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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달인의 역공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첫 공판에서 법관 100여 명 증인 신청

자필로 쓴 진술서 읽으며 검찰 맹비난… 검찰 “혐의 인정한 셈”
등록 2019-03-16 14:39 수정 2020-05-03 04:29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3월11일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3월11일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 농단의 핵심 인물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법원행정처에서 처음 맡은 직책은 송무심의관이다. 송무심의관은 법원의 본업인 재판과 관련된 각종 업무를 챙기는 자리다. 영장 심사부터 화의 제도까지 민형사 소송과 관련된 모든 일을 챙긴다. 따라서 송무심의관에는 일선 법원 판사들 가운데 재판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이 발탁된다. 이들은 송무심의관을 지내고 나면 재판 업무에 더욱 노련해진다.

임 전 차장이 3월11일 첫 공판에서 무려 100여 명의 동료 법관들을 증인으로 신청한 것은 그의 이런 경력을 고려하면 아주 예상 밖의 일은 아니다. 재판 전략에 밝은 그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카드였다. 판사들 사이에선 사법 농단 수사 초기에 이미 우려했던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였다. 검찰이 작성한 진술조서에 ‘부동의’하면 검찰은 이미 조사했던 참고인들을 다시 법정에 증인으로 불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임 전 차장의 동료, 후배 법관들은 그와 법정에서 대질신문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맞는다. 한때 한솥밥을 먹었던 이들이 증인과 피고인으로 나뉘어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는 모습은 법원이 가장 피하고 싶은 장면이다.

무더기 증인 신청이 노리는 것

임 전 차장은 지난해 11월 구속 기소된 뒤 1심 구속재판 기간(6개월) 중 무려 4개월을 공판준비절차 공방으로 보냈다. 검찰에 따르면 그는 네 차례 진행된 공판준비절차에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 등 7명만 증인으로 부르겠다고 했다. 다른 참고인들의 진술조서는 증거로 제출되는 것에 동의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검찰은 임 전 차장이 애초 ‘약속’을 깨고 재판 지연 전략을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 증인 100여 명을 신문할 경우 두 달밖에 남지 않은 1차 구속기간 안에 재판을 끝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임 전 차장은 구속기간 만료로 풀려나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불구속 재판과 구속 재판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재판부가 구속기간 안에 재판을 끝내야 한다는 부담이 없기 때문에 재판이 길어지고, 그만큼 피고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여지가 커진다.

물론 구속기간이 지나도 재판부가 구속을 연장할 수 있다. 6개월이 지난 뒤 혐의를 추가해 구속영장을 발부하면 된다. 임 전 차장의 경우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이 기소될 때 추가 기소된 혐의가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앞으로 두 차례 더 구속기간이 연장될 수 있다. 하지만 재판부가 두 차례나 구속기간을 연장하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사법 농단 수사에 대한 법원 내부의 부정적 기류를 고려하면 재판부가 선뜻 추가 영장을 발부할지 장담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임 전 차장의 무더기 증인 신청은 스스로 절묘한 재판 전략이라 자부할 만하다.

임 전 차장은 과거 검찰과의 일전에서 승리한 기쁨을 맛본 경험이 있다. 그가 송무심의관으로 발탁된 1997년은 법원과 검찰이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 제도 도입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인 때였다. 영장실질심사는 자유권적 기본권의 핵심인 신체의 자유와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하는 제도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제도였다. 한국도 민주화와 함께 1989년부터 도입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검찰의 강한 반대로 고비를 넘지 못했다. 검찰은 수사의 효율성을 해치고 법원 만능주의가 팽배해질 것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속내는 검찰의 힘이 약해지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치권을 중심으로 도입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고, 결국 1995년 12월29일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1997년 1월1일부터 영장실질심사가 시행됐다.

법원과 검찰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대표적인 게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구인된 피의자를 영장 발부 전까지 구치소에 구금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검찰이 거부한 사건이다. 검찰은 피의자에 대한 인신 구금은 법적으로 검사의 청구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피의자를 법원에 방치했다. 이 때문에 피의자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전 법원에서 도주하는 일이 생겼다. 법원과 검찰은 서로 ‘네 탓 공방’을 벌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검찰은 영장이 부당하게 기각된 사례라며 영장실질심사 결과를 분석한 자료를 만들어 언론에 흘렸다. 그러자 대법원 공보관이 검찰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편지 형식의 글을 출입기자들에게 돌렸다. 두 기관의 신경전은 이후에도 계속됐지만, 결국 법원이 마지막에 웃었다. 영장실질심사제도가 시행되기 전인 1996년 92.6%이던 영장 발부율이 1997년에는 82.2%로 줄었다. 검찰의 방해에도 영장실질심사제도가 도입 취지에 맞게 안착한 것이다. 당시 검찰과의 일전에서 이론적 ‘무기’를 만들어낸 곳이 바로 법원행정처 송무국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송무심의관 임종헌’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가운데)과 사법 농단 수사팀 검사들이 2월11일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왼쪽 사진). 사법 농단 재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법 청사. 한겨레 박종식 기자, 이정우 선임기자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가운데)과 사법 농단 수사팀 검사들이 2월11일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왼쪽 사진). 사법 농단 재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법 청사. 한겨레 박종식 기자, 이정우 선임기자

‘마타 하리’ 임종헌의 활약

임 전 차장은 법원 안에서 ‘마타 하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마타 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스파이로 활동한 여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도)맡아 하리’라는 우스갯소리다. 그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뿐만 아니라 일 처리도 깔끔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그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차장으로 무려 5년 가까이 데리고 있었던 것은 이런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임 전 차장은 자신의 ‘진가’를 알아준 양 전 대법원장에게 충성을 다했다. 이런 ‘상명하복’ 관계는 사법 농단 재판에서 두 사람을 한배를 탄 운명으로 묶어버렸다.

이런 이유로 검찰은 임 전 차장의 ‘재판지연술’을 양 전 대법원장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한다. 2월 구속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의 공판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보조를 맞춰가겠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임 전 차장이 먼저 재판받을 경우 불리하다고 판단해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에 묻어가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법원 내부의 여론이 바뀔 가능성도 있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법조인은 “검찰 수사 때는 양 전 대법원장 등에게 불리한 내용이 일방적으로 보도됐지만, 법정에서는 검찰과 피고인이 대등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기 때문에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임 전 차장은 첫 공판에서 “공소장은 검찰발 미세먼지에 반사돼 형성된 신기루” 등의 표현을 써가며 검찰 수사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혐의가 검찰이 만든 ‘가공의 프레임’이고, ‘양승태 사법부가 적폐로 치부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0분 동안 진행된 그의 모두 진술은 검찰을 공격하는 데 집중됐다. “수개월간의 수사 과정에서 침소봉대됐지만 빗발치는 여론의 십자포화 속에서 변명 한마디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야 이 공개법정에서 과연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범죄행위가 되는지를 말씀드릴 수 있게 됐다.” 그의 손에 들린 A4용지를 빼곡히 채운 글씨가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 실려 법정을 가득 채웠다.

가공의 프레임 vs 범죄 자백

하지만 검찰은 그의 진술이 범죄를 자백한 것이라고 깎아내리는 분위기다. 그의 발언 가운데 “사법부가 국가기관과 관계를 단절하며 유아독존할 수는 없는 게 현실” “법원행정처는 주요 재판에 대해 다양한 행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법원행정처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다”는 등의 말은 스스로 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사법부 예산, 인사를 다루는 사법행정과 재판의 내용, 절차, 결과를 바꾸려는 재판 개입은 엄연히 다르다. 강제징용 소송처럼 이미 한 차례 내려진 대법 판결을 뒤집으려고 무려 5년 동안 재상고심을 지연시킨 것을 정당한 사법행정이라고 한다면 그런 법원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법조계 일각에선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사법 농단 사건의 핵심 피고인들에 대한 형량을 결정할 기준이 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에 대한 대법원 최종 판단이 임 전 차장과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직권남용 혐의 판단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사법 농단 사건에서 재판 거래 혐의는 입증하기 어렵고 판사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만 다투게 될 것이라는 전제에서 나오는 분석이다. 하지만 검찰은 양승태 사법부가 강제징용 재판뿐 아니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처분 사건, 통합진보당 재산 가압류 재판 등에 개입한 혐의를 입증하는 데 자신감을 보인다. 검찰 관계자는 “사법 농단 사건 피고인들이 무죄판결을 받게 되면 수사팀이 손해배상 소송 등으로 역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유죄 입증이 확실한 혐의만 기소했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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