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스포츠 가부장의 몰락

맞은 대로 때렸다는 전명규의 자기고백…

폭력적 가족 서사에 기댄 한국 스포츠
등록 2019-01-26 15:23 수정 2020-05-03 04:29
지난 1월21일 전명규 한국체육대 교수는 기자회견을 열어 조재범 성폭력 의혹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지난 1월21일 전명규 한국체육대 교수는 기자회견을 열어 조재범 성폭력 의혹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자기가 힘이 빠져 더 이상 때릴 수 없을 때까지 때렸다. 나는 오늘이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샌드백처럼 묵묵히 두들겨 맞았다. 감정을 드러내서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스케이트 유망주인 이 소년은 ‘묵묵히 두들겨’ 맞았다. 훗날 그 참담한 기억을 기록했다. 책의 제목은 . 저자는? 전명규(전 빙상연맹 부회장). 그렇다. 바로 그 전명규다. 여러 증언을 보면 조재범 전 코치의 폭력과 성폭력 사건의 배후로 지목받고 있는 막강 권력자 전명규, 그 역시 이렇게 폭력 문화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이 인용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맨 마지막, 그러니까 “감정을 드러내서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는 것이다. 무슨 뜻일까. 그때의 지도자가 감정을 드러내면서 폭력을 가했기 때문에 지금도 증오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이유로든 때릴 수도 있는데 철저히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뜻일까. 아무래도 후자다. 이어지는 대목이 그 증거다.

광고

“나도 선수촌에 있을 때 경우에 따라서 체벌을 했다. (중략) 체벌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체벌을 당해도 믿음이 있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음만 있으면, 죽이든 살리든 난 저 사람만 따라가면 된다는 믿음만 있다면 그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맞은 대로 때린다

방금 인용한 문장에 한국형 스포츠의 비참한 폭력사가 함축돼 있다. ‘죽이든 살리든 난 저 사람만 따라가면 된다는 믿음만 있다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그 ‘나머지’는 무엇일까.

먼저, 폭력 이후 사태 수습일 것이다. 얻어맞은 선수가 일시적으로 이탈한다. 그러나 몇 시간 뒤 훈련소로, 합숙소로, 선수촌으로 돌아온다. 공포를 피해 잠시 이탈했으나 갈 곳이 없다. 친구나 가족에게 토로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운동판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친구도 운동을 했을 것이고, 결국 눈물로 다시 돌아가라고 호소할 것이다. 가족은 굴욕감을 견디며 감독에게 사과할 것이다. 소속 협회나 연맹에 알려도 수십 년 동안 묵살당한다. 오죽하면 그랬겠느냐는 말을 듣기 쉽다.

왜? 전명규 자신이 분명하게 써놓지 않았는가. ‘죽이든 살리든 저 사람만 따라가라’고 말이다. 조재범 가해 사건과 연관된 녹취록에서 전명규는 피해자들을 질책한다. “(조재범이) 구속이 됐다. 그럼 이제 그만해야지. 너희가 그러면 이제 거꾸로 가해자야!”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얼음판에서 너희가 어떻게 살 거냐.” 문맥만으로도 이것은 협박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면전에서, 직접 듣는 사람에게 이 말은 무엇이겠는가. 이를 우리는 폭력이라고 한다.

광고

이 폭력은, 물론 당연히 그 행위자는 전명규나 조재범 같은 끔찍한 공포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한국형 스포츠의 구조와 역사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흔히 거론된 대로 ‘국위선양, 승리지상주의, 엘리트 체육 중심’이 그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를 압축해 일단 ‘국가주의’라고 이르겠다.

이 국가주의는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같은 구호로 머무는 게 아니라, 견고한 체계와 시스템과 서열을 낳는다. 대한체육회라는 괴물 조직, 각급 협회나 연맹의 수직 서열 구조, 학부모와 일선 지도자를 ‘승리와 보상’이라는 단 하나의 동아줄에 옭아매는 각종 대회,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합숙소와 전지훈련과 선수촌 등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이 지배 구조와 통제 장치에 ‘사회화’ 과정은 끼어들 여지가 없고 동시대의 일반적 관계 맺기나 문화 감수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인권 감수성’ 같은 용어는 아예 논외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가족주의’다. 가족의 이해와 정서를 모든 사회적 의제의 중심에 놓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행위에 국가와 가족밖에 없다. 국가는 확대된 가족이고 가족은 일상 속의 국가다. 스포츠의 ‘유사 가족주의’, 즉 스포츠 집단이 가족 정서로 형성되고, 이 ‘가족 같은 관계’가 실제 가족보다 더 강한 내적 응집력을 갖는다. 흔히 스포츠계에서 ‘아버지를 잘 만나야 한다’고들 말하는데, 여기서 아버지는 생물학적 부친이 아니라 해당 종목의 ‘감독’이다. 그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맏형 리더십? 유사가족의 폭력적인 문법

‘부드러운 카리스마’니 ‘맏형 리더십’ 같은 표현은 우리 스포츠가 가족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내러티브를 비집고 들어가보면 ‘카리스마’는 금세 폭군이 되고 ‘맏형’은 폭행의 행위자가 된다. 이때 폭군은, 자신이 ‘직접’ 폭력을 쓰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수사와 처벌’의 목록에서 벗어나려 한다. 실은 그는 기침 소리만으로도 그날 밤 합숙소를 공포의 소굴로 만들 수 있는 ‘국가이며 아버지’인 절대 권력자다.

광고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에 보면 ‘스포츠 분야 폭력의 특성’은 일차적으로 지도자와 선수 또는 선배와 후배 간의 위계적인 구조를 통해 선수들에 대한 권한과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이 양상은 피해자에게 내면화되고 학습되어 피해자가 머지않아 가해자가 되는 재생산 구조를 갖는다. 다른 분야와 달리 스포츠는 바깥 사회와 시·공간적으로 통제된 곳에 모여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장소 안에서 일상적으로 가해진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폭력의 일상성에서는, 단지 물리적인 폭행뿐만 아니라 경기 출전 여부, 집단으로부터 개별 선수 강제 분리, 이름 부르지 않는 등의 정서적 고립, 코치나 선배 선수를 통해 ‘너 하나 때문에 팀(곧 국가, 가족, 조직) 분위기가 망쳐졌다’는 식의 책임 전가 등이 다 폭력이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 폭력은 감독 정도가 되어야 가능하다. 폭행 가해자인 조재범 코치가 쓴 옥중 편지를 보면, 전명규는 바로 이 폭력 구조의 전형을 보여준다.

대통령과 총리가 강하게 지시하고 관계부처 장차관들, 국가인권위원장 등이 모두 나설 만큼 지금 한국 스포츠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대한체육회도 개혁해야 하고 상급 학교 진학에 연관된 입시 비리나 소년체전, 전국체전도 개선해야 한다.

폭력의 효과를 본 사람들을 처벌하라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폭력 행위자들을 엄벌하고 그 사슬을 끊어야 한다. 이게 급선무다. 왜 그런가. 전명규가 자신의 책에서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앞의 책에서 전명규는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매우 주관적이며 악마적인 근거를 나열한 뒤 이렇게 썼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마무리 역시 중요하다. 잘 다독거리고 뒤처리를 잘하면 몇 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동안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 된다. 이기흥(대한체육회 회장)이나 전명규, 또 그 밖의 수많은 전명규가 ‘뒤처리를 잘해서 몇 배의 효과’를 보는 것만큼은 이제 끝내야 한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2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