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대표적 대형 교회인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가 ‘세속 법원’의 판단으로 담임목사 직무를 내려놔야 할 처지에 놓였다. 미국장로교단(PCA) 출신으로 알려진 오 목사는 2003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예장합동) 동서울노회로부터 사랑의교회 위임목사(당회장 담임목사)로 인정받은 이래 끊임없이 ‘목사 자격 시비’의 대상이 돼왔다. 예장합동 목사가 되려면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노회고시에 합격해야 한다. 다른 교단과 외국 목사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편목 편입한 뒤 강도사 고시에 합격해야 한다. 오 목사 쪽은 ‘편목 편입’한 뒤 강도사 고시에 합격했다고 주장했으나, 반대파 교인들은 ‘일반 편입’을 한 뒤 노회고시를 치르지 않았다고 맞섰다. 결국 교인 9명은 2013년 목사 자격이 없는 오 목사를 교회 담임목사로 위임한 예장합동 동서울노회의 결의는 무효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은 오 목사의 목사 자격을 인정했지만 지난 4월 대법원이 파기환송했고, 서울고법 민사37부(부장 권순형)가 12월5일 반대파 교인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사랑의교회 쪽은 대법원 상고 방침을 밝혔지만,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오 목사는 담임목회직을 잃게 된다. 사랑의교회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사실상 무한대로 누리면서도 자정 능력은 상실한 교계에 미칠 파장이 클 전망이다.
사실 오 목사 부임 이후 사랑의교회와 관련된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굵직한 것만 보더라도 오 목사의 학력 논란, 박사 학위 취득 의혹, 논문 표절 등이 있었다. 교회 건축 허가와 관련한 특혜 건도 있었다. 지하철역 입구가 사랑의교회 예배당과 연결된 것이다. 공공도로의 사적 점유라는 비판을 받던 이 사안에 결국 올해 초 도로점용허가 취소 판결이 내려졌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못 부르는 판결”미시적으로는 여러 논란을 만들어온 한 목회자와, 서울 강남이라는 한국 사회의 특수한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를 다수 보유한 한 대형 교회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너머를 보자면, 수년간 이어진 사랑의교회의 분란들은 예외적인 것 같으나 한국 교회의 현실을 대표하는 일반적인 상황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사회현상이라 해도 될 정도로 중·대형 교회들에서 유사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여태 문제가 되고 있는 명성교회 세습 논란도 그렇다. 엄청난 종교적·사회적 권력이 되어버린 초대형 교회의 담임목사직에 ‘아들’이라는 이유로 뽑힌 불공정 경쟁의 문제이다. 서울의 한 다른 대형 교회에서 여검사 성추행 논란을 빚었던 전직 검사가 세례를 받고 신앙 간증을 한 사건은 또 어떤가.
각각 별개로 보이는 세 가지 사례에서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법원의 판결이나 교회법의 판단, 혹은 사회 여론에 대형 교회가 보였던 ‘반응’이다. 사랑의교회 직무정지 판결에 대해 그 교회의 어떤 부목사는 오 목사를 영적 아버지로 비유하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명성교회 세습 관련 논란에서도 교회에서는 ‘내부 구성원들 다수가 원해서 결정한 사항을 외부에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태도다. 또 앞서 언급한 검사의 간증 자리에 있던 이들은 사회적 논란과 관계없이 그의 회심과 세례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절대다수는 자신들의 선택과 행위에 대해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자연히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불온한 세력이 교회를 흔드는 것’으로 보고 더욱 강력한 내부 결속력을 요구한다. 얼마 전에도 사랑의교회 창립 40주년 ‘새생명축제’에서 2810명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단했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대형 교회 내에 ‘회심’과 ‘구원’의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이면에는 여전히 신의 선택과 가호를 받는 조직을 비판하는 것은 신에 대한 비판과 동일하다는 것이 내포된다. 내부에서는 집단적으로 자기 확신을 강화하고 결속을 다지는 효과가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종교가 철저히 사적 문제로 환원됐다는 것이다. 종교는 구원이라는 명제 아래 개인적인 것으로 사사화됐다. 공공도로를 교회 예배당으로 점유하듯, 교회는 사사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로 전락했다. 사적 인식에 기반한 연대감은 교회에 공적 책임감을 요구하는 외부의 비판에 사사화된 형태로 대응한다. 자신들과 교회의 성취를 신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내부 논리로 집단성이 강화된다. 이것이 ‘대형 교회 현상’의 핵심이다.
교회 성취를 신의 축복과 동일시이 인식은 결국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중세 말 유럽에서 종교 타락의 상징으로 알려진 면죄부는 대중화되기까지 정교한 논리가 만들어졌다. 면죄부는 신을 대리해 죄 용서를 선포하는 ‘사제의 권위’와, 비범한 삶을 통해 성인이 된 이들이 성취한 잉여의 은총을 얻을 수 있다는 ‘성인과의 교통’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채찍질해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참회의 노력’이 조건이다.
대형 교회 현상은 21세기의 면죄부다. 설교단에서 진리를 선포하고 죄 용서를 설교하는 설교자의 권위와 그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이 땅에서 이미 견줄 수 없는 사회적·종교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성도들의 모범과, 그 모범을 따라 더 신의 은총을 얻으려 애쓰는 대중의 욕망이 합쳐진 것이 대형 교회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대형 교회는 중세 면죄부의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대형 교회 현상이 낳은 이 집단 자의식의 과잉은 외부의 적을 상정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사회가 마주한 갈등 문제에 극도로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을 주로 강단에 초청하거나, 사회의 상식에서 수용되기 어려운 창조과학 등을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지원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과학과 종교와 관련된 담론이건, 이슬람이나 동성애 같은 사회 현안에 대한 담론에서 극도의 보수적 시각을 견지하며 스스로의 존재 목적을 세속화되는 사회의 타락을 막아서는 파수꾼으로 규정한다. 그 때문에 사랑의교회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회심의 소식이 역설적으로 공포스러울 수 있는 이유다.
이 문제가 그저 한 대형 교회, 혹은 몇몇 대형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라면 그 뿌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기독교 역사가 2천 년이라는 점에서는 낯설겠지만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교회는 근대성의 산물이다. 근대성의 두드러진 특징은 규정하기와 규율과 효율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근대성의 특징으로 상정했던 학교, 병원, 군대, 감옥 등은 가장 효율적으로 삶의 지향을 규정하고 규율하는 곳이다.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원형감옥)이 그 정점이다. 원형감옥의 중간에 있는 감시소에서 간수 한 명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죄수를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다.
실제 교회는 이 모든 특성이 응집된 곳이다. 교회에서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삶과 죽음이란,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에 명확하게 규정해준다. 또한 삶 속에서 규정된 해답을 성취하기 위해 따라야 할 규율도 제시한다. 새벽기도, 예배, 찬양, 제자 훈련이라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그 결과 바람직한 신자의 삶이란 형태가 생겨났다. 오늘날 대형 교회의 예배당은 담임목사가 모든 예배 참석자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점에서 판옵티콘의 구조와 놀랄 만큼 닮았다. 이 외형의 구조가 담고 있는 가치가 무엇일까? 설교단에서 온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갖춘 설교자의 말과 행동, 사고에 동화되는 것이다. 이 현실에서 구성원은 자신의 삶과 신앙이 주체성을 잃고 객체가 되어버린다. 점차 신의 선택을 받은 교회라는 신국 안에서 세속의 논리와 무관한 삶을 산다. 사회법의 논란을 딛고 교회를 건축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라고 예배당에 써 붙여놓을 수 있는 무모함의 원천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근대 원형감옥 빼닮은 대형 교회500년 전 가톨릭 교회에 대항해 발생한 종교개혁을 일컬어 ‘책의 종교’라고 한다. 사제라는 매개를 통해 신의 은총을 얻는다고 설파하던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항해 스스로 성서를 읽는 것을 통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근대적 개인의 발견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개신교회는 스스로 읽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주체적으로 읽기보다 설교단에서 진리라고 설파되는 가치를 수동적으로 듣고 따르는 것이 미덕이 되어 있다.
그 결과 시대와 사회를 읽어나가는 능력을 상실한 사회적 문맹이 되었다. 사회의 외침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 그 부작용이 극상의 종교적 언어, 신적 어휘들이 교회에서 여과 없이 남발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놓치는 한 가지는 역사적으로 교회가 사회와의 상호작용에 실패했을 때 생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치의 광기가 휘몰아쳤을 때 히틀러 암살을 모의하다 체포돼 처형당한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교회란 교회 밖의 타자를 지향하는 수도원 공동체’라고 일갈했다.
‘책의 종교’로 돌아가자교회의 진정성을 나타내는 지표는 교회가 교회 밖의 타자를 지향하는지,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지다. 변화하는 시대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따라가지 못할 때 선택지는 편안하게 모든 것을 부정하고 반동적이 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한 뒤 남은 선택지는 타자에 대한 분별 없는 배제와 혐오의 발현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이것이 오늘 대형 교회 현상의 맨얼굴이다.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듣는 종교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으로 읽는 종교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그 내부의 구성원들이 이러한 인식과 성찰을 할 수 있을까? 그 길만이 교회라는 조직이 21세기 문맥에 부합하게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일 것이다. 사회 속에서 사회와 호흡하기 위해 분투하는 많은 교회의 노력까지 도매금으로 매도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형 교회들의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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