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마시러 왔습니다.” 1995년 10월30일 저녁 당시 안강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검사장)이 대검 청사 별관 1층에 있는 기자실에 내려왔다. 대검 중수부장이 기자실을 찾는 일은 흔치 않아서 기자들은 적잖이 긴장했다. 당시 대검 중수부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을 수사하고 있었다. 앞서 10월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내역을 공개한 것이 계기가 됐다. 기자들은 안 검사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2009년 안 될 짓만 골라 한 수사하지만 안 검사장은 소파에 앉아 시시한 잡담만 늘어놨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는 둥 기자실이 비좁아 보인다(당시 대검 기자실에는 언론사별로 기자 2~3명이 파견됐다)는 둥 엉뚱한 얘기였다. 실망한 기자들은 각자 부스로 돌아갔다. “그럼 수고들 하세요. 저는 이만 퇴청합니다.” 안 검사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 기자들에게 인사말을 던진 뒤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기자실 문을 막 나서던 그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아 참, 깜빡할 뻔했네. 내일모레(11월1일) 노태우 전 대통령 소환 통보했습니다.”
순간 기자실은 난리가 났다. 마감 시간 전에 기사를 송고하려는 신문기자들과 텔레비전 생중계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방송기자들로 기자실은 북새통을 이뤘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한 수사의 시작을 드라마틱하게 알린 이 일화는 대검 중수부의 위용을 상징하는 ‘전설’이 됐다. 전직 대통령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사할 수 있다는 검찰의 당당함이 느껴진다. 그로부터 21년 뒤 검찰은 정치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현직 대통령까지 수사하는 막강한 권력기관으로 성장했다.
그 바탕에는 검찰 ‘특별수사부’가 있다(대검 중수부는 특수부의 별동대였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관계를 파헤치는 특수부의 활약으로 검찰은 존재감을 높일 수 있었다. 앞서 공안검사들이 만들어놓은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오명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었다. 특수부 검사는 명실상부한 검찰의 ‘대표선수’가 됐다.
하지만 특수부는 지금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특수부라는 이름을 빼앗기고 규모도 대폭 축소됐다. 특수부는 10월22일부터 ‘반부패수사부’로 현판을 바꿔달았다. 그나마 바뀐 현판도 서울중앙지검과 대구지검, 광주지검 3곳에서만 볼 수 있다. 이전까지는 전국 19개 검찰청 중 7개 청에 특수부가 있었다. 1973년 대검에 처음 설치된 이후 부침을 거듭하던 특수부가 46년 만에 최대 고비를 맞게 된 것이다.
2013년 4월 대검 중수부가 폐지됐을 때도 지금처럼 위기감이 크지 않았다. 중수부 기능을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넘기면 됐기 때문이다. 중수부는 검찰총장이 직접 지휘하는 기형적인 조직이었다. 총장 직속이다보니 수사가 실패해도 책임을 묻기 어려웠다.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되면 그 짐을 고스란히 총장이 져야 했다. 이런 이유로 검찰 내부에서도 대검 중수부 폐지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대검 중수부 폐지 여론은 앞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로 촉발됐다. 하명 수사, 표적 수사, 망신주기 수사 등 민주화 시대의 권력기관이 해서는 안 될 짓만 골라서 한 수사였다. 그동안 특수부가 쌓아온 긍정적 이미지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수사를 지휘한 검찰총장이 사퇴한 것은 당연했다. 수사의 여파는 이명박 정권까지 뒤흔들었다.
대검 중수부 폐지를 추진하는 검찰총장에 맞서 검찰의 ‘특수통’(특별수사 경험이 많은 검사)들이 항명에 나선 것도 폐지 여론에 불을 붙였다. 2012년 11월 당시 한상대 검찰총장은 현직 검사 뇌물 사건 등 검사 관련 비리 사건이 잇달아 터지자 중수부 폐지를 포함한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자 중수부장을 비롯한 대검 간부들은 총장 퇴진을 요구하며 반기를 들었다. 이 사건은 한 총장의 사퇴로 마무리됐으나, 특수부 검사들에 의한 하극상 논란이 일면서 대검 중수부 폐지 여론에 불을 붙였다.
한보 비리, 여론 기대에 부응하는 수사의 함정지금 특수부가 처한 위기는 대검 중수부 폐지 때와 양상이 다르다. 이번 조처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수사가 직접적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과 이명박 전 대통령 비리 사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 농단 사건 등 ‘적폐 수사’로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조 전 장관 수사와 관련해 검찰에 대한 비난도 일방적이지 않다. 수사에 대한 찬반 여론은 팽팽히 맞선다. 그럼에도 검찰개혁에 대한 여론은 찬성이 압도적이다. 검찰개혁의 요체는 기존 특수부의 수사 관행을 개혁하라는 요구다. 이런 여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997년 김영삼 정권 말기에 터진 ‘한보 비리’ 사건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사건은 부실 수사 시비에 휘말려 재수사를 거쳤는데, 여론의 반응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컸다. 1차 수사에선 축소·은폐 수사라는 비난을 뒤집어쓰며 당시 최병국 중수부장이 중도하차하는 수모를 겪었다. 여론은 현직 대통령의 아들을 ‘몸통’으로 의심하는데 검찰은 이런 의심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봐주기 수사’ 의혹을 더했다. 검찰에 대한 비난 여론은 고스란히 김영삼 정권에 짐이 됐다.
‘구원투수’로 임명된 심재륜 중수부장이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를 구속하자 시민들의 성금과 격려가 쏟아져 들어왔다. 심 검사장이 지휘한 수사팀은 현직 대통령의 아들을 포함해 당시 정권 실세와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을 줄줄이 구속했다. 심 검사장은 이 수사로 검찰의 대표적 ‘칼잡이’로 이름을 날렸다. 살아 있는 권력도 원칙대로 수사하는 모범을 보여줬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김씨를 한보 특혜대출 관련 혐의가 아닌 조세포탈로 구속 기소함으로써 ‘별건수사’ 시비를 낳았다. 국정 개입 논란으로 여론의 반감을 산 김씨를 구속함으로써 여론의 분노를 잠재웠지만, 별건수사는 검찰권을 남용했다는 지적을 받을 만했다. 하지만 당시 언론들은 심 중수부장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심 고검장은 ‘칼은 찌르되 비틀지는 말라’ ‘수사하다 곁가지는 치지 마라’는 등 수사의 정도를 강조하는 어록을 남겼지만, 정작 자신은 별건수사 시비의 당사자가 됐다. 여론의 기대에 부응하는 수사의 함정도 경계해야 한다.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수사검사가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자칫 무리수를 둘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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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이 아닌 정권을 의식하는 수사는 더 큰 문제를 낳는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검찰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위험성을 보도한 MBC <pd> 관련자들을 수사했다. 2008년 6월 처음 이 사건을 맡은 임수빈 당시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장은 “명예훼손 혐의 적용이 어렵다”고 윗선에 보고했다. 하지만 검찰 수뇌부는 수사 강행을 지시했고, 임 부장검사는 사표 제출로 ‘저항’했다. 그러자 검찰 수뇌부는 사건을 형사6부로 재배당했고, 새 수사팀은 PD들을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결과는 1, 2, 3심 모두 무죄판결이었다. 이 수사는 검찰권 남용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수사에 참여했던 검사들은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승승장구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지금 조국 전 장관 수사를 지휘하는 송경호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다. 송 차장은 ‘윤석열 사단’의 핵심 멤버다. 앞서 ‘적폐 수사’에도 참여해 맹활약했다. 그가 요직에 있는 건 검찰 인사에서 윤 총장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정권의 하명 수사에 참여해 무죄판결을 받았다면 당연히 인사상 불이익을 줘야 한다. 그래야 후배 검사들이 그런 짓을 따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지속해서 전력을 강화해왔다. 중수부 폐지 이전에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3개 부가 있었고, 각 부에는 부부장검사 1명에 평검사가 네댓 명 배치된 ‘원팀’이었다. 그런데 중수부 폐지 이후 특수부는 4개 부로 늘었고 각 부에 부부장검사를 1명씩 더 배치해 두 개 팀으로 나눴다. 한 팀은 수사에, 다른 한 팀은 재판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수사는 물론 유죄판결까지 이끌어내려는 포석이다. 1개 부에 소속된 검사도 10명으로 늘어났다. 또 수사 분야를 잘게 쪼개서 검사들이 자기가 맡은 분야를 집중적으로 다룰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해 검사 개개인의 전문성도 높아졌다.
‘정치검찰’ 유혹에서 벗어나라
하지만 특수부 전력 강화만으로는 국민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는 사실을 ‘조국 사태’는 보여줬다. ‘정치검찰’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검사들이 여전히 활개를 친다면 아무리 ‘살아 있는 권력’과 맞짱 뜬다고 해도 그것을 정치적 독립으로 보지 않는다. 검찰개혁의 목소리도 더욱 커질 것이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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