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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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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못해 잠못드는 그대에게

성폭력 피해자 마음 보듬는 미투 운동의 숨은 조력자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원장 인터뷰
등록 2018-04-27 01:23 수정 2020-05-03 04:28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원장은 드러나지 않는 미투의 이면을 대면하고 있는 사람이다. 미투 운동 국면에서 남몰래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한 이들이 안 원장을 찾아 내면의 피해를 회복하고 있다. 안 원장은 미투 운동이 있기 전부터 성폭력 피해자는 물론 성소수자 등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에 노출된 이들이 믿고 찾는 정신과 의사로 이름나 있었다. ‘안주연’이라는 이름보다 팔로우 수만 7만2천여 명에 달하는 파워 트위터리안 ‘미녀정신과의사’로 더 유명한 그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성폭력 피해 우울증, 나약해서가 아냐”</font></font>

미투 운동 이후 이유도 모른 채 불면의 밤을 보내는 뭇 여성에게도 처방전이 필요하다. 미투 운동의 숨은 조력자 안 원장을 찾은 이유다. 4월10일 서울 마포구 마인드맨션의원에서 과 얼굴을 마주한 그는 “미투 운동을 계기로 조직 내에서 성폭력 피해가 합리적으로 처리되면서 빨리 회복되는 내담자들이 있다.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것이 정신적 외상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임상으로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1월29일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있었다. 이후 변화가 관찰되나.

미투 관련 상담이 확실히 많아졌다. 위는 맑지만, 앙금이 가라앉아 있던 흙탕물이 한바탕 요동친 것 같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억지로 묻어뒀던 마음속 분노가 이번 미투 운동 때 깨어났다. 미투 이후 여성들이 모이는 곳마다 다양한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하는 ‘작은 공론화’가 이뤄지고 있다. 이야기할수록 안 당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세상이 이 지경이었나 재확인하면서 환멸을 느끼는 분이 많다.

사회가 미투에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도 충격을 받는다. ‘꽃뱀’이라 의심하고, 진정한 미투와 나쁜 미투를 구분한다. 가해자가 사과를 하는데 피해자가 아니라 국민한테 한다. 권력형 성폭력은 돌림노래처럼 양상이 유사하다. 권력이 있는 남성이 여성을 가해하고, 조직에선 이를 무마하려고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한다. 모든 피해에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다.

기자가 만난 많은 피해자가 대부분 정신과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었다. 성폭력은 ‘영혼의 폭력’이라는 말도 있는데, 성폭력 이후 피해자의 내면에 어떤 일이 벌어지나.

성폭력은 피해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 다룬 것이다. 인격적으로 모멸당한 충격이 크고, 정신적 외상이 생긴다. 사람이 한 시기, 한 순간에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의 양과 질이 있다. 성폭력을 당한 뒤 정신적 충격은 보통 개인이 견딜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선다.

뇌에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라는 부분이 있다.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나오는 곳이다.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나의 내구성을 파괴하는 정도의 스트레스가 일어나면 변연계가 과로하게 된다. 매일 세로토닌 100개를 만드는 공장인데, 어느 날 갑자기 매일 120개씩 주문이 들어오는 거다. 한두 달 잔업해서 주문량을 맞추고 나면 직원들이 다 지쳐 나가떨어진다. 그때부터는 하루에 80개 정도밖에 못 만든다. 20개만큼씩 기분 전환이 안 되니까 그만큼의 우울이 누적된다. 이게 우울증이다. 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은 개인의 내구성이나 정서적 회복탄력성을 능가하기 때문에 자기 의지로 극복하기 어렵다. 기분 저하가 오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우울증에 준하는 급성 스트레스 상황에 빠진다. 식욕 저하나 소화불량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감정 기복도 심해진다. 개인이 나약하거나 저항력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 뼈가 부러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말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말하게”</font></font>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니까 성폭력 피해가 과소평가되는 것 같다.

피해자 역시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 자각하기 힘들다. 멍들고 피가 나고 다리가 부러지면 내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아는데, 정신적 외상은 그렇지가 않다. 한두 달 버텨보다가, 무너진다. 극복할 수 있다, 싸워보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안 되는 걸 나중에 알게 된다. 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은 자기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왜 이제 와서 말하냐’라고 시점을 문제 삼기도 하는데, 자각 증세가 늦게 나타나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다.

사람이 심한 정신적 외상을 받으면 일단 자기 보호를 위해 부정하고 회피하는 게 생존 본능이다. 샤워하고 빨리 잊자,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내가 얼마나 힘든지 나조차 모르기 때문에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일이 늦어진다. 성폭력은 폭력의 문제인데, 성적인 문제로 터부시돼온 것도 피해를 자발적으로 은폐시킨다. 자기도 모르게 죽어가는 수은중독이나 독극물 중독에 비유하고 싶다.

신체적 외상이 없기 때문에 친구나 지인들에게 공감받기도 어렵다. 처음에 피해자를 지지해주던 친구나 지인들도 한두 달 지나면 ‘그 생각만 하지 마’ ‘너도 살아야지’라고 얘기한다. 피해자는 지겨워하는 것 같아서 서운하고, 친구들은 두 달 동안 밥 사주면서 감정노동을 했는데 몰라주니까 또 서운하다.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이런 괴리가 계속 생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친구는 전문가가 아니다. 친구들한테 얘기하면서 풀려고 하다가 싸우고 고립되면 더 힘들다.

성폭력 피해 후유증으로 우울증 말고 다른 증상도 있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큰 위협을 겪은 뒤 생기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성폭력 피해 경험 이후에 생긴다. 강간처럼 실제 생명의 위협을 당한 경우가 아니어도 큰 외상이 남는다. PTSD는 우울증 증상과 유사하지만 여기에 플래시백 증상이 더해진다. 유사한 상황에 놓일 때 과거 피해 경험이 계속 리플레이되는 것이다. 뇌가 충격을 소화하지 못하니 계속 재생한다. 뇌가 이 문제에 집중하다보면 다른 지적 활동이 안 된다. 업무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PTSD가 오면 일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 팔다리가 부러졌는데 일할 수 있나.

지난 2월 프랑스에서는 ‘성폭력 피해여성의 자살 위험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네 배가량 높았다’는 조사 결과( 2018. 2.24, <font color="#C21A1A">프랑스 성폭력 여론조사… 피해여성 44% “자살 생각했다”</font>)가 발표됐다. 자해를 막기 위해 스스로 입원한 피해자를 병원에 찾아가 만난 적도 있다. 성폭력 피해자를 ‘피해 생존자’라고도 일컫는 이유인 듯하다.

우울이 발전하면 ‘터널사고’ 경향이 나타난다. 생각을 다차원적으로 하던 사람도 외곬으로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것을 긴 터널 끝에 점 하나만 보는 것에 비유해 터널사고라고 한다. 마치 선글라스를 낀 것처럼 상황이 실제보다 더 안 좋게 인식된다. 2차 피해가 지속될 때 특히 위험이 가중된다. 상처는 영원하고, 주변은 냉담하고, 일도 못할 것 같다. 내가 노력해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죽는 거밖에 없다. 이직을 해도 되고 몇 년 쉬어도 된다고 주변에서는 합리적으로 생각하지만, 피해자들은 그게 잘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 나아지나.

피해자 입장에서 얘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좋아진다. 사실 친밀한 사람의 아픔을 듣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이야기에 대해서는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덜 물어보거나, 빨리 얘기가 끝나기를 원한다.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고, 반복해서 얘기하고 싶은 건 반복해서 말하게 하고, 자세히 물어봐주고 계속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후련해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font></font>사적이고 수치스러운 일로 치부됐던 여성들의 피해 경험이 공론화되는 것에 남성들이 보이는 태도는 미투 운동 국면에서 흥미로운 대목이다. 한국 남성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자기 연민’ 정서에서 찾는 분석이 있다. 미투 관련 취재 중 한 남성이 ‘왜 나만 갖고 그러냐’고 억울해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여성은 엄마든 여동생이든 아내든 항상 부드럽게 말하고 자기를 위로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의무를 지키지 않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남성들의 ‘선택적 공감능력’이 문제다. 남자들은 공감능력이 약하지 않다. 선택적으로 공감할 뿐이다. 학교와 군대 등 서열 문화를 거치면서 상사의 손톱 밑 가시는 자기 일처럼 아파하고, 부하나 여성처럼 자기 아래 있는 사람의 고통에는 공감하지 않게 된다.

한국 남성들의 정서는 ‘나도 우대받느라 힘들었다’는 것으로 요약되지 않나 싶다. 여성은 엄마처럼 나를 위해 감정노동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납득이 되고 불편하지 않은 건 페미니즘이고, 그렇지 않으면 ‘메갈’이라고 생각한다. ‘맨스플레인’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 그래서 나오는 거다. 남성 중심 문화를 비판하는 여성을 고립시키고, 욕하고, 메갈이라고 몰아붙이는 게 백래시다.

의사 사회도 그런가.

1996년 대학에 입학했다. 의대 다닐 때 120명 중에 여자가 28명이었다. 본과 수업에 병원에서 현직 의사로 일하는 분들이 임상교수로 와서 강의를 하는데, 그때 한 교수가 “여자가 이렇게 많은 거 보니, 의료계도 망했다”고 했다. 레지던트 때 실습 돌고 회식을 하면, 교수님이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여자는 진정한 제자가 안 되지” “여자들 성적이 좋지만, 나중에 어차피 남자들이 잘나가”라는 말을 했다. 내 친구 중에 졸업 성적이 굉장히 좋아서 당시 인기 있던 안과에 지원했는데 교수가 쓰지 말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여자라서 안 된다”고 했다. 21세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 얘기를 트위터에 썼더니 “정도가 조금 다를 뿐 아직도 그렇다”는 댓글이 달리더라.

과거에 모르고 당했던 일이 새록새록 떠올라 괴로운 이들도 많다.

그때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를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 초등학교 때 심하게 엄마한테 폭언을 들으면, 소화를 할 수가 없다. 그 상처와 감정들을 통째로 무의식에 그냥 밀쳐둔다. 사라지지 않는다. 성인이 된 뒤 과거와 유사한 폭언이나 정서적 폭력이 있으면 불쑥 튀어나온다. 무의식에는 시제가 없어서 과거의 상처가 튀어 나오면 마치 지금 당한 것처럼 생생하게 아프다. 그렇게 화날 일이 아닌데, 어린 시절로 돌아가 지나치게 분노한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선배랑 사귀면서 힘들었던 일이 데이트폭력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학생이 있었다. 전화번호 다 지우게 하고, 성적인 것도 강요하고, 결국 자기가 피해자고 억울한 감정이 드는 거다. 우선은 충분히 분노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다음 시제를 명확히 하고 경계를 지어야 한다. 그때는 신입생이었고 페미니즘도 몰랐고, 사회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더 잘 대처할 수 있고, 무력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자책하지 마라”</font></font>미투 하고 싶은데 못해서 괴로운 이들에게도 힐링이 되는 말씀 부탁드린다.

저항하거나 공론화하는 것보다 자기가 괜찮아지는 게 첫 번째다. 그게 자기를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제일 좋은 일이다. 미투 하지 않아도 된다. 자기가 편할 수 있는 방법이 제일 좋다. 다들 하는데 나는 왜 못하나, 자책하지 마라. 우린 사회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는데, 사회가 나한테 해줘야 할 것이 훨씬 더 많다.

<font color="#008ABD">글</font>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font color="#008ABD">사진</font>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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