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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번을 흔들려야 손석희 저널리즘이다

“오랜 레거시 미디어의 유산” 손석희의 앵커직 사임, 그의 현실적 저널리즘을 기억하며
등록 2020-01-17 11:39 수정 2020-05-03 04:29
손석희 JTBC 대표이사 사장의 마지막 <뉴스룸> 방송. JTBC 화면 갈무리

손석희 JTBC 대표이사 사장의 마지막 <뉴스룸> 방송. JTBC 화면 갈무리

언론인 손석희가 하차했다. 스스로를 “오랜 레거시(정통) 미디어의 유산”이라 칭하며 JTBC 진행자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굳이 ‘레거시 미디어’를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손석희 JTBC 대표이사 사장은 정통을 따르는 언론인의 어떤 모범처럼 평가됐다. 이제 현업에서 물러난 만큼 이런 평도 다시 짚어볼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

편향 가능성을 전제한 ‘논조’ 뉴스

손석희 사장은 MBC 시절부터 오랫동안 진행자 역할을 맡아 명성을 떨쳤다. 토론이나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공정성’이다. 손 사장이 이 부분에서 특히 이름을 떨친 것은 을 진행할 때였다. 전임자인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종종 패널과 직접 토론을 불사하며 공격적으로 쟁점을 이끌어냈던 것과 대조되는, 균형감 있는 진행이 돋보였다. 쟁점 형성의 맥락을 잃지 않으면서 토론 패널들의 발언이 주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뉴스 진행자로서 공정성 개념을 구현하는 것은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고민을 요구한다. 사람이 팩트(사실)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편향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팩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만 잘해도 충분히 언론의 소임을 다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컨대 ‘관찰’은 ‘관점’에서 자유로운가? 여기서 두 지점을 살펴봐야 한다. 첫째는 팩트를 전달하는 어떤 기술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매체에 대한 사회적 신뢰의 문제다.

팩트를 전달하는 기술은 크게 두 경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모범적 형태의 중립성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해석하면 이 경우의 뉴스 진행자는 최대한 자기 존재를 감춰야 한다. 진행자 자신이 아닌 뉴스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라면 남는 해법은 뉴스를 전달하는 과정 자체에 특정한 논조가 작용한다는 사실, 즉 편향 가능성을 전제하고 시청자가 뉴스를 수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편향이란 정파성이 아니라 팩트의 중요성 등 해석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를 말한다.

손석희 사장의 방식은 후자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기 코너인 ‘앵커 브리핑’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앵커 브리핑’은 특정 주제에 대한 뉴스 진행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코너로 볼 수 있다. 다른 뉴스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클로징 멘트’(마무리 발언) 등을 통해 맛보기처럼 논조를 드러내는 것에 비하면 훨씬 공격적인 방식이다. 이런 계기로 시청자는 진행자의 관점을 인식하면서 그가 전하려는 뉴스를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프로그램 구성에서 마지막에 손 사장이 직접 선곡한 음악이 나오는 것도 넓게 보면 마찬가지 역할을 했다.

다이빙벨과 태블릿PC 사이

이는 손 사장이 과거 몸담았던 MBC 뉴스의 특징이기도 했다. MBC는 조금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공영방송이고 싶지 않았지만 여러 정치적 과정 때문에 공영방송이 된 방송사다. 꼭 그래서라고 할 순 없겠지만 과거에도 전반적으로 방송의 공적 책무를 수행하는 것보다는 어떤 재미, 즉 시청률에서 강점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뉴스에서 시청률은 신속성과 선정성에 좌우된다. 전자는 이른바 ‘단독 보도’로, 후자는 논조가 강하게 부여된 보도로 구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게 긍정적 방향으로 풀리면 역사에 남는 보도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매체 신뢰도가 저하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손석희 사장의 뉴스 진행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다이빙벨’과 관련한 보도나 2014년 지방선거 때 지상파 3사 출구조사 결과 무단 사용, 이 확보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육성 녹음 공개, 그 외 과도한 ‘단독 보도’ 타이틀 추구 등의 논란이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물론 손 사장의 방법론이 언제나 부작용으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국정 농단 사태 때 태블릿PC 관련 보도 같은 일은 이런 방법론의 연장선에서 과단성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고, 이게 JTBC라는 매체의 전반적인 신뢰도 제고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한국을 대표하는 저널리스트라는 손 사장의 방법론도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다.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를 가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손 사장이 진행자로서 명성을 날릴 수 있게 한 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MBC 라디오 이다. 인터뷰가 주가 될 수밖에 없는 이 프로그램에서 손 사장은 강자에겐 강한 모습을, 약자에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인터뷰 상대가 정치인이나 고위 공무원인 경우 답변의 틈을 주지 않는 날카로운 질문 공세를 퍼붓지만, 일반인에 가까운 사람이 나왔을 때는 온정적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특히 정치인의 경우 질문지에 없는 질문을 한다는 이유로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 한나라당 대표이던 때 인터뷰 도중 “저하고 싸움하시는 거예요?”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특징이 극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2011년 2월 폭설 때다. 당시 손 사장은 강원도 삼척의 한 마을에서 노인을 인터뷰하고 이어서 곧바로 강원도 관계자를 연결했다. 요지는 폭설로 힘없는 노파가 자택에 고립되는 등 문제가 심각하니 제설 작업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거였다. 심각한 태도로 문제를 제기하는 손 사장에게 공무원은 그날 안으로 제설이 완료될 것이라며 걱정할 필요 없다는 믿음직한 답변을 내놨다. 아마 정통 저널리즘 방식으로 보면, 양쪽 주장을 한 번씩 확인한 이 지점까지가 모범적 인터뷰의 구성일 것이다.

2013년 JTBC 보도담당 사장에 취임한 손석희 앵커가 <한겨레>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2013년 JTBC 보도담당 사장에 취임한 손석희 앵커가 <한겨레>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공공성을 추구한 휴머니즘

그런데 손 사장은 그다음 날, 전날 인터뷰한 노인에게 다시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노인은 공무원도 제설차도 하루가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아 여전히 고립된 상태라며 고통을 호소했다. 전날 공무원의 답변은 그저 기만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손 사장은 직후 삼척시를 연결해 이렇게 된 경위와 제설 계획 등을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이 덕분에 그날 고립된 노인이 구출된 것인지, 그다음 날 같은 이야기가 다시 반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언론인이 민원해결사가 될 이유는 없다. 저널리즘의 본질이 ‘문제 해결’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손 사장이 자신의 매체적 영향력을 활용해 곤경에 빠진 노인을 구출해냈다는 정의로운 서사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손 사장이 공무원의 말을 듣고 나서 그것이 의례적 답변에 그칠 가능성을 예견하고 실제로 그랬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다음 날 다시 던진 바로 그 대목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선정적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게 용인될 수 있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이런 시도가 언론의 본질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공공성 추구에 복무했기 때문이다. 성공은 대개 이런 경우였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언론이 자기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권력과 긴장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손 사장이 후보 시절의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불편해할 만한 태도를 취해온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정파가 정치를 대체한 오늘날에는 언론의 역할 역시 오직 정파적으로만 해석되는 게 현실이다. ‘태블릿PC’로 대표되는 국정 농단도, ‘조국 사태’도 마찬가지다. 손 사장이 물러나는 배경으로 시청률 추이가 언급되는 것 역시 이의 영향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애초의 원인 제공을 언론이 스스로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보수언론은 기득권 일반과 완전히 한 몸이 되어 대부분의 경우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정치와 언론 양쪽 모두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언론인이 도매금으로 비난받는 상황이 우리 언론 생태계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는 사실도 돌아봐야 한다. 이 영향으로 일부 언론인은 도피를 선택한 듯도 보인다. 자신을 기득권과 동일시하는 것에 열중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아니면 대중의 바람대로 말하고 움직이는 연예인의 길로 가버린다. 세파를 피해 자기만의 의제를 추구하겠다며 아예 동굴로 들어가버리는 일도 있는 것 같다.

희망의 또 다른 성공 사례를 볼 수 있길

앞서 서술했듯 나름대로 한계도 분명했지만 적어도 손석희 사장은 이런 방식으로 도피하지 않으면서도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추구해온 언론인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정통의 수호자라기보다는, 저널리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나름의 변화를 추구하며 끝없이 흔들려온 현실적 인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제2의 손석희’가 아니라 ‘손석희에 대적할 수 있는 언론인’을 찾기 어렵다는 점은 뼈아프다. 그러나 또 많은 언론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 사장이 겪은 것과 같은 일들에서 실패를 거듭하며 길을 찾아나간다는 것도 사실이다. 새해에는 이런 희망의 또 다른 성공적 사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민하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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