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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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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앞에 멈춰선 형제복지원 31년

2012년부터 시작된 형제복지원 공론화

특별법 제정 진도 못 내는 국회 앞 피해자들의 절망
등록 2018-09-11 13:32 수정 2020-05-03 04:29
9월3일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예술인 행동’ 집회가 열렸다. 박승화 기자

9월3일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예술인 행동’ 집회가 열렸다. 박승화 기자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추위에 떨었던 것은 너도, 나도 아닌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했는데, 왜 우리에서 우리는 늘 배제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중략) 이제 그만 법 좀 통과시켜주십시오!”

서울의 낮 최고기온이 34도를 기록한 7월26일, 국회 앞 노숙농성 262일째였던 그날,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생존자 한종선(42)씨의 페이스북 글엔 깊은 원망이 새겨졌다. 형제복지원 특별법(내무부 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 규명 법률안) 제정을 위해 농성 중인 생존자를, 사계절이 지나도록 아스팔트 위에 방치하고 있는 ‘국회의원님’들을 향한 절규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다</font></font>

오만 나랏일을 살피는 국회를 설득하기에 9개월은 너무 짧을까? 그렇다면 6년은 어떨까? 한씨가 2012년 국회 앞 1인시위를 시작하고 공저 를 출판하면서 ‘묻혔던’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시’ 환기한 지 벌써 6년이다.

한씨는 9월5일 오전 인터뷰에서 “1인시위는 제재를 안 당한다는 말만 믿고 ‘고스톱 깔판 담요’ 한 장과 피켓만 들고 상경해” 진상규명 촉구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 뒤로 2013년 대책위 구성, 2014년 피해 생존자 모임 결성과 거리 서명, 2015년 삭발·연좌농성·단식농성, 2017년 국토대장정, 2018년 문화예술제… 해볼 수 있는 건 다 했다. 키가 173㎝인 한씨와 또 다른 생존자 최승우(49)씨 두 사람이 나란히 누우면 꽉 들어차는 천막 안에서 “더 이상 사탕발림에 안 넘어가고, 특별법 제정 때까지 끝낼 생각이 없는” 점거농성을 시작한 지도 9월6일로 303일을 넘겼다. 2016년에만 유일하게 “촛불을 들려고, 적폐 청산해달라고” 특별법 제정 요구 활동을 중단했다.

2013년 7월11일 개설한 한씨의 페이스북은 5년 치 아우성을 담은 일기이자 대하 보고서다. 스스로 “기계치”라고 말하는 그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려고 선택한 수단이다. “아무리 억울해도 법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따르려, 국가폭력에 짓밟힌 시민이 비폭력으로 항변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몸부림을 쳐봤고 그 몸부림은 글·사진·영상 기록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개씩, 차곡차곡 쌓아올린 아우성의 흔적이 먼 곳에서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양심을 격하게 뒤흔든다. 그러나 지근거리에서 직접 목도한 국회의원들에게는 아직 들리지 않는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이다. 19대 국회에서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특별법은 2년간 계류되다가 자동 폐기됐고, 진 의원이 20대 국회에서 2016년 11월 다시 발의한 법안도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잠자고 있다. 한씨는 “형제복지원 사건 특별법이 어렵다면 국회에 계류 중인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안’이라도 신속히 처리되는 걸 환영한다”고 하지만 이 또한 기약이 없다.

4년 임기 국회, 법안 발의도 못 되고 사라지는 사건·사고가 부지기수인 그곳, 6년 역시 너무 짧은 걸까? 그렇다면 31년은 어떨까?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건 1987년이다. 대법원은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이 ‘내무부 훈령 제410호’에 의거해 사람들을 철문에 가둔 특수감금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정부는 서둘러 훈령을 폐지한 뒤 그대로 수용자들을 풀어줬다. 생존자들은 진상 규명을 차단하려는 꼼수였다고 해석한다. 강산이 세 번 바뀔 정도로 늦었지만, 생존자들이 이제라도 특별법을 제정해 진상 규명을 해달라고 촉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한국의 아우슈비츠’ 부정하는 이 없는데 </font></font>
9월5일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씨가 인터뷰에 앞서 국회 천막농성장 앞에 서있다. 전정윤 기자

9월5일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씨가 인터뷰에 앞서 국회 천막농성장 앞에 서있다. 전정윤 기자

연표가 긴 사건이기는 하나, ‘한 줌’ 생존자들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기엔 공론화가 부족한 걸까? 형제복지원을 검색하면 셀 수 없이 많은 기사가 쏟아진다. 피해 생존자들이 겪은 고통을 굳이 다시 기사로 쓸 필요가 없을 정도다. 진보·보수, 신문·방송 가릴 것 없이 이구동성이다. 독자가, 시청자가 읽고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잔혹한 국가폭력을 고발한 심층기획 기사도 숱하다. 공론장에선 이미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넉넉히 인정된 과거사다. 언론과 여론의 벽을 넘은 지는 오래다. 다만 국회 문턱 앞에서 그 한 걸음을 못 떼고 최소 6년째, 제대로 따지자면 31년째 분투 중인 셈이다.

국회 앞 노숙농성 134일째였던 지난 3월20일, 한씨가 페이스북에 5만원권 지폐 사진을 올렸다. “바람은 세게 불고 체감상으론 많이 추운” 초봄, “바람에 날려 제 옆으로 떨어진 5만원권 한 장을 주웠다”며 주인이 글을 읽거든 찾아가라는 공지였다.

시민 한종선, 국가의 원죄는 한씨 같은 이들을 ‘부랑아’로 분류해 사회에서 배제하려던 것이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사회정화’를 이유로 어린이를 포함해 무고한 시민을 격리·감금했고, 짐승에게도 해서는 안 될 살인·폭행·성폭행이 저질러졌다. 확인된 사망자만 513명에 이른다. 국가폭력이 떠들썩하게 세상에 드러났다 묻히기를 25년, 그리고 다시 드러난 지 6년. 그사이 “짐승이 아닌 국민”으로 함께 촛불을 들고도 또다시 배제되고 잊힌 피해 생존자의 인내심은 바닥을 향해 가라앉고 있다.

천막농성장 안에서 물끄러미 바깥세상 고층 건물을 바라보던 한씨가 말했다. “인권단체에 호소했지만, 전담자를 배치하기엔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고… 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진 저더러 (진상 규명 활동을) 맡아달라고…. 피해 생존자 모임으로는 5년, (1인시위 시작 전) 개인 활동으론 7년째다. (특별법 제정을 미루는 국회는) 누구 하나 죽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가야 할 길 바라만 본다고 가지는 것 아니고, 어두운 터널 안 빛이 보인다고 해서 터널을 벗어난 것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 끝도 없어 보이는 길 위에 진작에 섰고, 걷고 또 걸으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4월10일 페이스북) 한씨는 이렇게 자신을 다독이고 있지만, 그의 기대와 좌절과 분노는 점점 더 커지는 나선형을 그리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우리는 왜 이대로지 </font></font>

2013년 11월7일 특별법 제정 법안이 처음 발의됐을 때, 그는 “26년 만에 국회에서 형제복지원 이야기가 시작되다…”라며 조심스레 진상 규명 기대를 내비쳤다. 애초 바람과 달리 법안이 계류되던 2014년 3월7일,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사망자 황유미씨 7주기 추모식에 다녀온 뒤엔 “언제나 그 국민들 중 최소의 국민들이 그들의 논리에 이용되고 배제되어 이 사회에 희생을 강요당하고 사라져간다”는 섭섭함을 내비쳤다.

함께 촛불을 들었고, 적폐 청산을 약속한 여당이었기에 새 정부 출범 뒤 기대는 더 부풀었고 좌절은 그만큼 깊어지고 있다. 한씨는 인터뷰에서 소외감을 드러냈다. “변화는 여러 열망이 모인 결과물이지만 언제나 결과물을 독차지하는 사람들이 있고 언제나 배제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바뀔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우리를 잊지는 말아야지, 가끔은 우리를 인지해줘야지… 잊었다가 또 자기들 필요할 때만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생존자들은, 믿었던 사람들이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걸 보면서 흐뭇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심층 보도한 기자들은 다 큰 상을 받았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꼭 해결하시겠다고 했던 의원님은 장관이 되셨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국가인권위 사무총장이 되셨다. 1987년 신민당 부산형제복지원 진상조사 때 민간인 조사위원으로 참여했고, 생존자 국회 증언대회 때 ‘누구보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잘 안다’고 하셨던 의원님은 대통령이 되셨다….” 한씨가 차마 끝맺지 못한 말은 함께 농성 중인 최승우씨가 대신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대로지?”

피해 생존자들은 공권력에 의해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고, 교회 장로를 자처하는 원장에게 인권유린을 당했다. 공권력도 종교도 트라우마로 남은 생존자들이 지금 유일하게 쳐다보는 곳이 국회다.

대검찰청 검찰개혁위원회가 형제복지원 사건 비상상고 권고 여부 결정에 앞서 ‘마지막 회의’를 열기 전날인 9월4일, 한씨의 페이스북에선 그런 절박함이 빚어낸 분노가 거칠게 묻어났다. “노숙 농성 302일차! 트라우마는 나를 침식시키고, 듣고, 보고, 입으로 말해서 정책이든 법이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하는 국회의원들은 어제도 없었고, 그제도 없었고, 7년째 귀로 들어도 들은 척 않고, 보고도 안 본 척, 말할 수 있는 입이 있음에도 말하지 않는 그들이야말로 나를 더 빨리 침식시키는 주범이 아닐까!”

그의 페이스북엔 “갑자기 찾아오는 알 수 없는 불안 증세”(8월8일)를 호소하는 글이 유난히 많다. 형제복지원 시절 “괜히 불안하다 싶으면 며칠 뒤 엄청난 구타를 당하곤 했던 트라우마”가 “불행을 예측하는 능력”처럼 남았다고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기어서라도 국회 문턱 넘겠다</font></font>

그러나 그는 생존자들을 대표해 침식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어른’이 되려고 남은 힘을 다 쏟고 있다. 한씨는 제8회 진실의힘 인권상을 받은 다음날인 6월27일,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도움을 당부했다. “인권상은 제게 또다시 날지 못하면 뛰라고 합니다, 뛰지 못하면 걸으라고 합니다. 걷는 것 또한 안 되면 기어서라도 진상 규명하라는 책임감을 지워주셨습니다. 그 책임감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제가 움직이지 못한다면 옆에서 부축 좀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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