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8일 청와대 인왕실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임성준(14·왼쪽)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와대사진기자단
대통령을 만난 날,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요구했던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은 날, 심경은 복잡했다. 기뻤고, 실감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마음 놓을 순 없었다.
“이렇게 오래 걸려야 했던 일인가”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월8일 오후 2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15명을 청와대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오늘 제가 대통령으로서 정부를 대표해서 가슴 깊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건 기업들이었지만, 제조·판매를 허용한 건 정부였다. 정부는 그동안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 가족들이 ‘내 손으로 내 가족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헤어나올 수 없도록 방조해왔다. 이날 문 대통령도 그에 공감을 표했다. “가족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사용했는데 거꾸로 가족의 건강을 해치고 목숨을 앗아갔다는 걸 알았을 때 느꼈을 고통, 자책감, 억울함이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공감한다.” 정부의 공식 사과는 2011년 8월31일 질병관리본부가 “가습기살균제가 원인미상 폐질환의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다만 청와대는 배상 등 법적 책임까지 인정한 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임성준(14)군의 어머니 권은진(40)씨는 대통령에게 말했다. “정부로부터 사과받는 게 이렇게 오래 걸려야 했던 일인가. 앞으로 그나마 남은 시간이라도 안전한 법 테두리에서 편하게 살게 해달라.” 권씨는 아들이 2003년 1월 태어나자마자 1년가량 옥시레킷벤키저 가습기살균제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을 사용했다. 제품 라벨엔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하여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듬해 아들 성준군은 만성 폐질환 진단을 받았다. 그로부터 8년 뒤인 2012년에야 성준군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1단계·거의 확실)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현재까지 산소통 호스에 의지해 생활한다. 건강상의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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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권씨는 8월9일 과의 통화에서 “그동안 기업과 정부의 사과를 억지로라도 받으러 다녔다. (포기하는 심정이었는데) 대통령의 사과를 받고 나니 마음이 많이 풀리고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희망 섞인 말들에 기대도 많이 했다가 실망도 많이 해왔다. 하지만 이번 청와대 관계자들과 대통령의 진실한 태도를 보고 한번쯤 더 기대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만남의 자리에서 성준군은 문 대통령에게 친구·동생 몫까지 사인 4장을 해달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각 사인 위에 ‘사람이 먼저다’라고 썼다.
또 다른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 최은총(가명)씨는 문 대통령에게 “그동안 폐섬유화를 동반한 폐질환을 기준으로 판정해왔는데 판정 기준을 더 넓혀달라”고 건의했다. 그는 2013년 7월,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던 남동생(당시 나이 49살)을 먼저 떠나보냈다. 사용 제품은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이었다. 갑작스러운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한 뒤 넉 달 만에 숨을 거뒀다. 원인미상 폐질환이었다. 환경부는 동생의 죽음을 4단계로 분류했다. 정부는 1·2단계(거의 확실·가능성 높음)만 공식 피해로 인정해 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한다. 3·4단계(가능성 낮음·가능성 거의 없음) 피해자들은 ‘폐섬유화를 포함한 폐질환’이 아니라는 이유 등으로 공식 피해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8월9일 과의 통화에서 “판정 기준을 완화해 우리도 피해자라는 걸 증명받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피해구제 재원, 재발방지 등 약속문 대통령은 이날 “특별구제계정에 일정 부분 정부 예산을 출연해 피해구제 재원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특별구제계정은 지난 8월9일 시행된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에서 정한 재정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중 가해기업 도산 등으로 배상받을 수 없거나, 피해를 공식 인정받지 못했더라도 가습기살균제와 피해 관련성 등을 고려해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피해자 등에게 구제급여를 지급하기 위한 돈이다. 재정은 2천억원 이내를 한도로, 가습기살균제 사업자(1천억원)와 원료물질 사업자(250억원)가 총 1250억원을 분담토록 했다. 문 대통령은 이 계정에서 정한 기업 분담금 외에 정부 예산을 추가 투입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정부의 예산 지원 약속에 대해 ‘의미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애초 법이 지닌 한계를 지적한다. “법 자체에 국가의 책임이 반영되지 않았고 제조판매사들의 책임을 1250억원이란 돈으로 국한했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가 지급한 구제급여에 대해 가해기업을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고 정해, 법적 책임을 모두 기업들에 귀속한 점도 지적한다. 이들은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확실한 원인 규명과 의학적 조사·판정을 제대로 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도 했다. 이틀 뒤인 8월10일 환경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위원회를 열어, 2015~2016년 피해 신청한 1214명을 심사한 결과 94명의 피해를 인정하기로 추가 결정했다. 그 밖에 재심사를 통해 기존 3단계(가능성 낮음) 판정자 3명도 2단계(가능성 높음)로 재판정해 피해를 인정했다. 가습기살균제로 태아가 피해를 입은 경우(17명)에도 처음으로 피해를 인정했다. 환경부는 8월8일 현재까지 전체 피해 신청자 5780명 가운데 2196명의 판정을 완료했고, 그 가운데 총 388명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판정받은 신청자 10명 중 한두 명꼴로 피해를 인정받은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피해 인정 기준이 여전히 협소하다고 지적한다. 서흥원 환경부 환경보건정책과장은 과의 통화에서 “천식에 대해선 인정 기준 마련 과정에 있고 다른 질환들은 피해 인정 여부를 조사·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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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드러난 피해 규모 자체가 ‘빙산의 일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쪽은 “한국환경보건학회가 정부 용역을 받아 조사한 결과를 보면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인구는 350만~400만 명, 사용 후에 건강 문제가 발생해 병원 치료를 받은 인구는 30만~40만 명”이라며 “정부가 이들의 피해 실태 파악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또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로 피해를 입힌 혐의(업무상과실치사상)로 기소돼 법원(항소심)에서 최대 징역 6년을 선고받은 옥시레킷벤키저와 세퓨 관계자들 이외의 제조판매사 관계자들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집계에 따르면 1994년 첫 가습기살균제 출시 이후 39개 이상의 가습기살균제가 시중에 판매됐고, 판매량 정보가 확인된 18개 제품의 판매량은 총 829만 개에 달한다.
문 대통령은 “재발방지 대책 추진에도 만전을 기하겠다”고 약속했다. 앞서 환경부는 모든 살생물 물질과 제품에 대해 안전성이 입증된 경우에만 유통을 허용하는 ‘생활화학제품 및 살생물제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안’과 제조·수입량과 무관하게 모든 기존 화학물질을 등록하도록 하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마련했다. 두 법안은 문 대통령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만남 당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과거 가습기살균제 원료물질 주성분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메틸클로로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 등이 유해성 심사를 비껴간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한 대책이다.
잠 못 이룬 피해자들의 생각문 대통령과 만난 날, 피해자 가족 권씨와 최씨는 새벽 3~5시에 잠이 들었다. 권씨는 “‘한 사람 바뀌었다고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오늘 받은 사과와 약속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두고 보면 알겠지’라는 생각에 잠을 잘 못 이뤘다”고 말했다. 최씨는 “대통령의 사과에 기쁜 마음도 들었지만 앞으로 남은 일들에 대해 아직 맘 놓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대통령의 말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대통령이 직접 끝까지 챙겨나가겠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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