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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 정보가 영업비밀인가

산업부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영업비밀 인정…

작업환경측정 무용하게 만들며 반도체산업 안전 위협할 것
등록 2018-05-03 06:41 수정 2020-05-03 04:28
산업통상자원부가 4월18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측정 결과 보고서(작업환경보고서)에 ‘국가 핵심 기술’이 포함돼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번 결정으로 산업재해 피해자 등의 작업환경보고서 공개 요구는 더욱 어려워지게 됐다. 산업부 결정의 문제점에 대해 반도체 산업보건의 권위자인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글을 보내왔다. 백 교수는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하는 유해 화학물질의 독성 정보 자체가 영업비밀이 될 수는 없다. 이를 계속 영업비밀을 빌미로 감춰 사용하려 한다면, 그 행위는 범죄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_편집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반도체 공정의 직업병 논란을 세상에 처음 알린 고 황유미씨의 11주기인 3월6일 오후, 고 황유미씨와 삼성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행진하고 있다. 맨 앞은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한겨레 이정아 기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지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반도체 공정의 직업병 논란을 세상에 처음 알린 고 황유미씨의 11주기인 3월6일 오후, 고 황유미씨와 삼성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행진하고 있다. 맨 앞은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한겨레 이정아 기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지면

작업환경측정의 기본 목적은 환경 중 건강 유해 요인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것이 건강에 미치는 약영향의 가능성을 평가하는 데 있다. 작업환경에 존재하는 건강 유해 요인으로 여러 가지가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벤젠 등 발암물질이나 방사선 등의 영향은 비교적 일찍부터 조사됐다.

대부분 물질 측정커녕 파악도 안 돼

화학물질로 인한 건강 위해의 가능성을 평가하려면 해당 화학물질의 내재적 유해성, 즉 ‘독성’과 함께 작업자가 그것에 노출될 가능성인 ‘노출 수준’을 파악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특정 노출 수준에서 화학물질로 인한 독성의 양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추정하게 된다. ‘독성’과 ‘노출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물질의 종류를 검토하고 이런 물질이 사용되는 작업에서 실제 작업자가 노출될 정도가 어떠할지를 평가하는 조사가 수행된다.

이런 작업의 수행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가장 큰 문제는 일부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부 화학제품 성분을 영업기밀로 지정한다는 점이다. 2015년 현재 그 비율이 30%고, 물질별로 보면 약 46%가 영업비밀로 지정돼 있다.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독성을 파악할 때 물질 확인 자체가 안 되면, 작업환경측정을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영업기밀로 지정된 물질이 실제 독성물질이며, 그로 인해 건강상 장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물질을 영업비밀로 지정해 얻는 경제적 이익이 있다 해도 독성 정보 자체를 비밀로 지정할 순 없다. 이런 물질을 계속 영업비밀로 감추며 사용하는 것은 범죄에 지나지 않는다. 건강에 위해를 끼칠 수 있는 화학물질이라면,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절대 영업비밀로 취급해선 안 된다.

지금까지 등록된 물질 가운데 독성이 자세히 조사된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비율은 불과 몇%다. 대부분의 물질이 독성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물질의 독성을 모를 때도 다른 독성시험이나 역학조사 등을 통해 해당 물질로 인한 건강상 영향이 의심된다면, 이런 물질을 영업비밀로 취급해 조사 자체를 막아선 안 된다. 이것이 선진국들의 일반적인 규정이다. 2009년 반도체 사업장에서 이뤄지는 작업환경측정 현황을 검토했을 때, 반도체 사업장에서 사용되는 물질로 파악된 83종 가운데 24종만 측정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중 실제 측정된 물질은 6종에 불과했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물질은 측정은커녕 제대로 평가하기 위한 기본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일상 작업환경측정으론 파악 안 돼

현재 반도체산업에서 독성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되는 작업은 평소 밀폐돼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시설에서 수행하는 일상 작업이 아니다. 설비를 멈추고, 밀폐된 기계 내부를 점검하거나 교체·수리하기 위해 시설을 열어보는 작업을 할 때 노출 위험성이 높아진다. 이런 위험한 작업들은 공정의 연구·개발, 초기 적정 가동 조건의 세팅, 정기 정비, 간헐적인 고장이나 정전 등에 따른 재가동에 수반되는 작업이다. 이는 1년에 한두 번 외부 기관이 방문해 일상적 작업에 대한 측정에선 전혀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부 기관의 측정으로 법적 규정을 충족하는 것만으로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실제 작업환경의 위험을 관리한다고 볼 순 없다. 결국 삼성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사건 같은 문제의 빌미를 제공한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작업환경의 위험을 제대로 관리하는 방안을 고민하지 않은 채 영업비밀에 기대 작업환경의 위험 자체를 첨단산업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논란으로 전환하려 한다. 이는 현재 제기된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기업의 영업비밀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고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서, 합리적 노력에 의해 비밀로 유지된 생산 방법, 판매 방법, 그밖의 영업활동에 유용한 기술상 혹은 경영상의 정보”(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를 말한다. 그러나 현재 반도체산업에서 무엇이 영업비밀인지는 매우 모호하다.

영업비밀 근거, 반도체산업이 대야

반도체산업에서 쓰는 장비는 반도체 제조업체가 스스로 생산한 것이 아니라 반도체 장비 업체로부터 사오는 것이다. 반도체 장비에 사용되는 원료도 공급업체로부터 구매한다. 반도체 장비와 원료의 구입은 전세계 모든 반도체 제조업체가 공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 장비와 원료를 사서 설치·가동한다는 과정 자체가 영업비밀이 될 수는 없다. 작업환경측정을 위해 장비의 스펙과 원료의 구입처를 굳이 알 필요는 없으며 보고서에도 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료의 주요 구성 성분, 불순물 여부, 장비 운용 방식에 따른 특정 노출 작업의 형태와 빈도 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면 작업환경을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정보가 어떻게 특정 장비와 생산기술에 대한 영업비밀로 이어지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또 구성 성분의 상품명과 그 사용량을 파악하는 것이 어떻게 특정 원료의 구입처 정보, 비밀스러운 노하우와 이어지는지도 불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모두를 영업비밀로 취급한다는 것은 영업비밀의 개념을 한없이 확장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반도체산업의 작업환경측정 결과 보고서의 내용은 장비의 교체나 원료 구입처의 변화와 상관없이 매번 똑같이 작성돼왔다.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돼온 작업환경측정 결과 보고서가 어떻게 영업비밀이 될 수 있는지의 근거를 반도체산업 스스로 밝혀야 한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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