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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그날’ 멈춘 시계 기억 투쟁이 움직였다

베트남전과 한국의 상처에 기억의 다리 놓은 ‘미안해요 베트남’ 20년,

끊임없이 ‘운동’ 해온 구수정·윤충로·김현아·고경태의 대화
등록 2019-10-24 09:58 수정 2020-05-03 04:29
10월15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왼쪽부터) 고경태 이십이세기미디어 대표, 김현아 로드스꼴라 대표 교사,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윤충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이 만났다.

10월15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왼쪽부터) 고경태 이십이세기미디어 대표, 김현아 로드스꼴라 대표 교사,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윤충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이 만났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24년이 된 1999년 5월 이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제256호) 기사를 처음 보도했을 때 ‘호찌민 통신원’이던 구수정과 고경태 기자, 대학원생 윤충로, 평화운동단체 ‘나와 우리’ 공동대표 김현아는 31~33살이었다. 베트남전쟁이 절정일 때 태어났고, 유신시대에 초등학교에 다녔다. 2000년 6월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 난입했던 한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의 말처럼 “베트남전쟁에서 싸울 때 기저귀나 차던 애들”이었다.

첫 보도 이후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과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시작된 지도 20년이 됐다. 한국전쟁도, 베트남전쟁도, 전쟁을 직간접으로 경험하지 않은 ‘전후 세대’가 태어났다. 그사이 구수정은 한베(한국·베트남)평화재단 상임이사가 됐다. 윤충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논문 등을 쓰며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사실상 유일하게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책 을 펴낸 김현아는 대안학교 로드스꼴라 대표 교사가 됐다. 고경태는 한겨레신문사 자회사 이십이세기미디어 대표로 있으면서 등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10월15일 서울 성동구 한베평화재단 사무실에서 이 4명을 만났다. “이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의 플레이어가 바뀔 때”라며 웃던 이들은 여전히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책으로 쓰고, 연구하고, 청소년에게 이야기하고, 아카이브 기록전을 열고 있었다. 이들에게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 20주년의 의미와 남은 과제를 물었다.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선전물?

윤충로(이하 윤) 우리는 왜 베트남이었나.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 지도 조금 있으면 30년 된다. 그때 베트남은 누구에게도 실체가 없었다. 내가 베트남 공부를 시작한 건 1993년 말이었다. 베트남을 공부하려던 건 아니었다. 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다. 베트남 현대사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 특히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의 역사를 공부하려 했다. 석사 논문을 준비했다. 하지만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 공부하다 우연히 베트남 역사를 발견했다. 놀랐다. 어떻게 이런 역사가 있을까, 그게 출발점이었다.

구수정(이하 구) 1980년대 대학에 다녔다. 당시 학생운동으로 베트남 책을 많이 접했다. 공산주의운동사, 민족해방운동사, 학생운동사. 암울한 시기에도 책이 나왔다. 80년대 베트남을 만났던 기억이 강렬했다. 책 를 보며 80년대를 통과했다. 그 기억이 강렬했고, 1993년 말 결국 베트남으로 갔다.

중요한 얘기다. 1980년대 학번이 바라보는 베트남과 지금 인권·평화 운동을 하는 청년 세대가 바라보는 베트남은 다를 거다. 출발점이 달랐고, 베트남전쟁을 접하는 자세가 달랐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은 한국전쟁 전후로 태어난 세대다. 우리는 베트남전쟁 전후 태어난 세대다. 지금 세대는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보고 자랐다. 큰 줄기가 있다.

김현아(이하 김) 1998년 겨울, 일본 시민단체 피스보트(일본 젊은이들이 아시아 각국을 찾아가 일제 침략과 식민지 지배 역사를 배우면서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자는 운동)가 한국인 작가, 시민단체 활동가 등을 태웠다. 이들은 한국 사람을 데리고 베트남 중부 한 마을로 갔다. 아무 생각 없이 갔는데 다리가 잘린 할머니가 오더니 ‘청룡(부대)이 (우리를) 죽였다’고 했다. 그 장면을 나한테 전한 사람은 굉장히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고 했다. 직접 가서 들어보고 싶었다. 1999년 베트남에 가 구수정 이사를 만났다. 구 이사는 ‘전쟁범죄 보고서-남부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보여줬다. 구 이사의 이야기를 듣는데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다. 전쟁 중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선전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잔인했다.

외면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묻자, 피해 마을 사람들이 우릴 정중하게 맞았다. 집에서 가장 좋은 거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예의를 갖춰 우리를 맞았고 나직하게 말했다. “몇 명 죽었다” ”한국군이 죽였다” 통역하는 베트남 사람이 영어로 말했지만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냐짱에 와서 구수정 이사에게 우체국에서 팩스를 보냈다. 베트남어를 모르니까 “이게 무슨 뜻이에요”라고 주로 물었다. “커트” “킬드” “멀더” “코리안 솔저” “숫자” “몇 명” 이런 단어밖에 못 알아들었다. 마을에 가면 마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날 데리고 가는 곳은 위령비였다. “여자! 여자! 여자!” “0살” 이들은 말했다.

김현아 교사를 만나기 전 ‘전쟁범죄 보고서-남부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 문건을 입수하고 나서 당시 고경태 기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기사를 쓰려면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이후 김 교사를 만나 피스보트 이야기를 들었다. 베트남에 온 김 교사에게 자료를 보여줬다. “이런 문건이 있어.” “피스보트 말이 사실일지 몰라.” “이런 일 실제로 있겠니”라며 반신반의했다. 그래도 베트남에 왔으니까 이 자료를 들고 마을로 가보라고 했다. 이후 김 교사가 내게 팩스를 보냈다. “진짜 학살이 있었어.”

남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으로

고경태(이하 고) 어떤 언론도, 어떤 기자도 베트남전쟁에 관심 갖지 않았다. 베트남전쟁 때 수많은 사진기자와 취재기자가 베트남에 가서 취재했지만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이 벌인 비극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활동가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니었다. 기자로서 새로운 뉴스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호찌민 통신원이던 구수정 이사에게 빨리 쓰라고 재촉했다. (웃음) 1999년 5월 제256호 기사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 처음 보도됐다. 같은 해 9월 제273호 베트남 종단 특별르포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가 나간 뒤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독자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예상을 넘어서는 반응에 은 46주간 연재했다. ‘베트남전 양민학살, 그 악몽 청산을 위한 성금 모금 캠페인’을 시작해 매주 소식을 전했다.

보도로 베트남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전까지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미국도 베트남도 베트남전쟁을 말하지 않았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도 베트남전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운동권은 베트남 혁명과 투쟁만 봤다. 그사이 한국의 베트남전쟁 경험은 사라졌다. 보도로 베트남전쟁은 남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 됐다. 그게 어떻게 돌아왔든 한국 사람들이 다시 베트남전쟁을 보기 시작했다. 다른 측면에선 참전 군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돌려줬다.

후속 보도로 참전 군인 인터뷰(2000년 4월 제305호 ‘베트남전 참전 중대장 고백’)까지 하자 참전 군인들이 반발했다. 두 달 뒤 대한민국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가 한겨레신문사에 왔다. 6월27일의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억 투쟁’ 서막이 오른 거였다. 무엇이 진실인지 다투기 시작했다. 논쟁이 아니라 목숨 걸고 싸우는 기억의 투쟁이었다. 그 뒤 베트남전쟁 기념탑이 전국에 만들어졌다.

기억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문제가 공론화된 뒤 대사관에서 날 불렀다. 국가정보원과 법무부 쪽 관계자, 총영사가 있었다. “당신, 한국 사람이 베트남으로 여행 갔다가 돌 맞아 죽으면 책임질 거냐.” 그게 첫마디였다. 하지만 내가 30년 만에 피해 마을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학살 희생자들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1999년 보도 이전에 참전 군인들을 인터뷰했으면 어땠을지 궁금하다. 기억 전쟁이 시작되기 전 만났다면 그들은 베트남전쟁을 어떻게 말했을까. 무용담은 무용담일 뿐 기록이 없다. 어떤 의미로는 1999년 이후 통로 하나가 닫힌 거다. 굳은 의지를 갖고 발언할 사람이 필요한데 여전히 어렵다. 가해자인 한국은 피해자를 위로하거나 자신의 과거를 속죄한 적이 없다. 침묵하는 문화도 있는 거 같다. 역사에 내재한 폭력의 상처 때문에. 1992년 한국과 베트남 수교 전에 참전 군인을 인터뷰했으면, 예단할 수 없지만 비교적 이야기하기 자유로웠을지 모른다. 1999년이 참전 군인에게 침묵 기제를 만들어준 거다. 영화 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국 군인 이야기다. 주인공은 베트남에서 돌아와 반전운동가로 새로 태어난다. 미국에 존재할 수 있던 반전주의가 한국에서는 성립이 안 됐다.

월남 패망, 빨갱이, 베트콩이라고 하던 때

베트남전쟁 때 이미 미국은 반전운동을 시작했다. 반면 한국은 반공주의 국가였다. 공산주의를 하면 망한다고 했다. ‘월남 패망’이라는 말도 썼다. 분단 뒤 공산주의, 빨갱이, 베트콩은 같은 선상에 놓였다. 한국 사회에 ‘평화’라는 말이 나온 건 비교적 최근이다. ‘반전’이나 ‘징집 거부’라는 말도.

참전 군인을 국가 피해자이자 동시에 전쟁 가해자라는 자리에 세운 것도 누군가 설정해준 위치다. 참전 군인 스스로 자신을 규정할 시간이 없었다. 이들은 1999년 이전에는 왜 침묵했을까.

아무도 그들에게 묻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겪었냐고.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운동이 어떤 의미였는지.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은 한국 사람의 무엇을 건드렸을까.

세대의 힘이 아닐까 싶다. 1980년대에 대학에 다녔던 이들은 나름대로 변화 속에 있던 사람이다. 한국전쟁을 견줘보면 직접 전쟁 피해를 입은 세대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세대가 바뀐 거다.

참전 군인이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인 청년 세대는 우리와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들에게 베트남전쟁은 더 먼 과거이고 그만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었다.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에 앞장섰던 때의 세대와 달랐다. 그 시절 사람들은 ‘아버지가 정말 민간인을 학살했어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제주4·3 사건, 광주 5·18민주화운동, 베트남전쟁을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린 적이 있다.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제주4·3에 대해서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제주4·3을 말할 때는 말의 소용돌이 속에 비명과 눈물이 섞여 나왔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한겨레21> 제305호, 제306호, 제310호, 제334호 표지 이미지.

<한겨레21> 제305호, 제306호, 제310호, 제334호 표지 이미지.

청소년 베트남 만날 준비 돼있다

베트남전쟁과 직접 연루된 참전 군인들은 베트남전쟁을 쉽게 말하지 못한다. 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은 그만큼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전쟁을 쉽게 풀 수 있었다. 참전 군인이 할아버지인 젊은 세대는 베트남전쟁에 더 쉽게 다가가 민간인 학살을 말할 수 있을 거다.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통신을 통해 밝혀졌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을 통해 실체를 드러냈다. 왜 한국은 를 빌려야 했을까. 왜 베트남은 을 빌려야 했을까. 그게 단적으로 그 사회를 보여준다.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회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중 잣대’다. 한국인 또는 한국의 피해자들이 일본이나 미국의 전쟁범죄에 관해 요구하는 만큼 한국이 베트남 희생자들을 위해 해줘야 한다. 안 그러면 이중 잣대다. 이른바 ‘진보 대 보수’ 지형에서 상대편 허물은 가차 없이 공격하면서 자기편 허물에 심하게 관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대표 교사로 일하는 ‘로드스꼴라’(길 위에서 배우고 놀고 연대하는 여행 학교) 학생 20여 명을 데리고 베트남에 갔다. 학생을 데리고 베트남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한 학생이 두 다리가 잘린 팜티호아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의 어떤 이야기가 그를 울렸는지는 모른다. 이후 학생들이 보여준 반응은 흥미로웠다. 학생들은 향을 피우고 묵념하고 또 기도했다. 한 학생에게 물었다. “아까 무슨 생각으로 분향했니?” 학생은 가만히 있다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이가 말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어요.” 베트남에 갔다온 학생들은 지금까지 마을 위령제에 꽃다발을 보낸다. 이 학생들은 어떤 해에는 연극을 했고, 어떤 해에는 뮤지컬을 했다. 베트남이라는 공간은 아이들과 청년에게 전쟁과 평화에 대한 질문을 하기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이야기를 듣다가 감당하지 못하고 화내는 학생도 있었다. 한 학생은 또 내게 물었다. “애들은 우는데 전 왜 눈물이 안 날까요….” 베트남은 배움의 공간이었다.

청소년은 베트남전쟁을 만날 준비가 된 것 같다. 한 교수가 내게 물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가 한국 사회를 바꾼 것 같은데 베트남은 바꿨어요?”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베트남 사회를 구조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바꿀 이유도 없다. 베트남 사회는 베트남 사람들이 바꿀 거다. 하지만 적어도 베트남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에 균열을 준 것은 맞다. ‘과거는 닫고 미래로 가자’는 태도였던 베트남도 변화했다. 우리가 베트남에 가기 전, 베트남 사람들의 시계는 학살 그날에 멈춰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베트남에 가기 시작하자 위령제와 제사가 꾸준히 이어졌고 피해자들도 입을 열면서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제주4·3 피해자 그리고

베트남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전후 세대다. 말 그대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다. 전후 세대에게 베트남전쟁은 뭘까.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에게 베트남은 ‘경제’와 ‘반공’이었다면 1980년대 학번은 베트남을 ‘혁명’으로만 봤다. 하지만 지금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에 동참한 전후 세대는 혁명을 모른다. 그들은 이데올로기나 혁명이 아닌 평화와 인권의 시각으로 베트남전쟁을 보기 시작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작가들의 모임’을 만든 김남일 작가가 “베트남은 한국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다. 베트남을 통해 한국을 다시 돌아볼 수 있다는 거다. 일본군 ‘위안부’, 제주4·3 피해자, 베트남 민간인 학살 희생자가 만난다. 서로 다른 희생자들이 만나 서로를 이해했다.

청년 세대는 베트남전쟁에 우리와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 이들은 열린 마음으로 베트남전쟁을 들여다본다.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더라도 이 세대가 공동의 경험으로 갖는 감수성이 있을 거다. 우리가 혁명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운동했다면 젊은 세대는 인권을 넘어 생명권에 대한 감수성이 높다. 그런 맥락에서 배상이든 사과든 그들의 언어로 풀어나가는 장이 끊임없이 열려야 한다.

2000년 베트남전 진실위원회를 만들 때는 한국 정부에 명확한 요구가 있었다. 진상 규명과 공식 사과 요구가 있었다. 3년 정도 선명하게 요구했지만 한동안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베트남과 한국이 과거사를 해결하려면 베트남도 그들 나름의 정치투쟁 힘으로 풀어가야 한다. 한국에서 제도적·법적 배상이 된다고 해도,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해도 진정한 해결이 아닐 수 있다. 궁극적인 해결은 베트남전쟁을 역사 속에 남겨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 반성하는 거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해결이 될 거다.

그래서 전승이 중요하다. 베트남전쟁은 우리가 하지 않으면 모르는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 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전승할 건지, 기억의 다리를 어떻게 놓아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10월14일 부산에서 참전 군인에 대한 사진 전시회가 있었다. 2015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사진전을 열었던 이재갑 작가가 참전 군인들을 찍은 거다. 전시회에 갔더니 누군가 내게 말했다. “고생했다.”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없었으면 이 전시회도 없었을 거다.” 그 말이 고마웠다. 저마다 다른 영역에서 저마다 다른 일을 하며 베트남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다. 참전 군인을 인터뷰하고 사진 찍고 청소년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베트남전쟁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이미 베트남전쟁 이야기는 세대를 건너 전승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베평화재단 후원 계좌 우리은행 1005-603-308131
문의 02-2295-2016
진행·정리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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