하니까요.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가 거듭 거절당하니 마음의 상처가 생기더군요. 직장 상사로 내 자질이 부족한가도 싶고요.
제안할 때 상대방에게 무엇을 기대했고 무슨 일을 요구했는지 다시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어요. 그가 거절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제안자에 대한 개인 선호도 때문만이 아니라, 제안한 자리나 업무의 매력도 자체가 떨어져 거절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내 경우에도 조직 체계를 단순화하는 일을 맡아 열심히 방안을 마련해 인사위원회에 보고했지만 ‘빠꾸’ 당했지요. 한 달이 지나 이리저리 수정해 다시 밀어넣었는데도 수락이 안 됐어요. 결국 상사를 찾아가 ‘내 능력이 부족한 거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사가 ‘아무리 좋은 음식으로 한 상 차려내도 안 먹겠다고 하면 그만이다. 먹는 사람이 맛있는 걸 몰라서 안 먹으면 어떡하겠나 본인 팔자지’라고 하더군요. 잔뜩 위축돼 있었는데 기운이 났습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음식으로 열심히 상을 차렸다 해도 누군가에게 억지로 먹일 순 없는 일이지요. 마음을 비우고 집착하지 않고 담담히 세 번째 보고를 한 끝에 이 프로젝트는 드디어 통과됐습니다. 초조해하지 말고, 무엇보다 자신을 비난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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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종교의 수행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해나가기 위해선, 소명의식과 인욕(忍辱·마음을 가라앉혀 온갖 욕됨과 번뇌를 참고 원한을 일으키지 않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 자존심이 무너지고 억울함이 생겨도 이를 참아내는 것이 인욕인데, 그렇게 하려면 소명의식이라는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려는 소명의식이 없다면 욕됨을 참아낼 이유가 없고, 참아낼 힘도 나지 않으니까요.

인사 과정에서 상사의 뜻에 반하는 배짱을 부리기도 하고 직접 찾아가 제 포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다 끝나고 나니 낯 뜨거움이 밀려오더라고요.
신임 부서장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의욕을 표현했는데 이를 못마땅해한다면 상사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지요. 좋은 상사라면 다독거리며 신임 부서장에게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는 사정을 잘 설명해줘야죠. 다만, 그런 ‘도발’을 자주 해서는 안 됩니다. 상사와의 관계에서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고, 특히 업무 외에 개인적인 취향이나 사소한 사안에 대해 불필요하게 맞서는 건 어리석은 일일뿐더러 불행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인사가 끝난 뒤 어수선해진 조직은 어떻게 추슬러야 할까요.
우선 사업 목표에 대해 합의를 부서원들과 해야겠지요. ‘나는 이런 생각으로 부서장을 맡았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런 대화를 통해 함께 해나가야 할 일을 공유하고 부서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일을 같이 하려는지도 들어야지요. 관건은 부서원들이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가입니다. 부서장은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일에 관해서는 칼 같지만 속마음을 이야기해도 불이익을 주지 않을 사람이라는 신뢰를 주는 게 중요합니다.

부서장도 자기 스스로 단단한 기반을 갖췄는지 되짚어봐야 합니다. 그 기반에서 부서원들이 각자 성장하고 커나갈 수 있도록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을 정리해봐야지요. 실력이나 자존감, 자격을 두루 갖췄다고 해도 완벽하고 완전한 부서장은 없어요. 그런 게 있다고 믿는다면 큰 착각입니다. 부서장과 부서원이 서로 기운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성장하는 것뿐입니다. 부서원 한 사람, 한 사람과 소통하는 관계 속에서 그들도 머리가 시원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부서장 역시 또 다른 차원에서 머리가 시원해지고 가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전 원장은 올해 <한겨레> 토요판에 ‘이병남의 보내지 못한 이메일’이라는 칼럼을 4주에 한 번씩 연재하고 있다. 그러나 일터에서의 경험담을 담은 그의 칼럼을 보고 연락해온 옛 회사 사람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 순간, 그는 옛 상사의 말이 떠올랐다. “회사엔 과거가 없어. 회사의 과거는 학자가 연구하면 되고, 우리에겐 미래를 위한 ‘지금’밖에 없는 거야.”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푸르른 열정을 안고 회사에 발을 디딘 첫날이 있듯, 마음에 차든 차지 않든 지금의 자리에서 떠날 마지막 날이 올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온 그가 정 편집장에게 말했다. “해보세요. 실수하면 다시 또 하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다 성공하겠어요. 나도 얼마나 실패를 많이 했는데요.”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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