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등 이 정권의 역사기구나 관변학자들은 중국과 일본의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지난 4월 국회 동북아특위에 제출된 동북아역사지도를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이어져 있고…”( 2015년 8월13일치 1면 ‘광복 70년과 역사전쟁의 적들’)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광복 70주년을 맞은 2015년 광복절을 앞두고 한국 사회의 대표적 ‘진보언론’인 1면에 실린 이 기사는 동북아역사지도사업에 참여한 역사학자들을 ‘관변학자’로 낙인찍었다.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같은 해 4월17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동북아특위)에 나와 동북아역사지도를 비판한 내용과 ‘판박이’다. 하지만 동북아역사지도에 만리장성은 표기돼 있지 않다. 2015년 동북아특위와 이덕일 소장이 한 몸이 되어 동북아역사지도를 비판할 때 대다수 언론은 사실 확인 없이 ‘받아쓰기’만 했다. 등 진보언론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계로부터 ‘사이비’라는 비판까지 받는 ‘유사역사’가 국회 동북아특위라는 공식 기구를 무대로 국책연구사업의 존폐에 영향력을 행사한 ‘역사 참사’(제1167호 표지이야기 ‘권력과 사이비 역사가 쓴 고대사 침탈사’)의 책임은 일부 정치인에게만 있지 않다. 동북아역사지도 폐기 과정을 들여다보면, 유사역사의 또 다른 ‘공모자’들이 보인다.
이덕일 소장과 동북아특위가 제기한 동북아역사지도에 대한 ‘유사역사적 비판’은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DB)에 기반한 디지털 지도인 동북아역사지도의 특성을 감안하면 충분히 반박되는 수준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언론의 무비판적 ‘받아쓰기’로 인해 유사역사는 진지한 역사학자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정설’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고구려와 한의 낙랑군 사이 국경선을 표시한 동북아역사지도를 두고, 중국 동북공정론자들의 ‘만리장성 동쪽 끝=한반도 북부 청천강’이라는 주장(만리장성 청천강설)을 추종했다고 비난한 게 대표적이다. 대다수 언론은 “동북아역사지도가 만리장성을 평양에 그렸다”고 보도했다. 동북공정에 등장하는 ‘만리장성 청천강설’의 본질은 중국 전국시대에 청천강 이북의 한반도 서북부가 중국 땅이었으며, 고조선은 한반도 밖을 지배한 적이 없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동북공정을 추종한다면, 고조선 영역을 청천강 이남에 그려야 한다. 그러나 동북아역사지도의 기원전 350년께 고조선 지도에선 한반도 밖 요동까지 고조선 영역에 포함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지도편찬위원회(연구팀)에서 일한 정요근 덕성여대 교수(사학)는 지도에 대한 이 공격을 ‘악마의 편집’이라고 했다. “동북아역사지도의 고구려와 한의 낙랑군 사이 국경선은 동북공정의 만리장성 청천강설과 아무 관련이 없다. 동북아역사지도에 동북공정이란 프레임을 씌우려는 목적으로 악의적으로 끼워맞춘 것이다.”
“악마의 편집”
역사학계는 진보 지식인들이 유사역사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에 진보언론의 책임도 매우 크다고 비판했다. 실제 동북아특위에서 동북아역사지도를 비판한 의원들이 주로 활용한 낙랑군 요령·하북 지배설, 초기 기록 불신론 등은 이덕일 소장이 2009년 에 10여 차례 연재한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 등 진보를 표방하는 언론들도 예외 없이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기사들을 실은 바 있다. …교사, 노동운동가, 문인, 정치인, 학자 등 사이비 역사학을 수용한 ‘진보’ 인사들은 각 분야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2016년 봄, 236쪽)
2016년 2월19일 에 ‘한국은 아직 식민지인가’라는 칼럼을 쓴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경북대 명예교수)의 글을 보자. “이 소장은 지난 몇 년간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식민사관에 맞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지키는 외롭고 힘든 학문적 투쟁을 해왔다.” 임나일본부(고대 일본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주장)를 부정하는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를 ‘임나일본부’를 인정하는 학자라고 왜곡한 것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이덕일 소장이 1심에서 유죄판결 받은 것을 쓴 칼럼이다. 그는 “국가가 훈장을 줘도 모자랄 역사학자에게 실형 판결을 내리다니 대명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라고 애통해했다. 같은 해 11월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이 나오자 이재명 성남시장은 “우리 사회 곳곳에 침투한 친일 세력들. 언젠가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지요. 이덕일 소장님 무죄판결 축하하고 환영합니다”라고 트위터에 적었다.
김현구 교수는 6월8일 와의 인터뷰에서 “20년 동안 식민사학을 반박했더니 한순간에 식민사학자라 매도당할 처지에 놓인 셈”이라며 “잘 모르겠으면 모르겠다 하면 될 일인데, 이덕일 같은 사람의 주장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결과”라고 했다.
유사역사를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은 ‘교육부 관료’다. “역사계에 와서 체험을 하니까 제가 생각할 때는 99.9% 역사계는 한쪽으로 사관이 좀 쏠려 있는 거 아닌가….” 2014년 7월18일 18차 동북아특위에 출석한 편경범 동북아역사재단 운영관리실장의 발언이다. 이날 회의록을 보면 편 실장이 유사역사가처럼 ‘낙랑군은 한반도 밖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그는 이날 한 의원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역사라는 것이 우리 정부, 우리 국가의 역사인데 이것을 역사학이라고 해서 학자들한테만 맡겨놓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우리 국가가 책임져주어야지요. 우리 국가가 지금 우리 역사를 제대로 잡아놓지 못했으니까 통치이념 이런 것이 굉장히 미흡한 그런 실정”이라고도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던 논리였다.
교육부 관료들의 동조또 다른 교육부 관료, 성삼제 교원소청심사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2014년 2월28일 14차 동북아특위에 정부 쪽 참석자로 나와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한사군 지도가 조선총독부 시절에 만들어졌”다며 낙랑군을 한반도 안에 두는 것에 “대학원생 수준에서 조작한 것인데, 60년 동안 있다는 것은 되게 부끄러운 일이고… 국가 차원에서 간과할 수 있는 문제겠느냐”고 말했다. 성삼제 위원장은 위서로 판명된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내용 등을 담은 (동아일보사)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두 관료는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나 발전을 언급하지 않는다. 역사학계가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에 두는 것은, 1990년 평양 정백동 고분에서 낙랑군의 인구 호적 대장이 발굴된 성과와 해방 뒤 1990년대 중반까지 황해도·평안도 일대에서 발굴된 낙랑 고분 수가 2600여 기에 달하는 등 수많은 고고학적 유물·유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역사학계의 논의는 낙랑군이 중국인에게 지배된 중국인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고조선인이 지배층을 이룬 고조선 사회의 연장이었다는 사실을 고증하는 단계로 발전한 상태다.
유사역사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동북아특위에서 ‘낙랑군은 한반도 밖에 있었다’고 주장한 이들 가운데는 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지내고 육군·해군·공군 자문위원을 맡은 남창희 인하대 교수(정치외교학)도 있다. 남 교수는 19차 동북아특위에서 “안보와 국방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해병 원정 작전과 육해군 작전에 정통한 전문가 그룹을 모아서 사마천 의 조선열전 기록을… 분석했다”며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게 작전 교리상, 전쟁의 원칙상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옛 문교부 국사 교과서 편수관으로 일한 윤종영은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유사역사의 국사 교과서 고대사 서술 변경에 개입한 과정을 기록한 책 (혜안)에서 “재야학자들의 기관지처럼 되어 있던 박창암 장군이 발행하는 지가 군인들의 정훈 교재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군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상당히 컸다. 더욱이 제5공화국 들어서면서 심정적으로 재야학자의 학설에 동조하고 있던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정부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문교부에 유형·무형으로 압력을 가해왔다”(19쪽)고 적었다.
과학 분야도 유사역사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2002년 발간된 (김영사)는 천체물리학자가 단군조선시대 천문 현상 기록을 과학적으로 검증한 책이다. 에 언급된 오성취합, 즉 태양계 행성 가운데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 5성이 가까이 결집하는 현상이 책이 언급한 해당 시기에 실제 있었다는 주장이다. 단군시대의 일을 기록했다는 는 원본이 없고 1959년 정해박이 만든 번역본뿐이라는 사실과 본문에 “만국박람회를 평양에서 크게 개최하니” “조문휴가 자본론을 저술해 임금께 바쳤다”는 등 고대에 있을 수 없는 문물이 등장하는 등의 이유로 ‘위서’라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고대사 연구자인 기경량 가천대 강사는 2016년 봄호에서 천문 관측 프로그램인 스텔라리움을 활용해 검토한 결과, 에 기원전 1733년에 있었다고 기록된 오성결집 현상이 위작 연도로 지목되는 1949년과 가까운 1940년 3월 초에 있었음을 밝혀냈다.
동북아특위 37차 회의(2015년 6월12일)에 출석한 복기대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교수는 고대 평양의 위치에 대해 “사료상으로 보면 평양의 위치는 적어도 장수왕 이후로는 아마 만주 쪽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지금 판단이 가고 있습니다. …2차 연도부터는… 고고학적으로 그렇게 하고 천문학적이라든지 주변 학문이 총동원돼가지고 연구를 진행해보자 이렇게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평양은 무조건 만주에인하대 고조선연구소는 동북아특위에서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이 연구소는 2015년부터 3년 동안 고대 평양의 위치를 연구하는 데만 국가로부터 10억원을 지원받았다. 이들은 지난 5월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고려 영토 관련 학술회의에서 “고려의 국경선이 만주 지역(중국 랴오닝성 부근)에 위치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고구려평양연구팀에서 연구교수로 있었던 허인욱 고려대 강사는 “고구려 및 고려의 평양을 한반도 밖, 즉 만주 지역에 비정하는 것을 답으로 정해놓고 연구를 진행했다. 이견을 제기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당시 연구팀 내 상황을 전했다. 허 강사는 고려시대 영토와 대외관계 분야 전문가다. 그는 “고려가 외침을 많이 당해서 거란 등이 고려에 침입한 경로가 사료로 많이 남아 있다. 그들은 압록강→서경(평양)→개경 경로로 온다. 만약 서경이 압록강 밖에 있었으면 서경→압록강→개경 순으로 와야 하지 않나”라며 “답을 정해놓고 연구하는 것이 과연 연구로서 가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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