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를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건설하고 그 1호기 준공식을 갖게 된 것은 참으로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의 도정에서 이룩한 하나의 기념탑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스물한 번째로, 동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핵발전국 대열에 참여하게 되어 과학 한국의 모습을 자랑하게 되었다.”(1978년 7월20일 ‘고리 1호기 준공식’ 박정희 전 대통령 연설 중)
“고리원전 1호기의 가동 영구정지는 탈핵 국가로 가는 출발이자,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대전환이다. 원전은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해야 하는 우리가 개발도상국 시기에 선택한 에너지 정책이었으나 이제는 바꿀 때가 됐다.”(2017년 6월19일 ‘고리 1호기 영구정지 기념행사’ 문재인 대통령 연설 중)
수명은 30년이었지만
40여 년 전 만들어진 원자력발전소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가난한 나라가 달성한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원전 재난영화 <판도라>(2016)에서 원전을 ‘마을을 먹여살리는 밥솥’이라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한국 사회가 원전을 바라보는 시선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원전 고리 1호기가 가동한 뒤 세계는 미국 스리마일섬(1979년), 소련 체르노빌(1986년), 일본 후쿠시마(2011년) 등 세 차례 최악의 원전 사고를 겪는다. 한국 역시 크고 작은 원전 사고와 고장, 원전 납품 비리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고리 1호기를 둘러싼 한국 원자력 40년사엔 한국 사회가 ‘값싸고 효율적인 에너지’라는 원전 신화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사회로 거대한 변침을 시도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담겼다.
고리 1호기를 둘러싼 가장 큰 쟁점은 입지 문제였다. 1966년 9월1일치 <동아일보> 5면에 실린 기사 ‘본궤도에 오른 원자력발전 계획’을 보면 “경제기획원이 74년까지 출력 3만킬로와트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중략) 그 뒤 기초 작업의 하나로 진행된 장소 선정에서는 경남 동래군의 월내리와 공수리, 서울 근방의 행주 등 세 곳이 후보지로 등장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1962년 정부는 원자력발전추진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한국 최초로 원전 건설 추진을 본격화했다. 눈에 띄는 건, 한국 최초의 원전이 서울 근방인 ‘행주’에 건설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원자력연구소, 한국전력공사, 대한석탄공사 등은 원전 부지 후보지로 현재 고리 1호기가 위치한 부산 기장군 외에 행주대교 북단 지역을 검토했다. 하지만 원전 가동에 꼭 필요한 냉각수로 사용하기에 당시 한강의 수질오염이 심각했고, 남북 대립이 치열한 시절에 휴전선과 가까운 곳에 원전을 세우는 건 안보상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행주는 후보군에서 배제된다.
결국 고리 1호기가 지금 위치에 자리잡은 뒤 원전은 40년 동안 동해안 일대 도시 주변에 빽빽하게 건설됐다. 이는 한국이 부지별 원전 밀집도와 원전 주변 반경 30km 이내 인구수에서 모두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얻는 결과로 이어졌다. 원전 안전성이 문제될 때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은 “서울 한복판에 원전을 지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리 1호기가 아니라 ‘행주 1호기’였다면 원전 확대로 일관해온 한국의 에너지 정책에 변화가 있었을까.
폭탄 돌리기
고리 1호기는 1978년 4월 상업운전을 시작한 뒤 잦은 고장과 사고 은폐, 각종 비리 등으로 신음했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의 원전안전운영정보시스템을 보면, 1978년부터 6월23일 현재까지 한국에서 운영 중인 25기 원전에서 발생한 고장·사고는 724건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약 18%인 131건이 고리 1호기에서 발생했다. 설계 수명이 30년으로 정해진 고리 1호기는 가동 20년 만인 1998년, 핵심 설비인 증기발생기의 결함이 다수 발견돼 약 1천억원을 들여 설비를 교체했다.
2012년 2월 발생한 고리 1호기 정전 은폐 사건은 ‘전문성’이란 성벽 뒤에서 원전을 운영해온 원자력계 종사자들의 허술함과 안전불감증을 여실히 보여줬다. 당시 고리 1호기는 정비 과정에서 12분간 정전 사고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원자로의 냉각수 온도가 36.9도에서 58.3도로 무려 21.4도 급상승했다. 냉각수 온도가 계속 상승하면 냉각수가 모두 증발돼 핵연료봉이 녹아내리는 ‘노심용융’(멜트다운)이 발생한다. 그럼 원자로 압력 용기가 파괴돼 대형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중대 사고가 터졌는데도 비상발전기는 작동하지 않았고, 고리 1호기 발전소장은 이 사태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사건은 한 달 뒤 알려진다.
이후 ‘원전 마피아’로 불리는 원자력계의 어두운 카르텔이 세상에 ‘민낯’을 드러냈다. 2012~2013년 품질 서류가 위조된 불량 부품이 다수 원전에 납품됐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고, 하청업체에서 금품과 향응을 접대받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간부들이 줄줄이 수사받는 풍경이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선 정부 주도로 원전 정책이 추진되면서 한국 원전이 ‘관료-원자력 학계-건설 자본’으로 대표되는 ‘원자력 마피아’의 리그에 의해 유지돼왔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12년 12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가 펴낸 ‘탈핵 에너지 전환의 정치·사회 시나리오 연구’ 보고서를 보면 “1990년대 한국형 원전 개발을 매개로 한 정부의 원전 중심의 전원 정책(관료), 핵 관련 기술인력 양성(지식), 신규 원전 건설에 따른 시장(자본) 확장이라는 관료·지식·자본의 카르텔을 강화하는 순환 구조를 갖추게 됐다. 이러한 ‘핵 카르텔’의 강화 과정에서 에너지 정책은 군사정부는 물론이고 민간정부에서도 폐쇄적인 소수의 전문가에 의해 결정됐다”고 평가했다.
영국과 미국 등에서 차관을 들여와 당시 화폐가치로 1560억원이라는 막대한 돈(당시 국가 예산의 4분의 1 수준)을 쏟아부어 건설한 고리 1호기는 애초부터 ‘화장실 없이 건설한 아파트’였다. 역대 정부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숨질 정도로 고선량의 방사선을 내뿜는 사용후핵연료(폐연료봉) 처리 문제의 해법을 ‘폭탄 돌리기’ 하듯 다음 정부로 떠넘겼다. 그동안 폐연료봉은 원전 내부에 임시 저장해왔는데, 4개 원전이 있는 고리원전본부만 해도 2024년 내부 보관 용량이 가득 찰 예정이다.
‘폐로’ 난관 남아
남은 문제는 폐로다. 2015년 6월 폐로 방침이 정해진 고리 1호기는 결국 지난 6월18일 가동을 멈췄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추산한 고리 1호기 해체 비용은 6437억원이지만, 실제 해체시 얼마나 많은 돈이 더 들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정부가 예측한 전체 원전의 사용후핵연료 처리 비용이 53조원인데 이마저도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비용평가를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고리 1호기 40년 역사는 양적 성장과 발전에만 매달린 한국 현대사와 닮은꼴이다. 고리 1호기의 퇴장과 문재인 대통령의 탈핵 방침 천명이 한국 사회의 질적 변화를 이끄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을까.
이승준 <한겨레> 정치팀 기자·<한국 원전 잔혹사> 저자 gamja@hani.co.kr<꿈꾸는 에너지 아름다운 미래: 원자력발전 30년사 1>, 한국수력원자력,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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