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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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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지옥문으로 희망의 빛이 쏟아졌다

2년 맞은 ‘직장갑질119’ 박점규 운영위원 인터뷰,

“업종별 온라인 노조 프로젝트로 간다”
등록 2019-11-18 12:29 수정 2020-05-03 04:29
11월13일 서울 중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사무실에서 박점규 위원(왼쪽 아래)과 직장갑질119 활동가들을 만났다.

11월13일 서울 중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사무실에서 박점규 위원(왼쪽 아래)과 직장갑질119 활동가들을 만났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9번 출구는 서울 종로구의 광화문광장과 곧장 통하는 곳이다. 2017년 초 광화문광장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매주 열렸다. 주말인데도 광장에 나온 군중은 밤 10시가 넘어서면 하나둘씩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로 빨려 들어가는 무리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다. 비슷한 시각 광화문 9번 출구에서 촛불을 받아 들고 그제야 광장으로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주말까지도 야근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긴 하루를 보냈을 직장인들이었다.

‘직장이 민주화되지 않으면 정권이 바뀌어도 직장인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 거다.’ 9번 출구를 지켜보던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의 고민은 이렇게 시작됐다. 박 위원은 5개월여의 준비를 거쳐 2017년 11월1일 직장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카카오톡에, 누구나 익명으로 말할 수 있는 ‘직장갑질119’ 단체대화방(gabjil119.com)을 만들었다.

단체대화방이 만들어진 지 2년째 된 11월13일, 서울 중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사무실에서 박 위원을 만나 지난 2년을 톺아보고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촛불로 시작된 ‘직장갑질’ 고발

직장갑질119 출범 뒤 2년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나.
직장갑질119가 출범한 지 한 달쯤 됐을 때다. 직장갑질119 스태프(활동가)로 있는 한 노무사가 말했다. “지옥문이 열렸다.” 단체대화방에서 익명으로 제보를 받자 사람들은 직장에서 시달리던 고통을 쏟아냈다. 단체대화방은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노동조합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던 전통 방식과 달랐다. 친구든 가족이든 가까울수록 걱정할까봐 직장에서 당한 일을 털어놓지 못했는데 익명의 대화방이 그 문을 열어준 거다. 막상 문을 열어보니 사무실의 사(事)는 죽을 사(死)였고, 직장은 지옥이었다.

이후 직장갑질119는 공감의 학교가 됐다. 노동자들은 ‘나도 당했는데 저 사람도 당했구나’ ‘내가 무능력해서’ ‘내가 잘못해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단체대화방에서 그동안 국가에서도 직장에서도 알려주지 않은 노동자의 권리를 배웠다. 현재 단체대화방에 접속한 사람만 1442명이다(11월13일 기준).

최근까지 어떤 제보가 들어왔나.
단체대화방과 전자우편, 네이버 밴드 등으로 4만3천여 건의 상담과 제보가 들어왔다(11월1일 기준). 그 내용은 7월16일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하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전후로 질적으로 달라졌다. 법 시행 전까지는 임금을 떼였다는 제보가 전체 상담과 제보의 약 25%, 모욕·명예훼손은 약 14%, 개인 용무나 부당한 업무 지시가 약 14%였다. 그런데 법 시행 뒤 한 달 만에 직장 내 괴롭힘이 전체 상담과 제보의 절반을 넘었다. 이전에는 괴롭힘을 당해도 신고할 데가 없었지만, 법 시행 뒤 직장갑질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단체대화방의 위력은 어땠나.
직장갑질119로 한림대학교 성심병원의 선정적인 장기자랑이 드러나면서 비슷한 사례가 없어지는 연쇄적인 파급효과를 거뒀다. ‘장기자랑이 사라졌다’는 제보가 계속 들어왔다. 부산 기장군의 한 육아종합지원센터장이 직원에게 논문을 대필하게 한 일이 알려지면서 해임되기도 했다. 이후 다른 육아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하던 직원도 연장근무수당을 받게 됐다. 한림대학교 성심병원과 육아종합지원센터처럼 갑질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직장의 공통점은 규모가 작고, 지방이고, 노조가 없다는 거다. 소규모 조직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간부나 관리자가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도

누가 직장갑질119와 함께하고 있나.
직장갑질119 스태프만 140여 명에 이른다. 노동인권실현을위한노무사모임, 민주노총 법률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노동조합 활동가 크게 네 부류다. 이들이 단체대화방·대면 상담과 소송까지 돕는다. 출범 2주년 행사 때 스태프에게 목베개와 양말을 선물로 줬다.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가 힘들어지면 잠깐이라도 편하게 쉬라는 뜻이었다.

스태프가 돌아가면서 일주일에 1시간30분씩 단체대화방에서 상담을 한다. 짧다고 볼 수도 있지만 굉장히 긴장된다. 급한 전화가 오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면 그제야 단체대화방에서 잠깐 나간다고 알린다. 질문이 동시에 여러 개가 들어오기도 한다. 잘못 대답할까봐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며 실시간 응대한다.

주중에는 본업이 있어 전자우편으로 답변하다보면 새벽 두세 시가 넘는다. 주말 오전까지 일하는 스태프도 많다. ‘고맙다’는 제보자의 말 한마디면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고 하지만 다들 피로가 누적돼 있다. (제보) 녹취를 들을 때가 가장 힘들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이 많다. 제삼자가 들어도 힘든데 당사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심적 부담이 크다.

문제를 제기하기 부담스럽지 않나.
부담스럽다. 하지만 제보자들은 더 두려워한다는 것을 아니까 더 철저하게 검토하고 더 신중해진다. 제보자 말에 귀 기울이지만 계속 검증한다. 꼬치꼬치 캐묻다보면 과장해 말하거나 무언가 숨기고 말하지 않을 때도 있다. 제보 내용을 신뢰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더 명확하게 믿을 수 있는 내용만 추린다. 명예훼손 등을 당하지 않게 제보자를 보호하려는 조처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뒤 무엇이 달라졌나.
법 시행 100일을 맞아 19∼55살 직장인 1천 명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니, 공공기관과 대기업의 ‘갑질 지수’(직장에서 겪는 불합리한 처우 정도를 계산한 지표)가 중소기업보다 낮았다. 이는 법 시행 뒤 예방 교육 여부와도 관련이 있다. 직장 내 괴롭힘 예방 교육은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처럼 의무교육은 아니다. 그런데도 공공기관과 대기업이 자체적으로 교육하면서 직장갑질이 일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중소·영세기업에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인지도가 낮아 한두 해에 한 번씩 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의무교육이 절실하다.

간접고용 노동자에게 법을 적용하기도 어렵다. 원청업체 관리자가 하청업체 노동자를 괴롭히면 누구든 신고할 수는 있다. 하지만 현행법에선 원청업체가 고용계약을 해지해 보복하더라도 부당한 처우로 인정받지 못한다. 원청이 아닌 파견업체가 고용계약을 해지하면 파견업체 노동자도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더 많이 갑질을 당하고 노조도 없는 파견, 하청, 용역, 특수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게 법 개정이 필요하다.

노조 만들기, 미용사부터 간호조무사까지

출범 3년차 계획은 무엇인가.
직장갑질을 뿌리째 없애려면 노동자들이 스스로 뭉쳐 직장문화를 바꿔야 한다. 하지만 기업별로 노조를 만드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힘들다. 중소·영세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 30명 미만 사업장의 노조 가입률은 0.2%에 그친다(2017년 기준). 직장갑질119는 노조도 없이 30명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99.8%를 위해 업종별 온라인 노조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미용사, 학원 강사, 자동차 정비사, 간호조무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업종은 종사자 수가 10만 명이 넘는데도 노조가 없다. 새로운 실험이다. 업종별로 온라인 노조를 만들어 정보를 주고받고 직장갑질을 제보하는 거다. 모범 단체협약을 만들 수도 있겠다. 단체든 협회든 사용자 대표와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다면 업종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다. 기대해달라.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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