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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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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재난이 국가를 소환했다

세계 금융위기 앞에서도 굳건하던 시장·자율 ‘흔들’
등록 2020-04-05 16:58 수정 2020-05-07 11:20
3월3일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내린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AP

3월3일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내린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AP

코로나19의 충격을 묘사하는 숱한 말, 그 가운데 하나.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극적인 국가의 팽창’(<이코노미스트> 3월28일치). 사회 모습 그렇습니다. 개인의 자유 강조하던 서방국가조차 국민을 추적하고 지역을 봉쇄합니다. 경제 또한 그렇습니다. 수조달러 규모 재정정책을 정신없이 발표합니다. 시장과 자율을 대변하던 중앙은행이 벽을 무너뜨리고 정부를 지원합니다.

지금, 코로나19를 이기기 위해 ‘큰 국가’가 필요하다는 데 누구도 토 달 수 없습니다. 실물에서부터 번진 경제위기와 상상초월한 대응을 이야기했던 지난호(제1306호), 남겨뒀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다시 생각합니다. ‘코로나19 이후에도 거대한 국가는 이어질까?’ 아직은 재난의 한가운데, 전망은 조심스럽습니다. 길게 보면 1970년대 이후, 짧게 보면 세계 금융위기부터 이어진 한 시대의 원칙이 하나둘 흐릿해지는 조짐은 있습니다. 좋은 일 같기도 걱정스러운 일 같기도 합니다.

목적 없이 돈 찍어내기만 했는데…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규정하는 단어 다발을 먼저 꺼내봅니다.

시장, 자율, 금융, 통화정책, 전문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달러, 세계화….
예상치 못한 사건과 대응이 축적된 결과, 우연이 촉발했으나 이제는 필연인 것만 같은 이 시대의 핵심어입니다. 1970년대 미국 기업 이윤율 감소, 석유파동, 인플레이션(달러 가치 폭락) 같은 우연한 충격에 대한 대응(금융시장 개방, 달러화 권위 회복)이 만들어낸 시대입니다. 이 시대 작동 방식은 거칠게 보면 이렇습니다. 미국 연준의 소수 경제 전문가들이 달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세계 모든 경제주체가 그런 달러 가치를 규칙으로 받아들인 채 경제활동을 합니다. 정부도 그저 한 명의 선수일 뿐, 예외는 없습니다. 정부의 재정지출은 언젠가 갚아야 할 채무라고 단단히 믿습니다. 적자 앞에 전전긍긍하고 민간의 자율을 침해하지 않도록 국가는 움츠립니다.

2008~2009년 세계 금융위기, 세계가 무너져버릴 것 같았던 사건 앞에서도 시대의 흐름은 멎지 않았습니다. 조금 기묘한 모습으로 거세졌습니다. 미국 연준은 기준금리를 바닥까지 끌어내렸고, 단기국채를 넘어 장기국채까지 사들이며 달러를 풀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연준이 공급하는 돈에 의존했고 부채를 늘렸습니다. 연준이 이렇게 은행을 통해 시장에 주입하는 돈에는 ‘~을 위한’ 따위 목적어가 붙지 않습니다. 목적 없는 돈이 좇는 건 수익률뿐입니다. “무엇을 위해 써야 한다는 제약이 없이 풀린 돈은 투자나 소비 같은 실물경제로 가지 않고 금융·자산 시장으로 집중됐습니다. 실물경제와 금융·자산 시장의 격차는 당연히 엄청나게 벌려졌고요.”(최서영 삼성선물 연구원)

세계 금융위기 대응 과정에서 나온 양적완화는 돈의 양이 중앙은행 의지에 따라 무한정 늘 수 있는(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세계를 보여줬습니다. 연준으로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은 한층 더 쏠렸습니다. 하지만 그 돈에 실물경제 성장, 일자리 같은 목적을 쥐여줘야 할 정부(정치적 합의)와 재정정책은 여전히 자신감도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금융위기 때(2009년 상반기)도 재정을 통한 경기부양책이 나오긴 했지만, 미국의 경우 8천억달러 규모(당시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0.5%)였고 그 기간도 1년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마저 “무책임한 지출”이라고 비판받습니다. 자산만이 국경을 넘나들며 새로운 고점을 향해 부지런히 내달립니다. 양극화에 대한 불만은 거세집니다. 통화정책 시대의 아픈 단면입니다.

시대별 경제정책 수단. 자료: 유진투자증권

시대별 경제정책 수단. 자료: 유진투자증권

코로나19로 찍어낸 돈 취약가구 등을 향해

굳건해 보였던 그 시대가 코로나19를 계기로 흔들릴 조짐이 보입니다.

국가, 정부, 재정정책, 정치적 합의, 실물경제, 완전고용….
지금껏 반대편에서 소외돼온 것들의 대반전이 시작되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강렬한 정책이 이어집니다. 다급하게 코로나19로 멈춘 실물경제를 되살릴 ‘국가’를 되부릅니다. 무엇보다 연준의 태도가 이상합니다. “가계나 기업의 취약 지점을 정부가 특정해 재정으로 떠받치고 그런 정부를 연준이 지원하는 모습”(최서영 연구원)입니다. 연준이 돈 푸는 일이야 금융위기 때와 비슷한데 일부는 그때와 달리 명확한 목적과 가치를 담은 돈으로 보입니다. 콕 짚어 한계기업, 취약가구의 부채를 함께 책임지고 구제하는 데 쓰려고 합니다. 기한과 규모를 정하지 않는 제한 없는 양적완화도 그저 돈을 풀어 시장을 안심시키는 것을 넘어 정부의 천문학적인 재정 조달 부담(장기국채 금리)을 낮추려는 맥락으로 읽힙니다. 정부로부터의 엄격한 독립, 목적을 정하지 않는 돈, 특정 주체보다 경제 전체를 강조해온 그동안과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예전 같으면 ‘정부와 중앙은행의 엄격한 분리를 끝장내는 일’ ‘시장의 자율성을 훼손’ ‘결국은 통화가치를 하락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했을 터입니다. 재난 앞에 그런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상상합니다. 정부가 재정 적자를 겁내지 않고 필요한 만큼 돈을 찍어서 쓰는 세상이 정말 오는 거 아니야? 또한 돌아봅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시장이 국가를 압도하는 세계에 살게 됐지?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은 엄격히 분리돼야만 하는 걸까? 지금이야 민간과 시장이 우위에 선 경제가 당연해 보이지만 중앙은행 독립성이 인정받은 것도(1951년), 실물경제 성장 속에 재정 적자가 큰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1950~60년대)도 생각해보니 오래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과거에 등장했던, 그래서 할 수도 있을 법한 정책의 목록을 생각합니다.

‘수익률 곡선 통제’(Yield Curve Control)를 떠올립니다. 1940년대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속 재정의 필요성이 클 때 미국에서 시행한 정책입니다. 쉽게 말하면 국채 금리를 중앙은행이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정부는 조달 부담 없이 재정을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국채 발행(재정 적자)이 늘어남에 따라 나타날 고금리. 그로 인한 민간투자 위축을 막는 효과도 있습니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중앙은행이 보유한 국채를 없애버리거나 갚아야 한다는 의무를 면제해줄지도 모릅니다. 기한과 양을 정하지 않는 양적완화 자체가 보기에 따라선, 정부가 발행한 국채(정부의 채무 부담)를 제한 없이 중앙은행이 떠맡겠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전히 무제한적 양적완화의 문을 여닫는 권한은 중앙은행에 있지만 그 권한이 정부로 넘어온다면? 아주 급진적인 국가 주도 경제로의 전환입니다. 정부가 특정 목적을 가지고 재정을 쓸 수 있도록, 필요한 만큼 돈을 찍어내는 세상입니다.

트럼프 “2조달러 추가 투입해야”

물론 실현될지 모를 공상의 영역입니다. 조금 기미가 보인다고 해서 시대의 전환을 말하기는 섣부릅니다. “지금은 워낙 실물경제가 다급한 상황이니 모두가 재정과 국가를 부르지만, 상황이 진정되면 다시 엄격한 재정 규율을 말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도 있다.“(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재정정책은 멎고 연준이 풀어낸 돈만 남아 결국 돈은 금융위기 때처럼 목적을 잃고 자산시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겠지요.

다만 전염병의 세계적인 확산 이후 아직은 어마어마한 재정정책이 발표되는 중입니다. 미국은 3월27일 2조2천억달러(약 2700조원, 미국 GDP의 약 10%) 재정을 쏟기로 한 뒤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가계 지원, 중소기업 고용 유지 수준을 넘어 경기부양에 나서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월31일(현지시각) 트위터에서 인프라(사회간접자본) 투자에 집중한 새로운 부양책에 2조달러를 더 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오늘부터는 새로운 시대’ 하고 외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씀씀이가 커지다보면 정부로 무게중심이 점점 이동할지도 모릅니다. “침체가 깊어지고 정부가 계속해서 부채를 일으킬 필요성이 커지고, 빚을 갚아야 한다는 의무를 점점 느슨하게 하다가, 갚아야 할 채무라는 개념이 모호해지는 순간이 오는 식으로 점차 변해가는 과정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허재환 유진투자증권 연구위원) 예기치 못한 우연 앞에 정신없이 대응하는 한순간 한순간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돌아보면 변해버린 시대를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의 시대가 그렇게 왔듯이.

코로나19 확산으로 인적이 드문 미국 뉴욕 거리. 연합뉴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적이 드문 미국 뉴욕 거리. 연합뉴스

큰 국가는 어떤 국가여야 하나

2020년대 세상에서 거대한 국가는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2020년, 금융과 실물 사이 불평등이 극에 이른 시점입니다. 재정정책은 자산시장으로만 흐르는 돈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실물로 돈이 흐르게 유도해 양극화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겠지요. 기업을 구제해주며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은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금지하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풀린 돈이 다시 주주(자산시장)에게 흐르는 것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입니다.

그러나 한편, 2020년은 저성장의 시점이기도 합니다. 국가들은 줄어든 세계 수요라는 파이를 놓고 제로섬게임을 벌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나마 통화정책이 금융을 매개로 세계의 상호의존을 심화하고 국제 공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견줘, 재정정책은 한 나라의 일입니다. 일단 우리 국민 일자리를 지키고, 우리 산업을 지켜야 합니다. 미국 같은 초강대국에서 국가주의가 강해지는 건 그만한 여력이 없는 국가에는 재앙일 수 있습니다. 세계의 분업 구조는 빛을 잃습니다. 국가를 뛰어넘어 부와 빈곤이 갈리던 세계에서, 국가 간 양극화가 거센 세계로 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구조조정 등을 머뭇댈 국가의 비효율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시장이 더 효율적인 것도 아닙니다. 지난 시대 저금리로 한계기업을 유지하고 구조조정을 미뤄온 시장의 비효율 역시 명백합니다.

결국 큰 국가만큼 어떤 국가인지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2020년을 봅니다. 그나마 지난 40여 년 세계화를 타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표준이 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더는 독재자 한 사람이 아니라 정치적 합의, 국민의 의지로 (표면적으로나마) 규정됩니다. ‘극적인 국가 팽창’ 이후, 경제 방향을 결정하는 권력이 시장논리를 넘어 다양한 가치를 생각하는 다수 국민의 합의가 될 수 있다는 것 정도. 그래도 희망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한 걸까요?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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