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국정원) 직원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키를 쥔 국민연금공단(국민연금) 내부 정보를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쪽에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유리한 합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청와대와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금융위원회(금융위)에 이어 국가정보기관까지 활용된 것이다.
국정원 직원이 삼성에 민감한 정보를 제공한 것은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보안 업무와 무관한 활동으로 ‘국가정보원법’ 위반 소지가 크다. 삼성은 총수의 이익을 위해 국정원의 정보력까지 끌어 쓰는 ‘힘’을 보여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민연금이 ‘쉬쉬’한 정보, 삼성으로 </font></font>이 특검과 검찰 등을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2015년 7월 초 장충기 당시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은 미래전략실 고위 임원 A씨에게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금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추진에 대한 반대 의견을 국민연금 쪽에 전달했다’는 내용이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국민연금의 주식 의결권 행사와 관련한 국내 공식 자문기관이다.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지분을 10% 가까이 보유한 최대주주로서 합병 성사의 키를 쥐고 있었고, 공식 자문기관의 의견은 중요한 판단 근거 중 하나였다.
메시지에는 국민연금의 해외 자문기관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가 이날 저녁에 의견서를 낼 것이라는 정보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ISS는 세계 최대 의결권 전문 자문사이다. 장충기 전 사장에게 전달된 문자메시지에는 국민연금이 이 자문 결과를 대외 비밀로 유지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실제로 이같은 자문 결과가 언론 등에 공개된 것은 A씨가 장 사장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지 최소 닷새가 지난 뒤다.
문제는 정보의 출처다. A씨는 장 사장에게 이 내용의 출처가 ‘삼성그룹에 출입하는 국정원 정보관(IO) 김아무개씨’라고 밝히며 ‘국정원 정보’라는 사실을 덧붙였다. 국정원이 수집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정보가 삼성에 출입하는 정보관을 거쳐 미래전략실 쪽에 전달됐다는 이야기다.
국정원이 국민연금 내부에서 쉬쉬하던 민간 기업 관련 고급 정보를 수집한 것도, 이 정보를 삼성 쪽에 전달한 것도 모두 불법적인 일이다. 국정원에는 ‘차단의 원칙’이 있어 다른 부서나 직원의 업무 내용을 알 수 없다. 삼성에 출입하는 국정원 정보관 김씨가 국민연금 내부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같은 정보 제공이 국정원의 조직적 활동이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최근 삼성을 퇴사한 장 전 사장은 당시 미래전략실에서 정부기관 등을 상대하는 ‘대관’ 업무를 총괄했다.
당시 삼성은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안건으로 하는 주주총회를 앞두고 국민연금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같은 해 5월26일 합병 발표 뒤 옛 삼성물산의 지분 7.12%를 보유한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가 공개적으로 ‘합병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합병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옛 삼성물산 소액주주들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1 대 0.35로 합병하는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불리하다며 합병을 반대했다.
국민연금은 합병안 통과를 좌우할 수 있는 삼성물산의 최대 단일 주주(2015년 5월 기준 9.54%)였다. 그러나 국민연금 주식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가 그해 6월 SK C&C와 SK(주)의 합병에 ‘반대’ 의견을 냈던 전례에 비춰볼 때, 국민연금의 표심이 어디로 향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삼성은 두 회사의 합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언론, 전국경제인연합회, 재계, 학계 등 여러 사회 계층에 숨어 있는 ‘친삼성’ 인맥을 최대한 활용해 전방위적 ‘합병 찬성’ 여론을 형성하는 한편, 임직원들이 직접 옛 삼성물산 주주들을 찾아다니며 표를 모았다. 목표는 명확했다. 2014년 5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으로 경영권을 넘기기 위한 주춧돌 마련이다.
두 회사를 합병하면 통합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지주회사가 되어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을 동시에 지배할 수 있다. 옛 삼성물산 지분을 하나도 보유하지 않던 이재용 부회장은 제일모직 최대 주주(23.24%)가 되어 계열사 지배력을 강화하는 한편 삼성전자 지분(4.1%)까지 확보하는 일석이조의 이득을 누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민간 기업에 국정원 정보관(IO) 출입</font></font>국민연금은 7월10일 학자 등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주식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에 결정을 요청하는 대신, 공단 내부 인사들로만 구성된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를 열어 ‘합병 찬성’을 결정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 과정에 안종범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등이 부정하게 개입한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문 전 장관은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 홍 전 본부장은 배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특검은 지난 3월6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합병으로 인해 국민연금은 최소 1388억원의 손해를,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 총수 일가는 최소 8549억원의 재산상 이득을 보았다고 밝혔다.
경영권 승계 목적의 합병에 국정원 정보를 동원했다는 의혹은 ‘거대한 삼성공화국’의 실체를 상징처럼 보여주는 장면이다.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전방위적으로 청탁 또는 거래했다는 내용이 특검 수사로 밝혀진 데 이어 국가정보기관마저 삼성 편에 서서 정보를 제공한 정황이 드러난 셈이기 때문이다.
앞선 1월에는 국정원 직원이 국민연금 내부 동향을 파악해 안종범 전 경제수석에게 수시로 보고했다는 단서를 특검이 잡았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국정원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수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됐다. 는 지난 3월9일 국정원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을 만들어 문화체육관광부에 내려보냈다는 국정원 직원의 진술을 특검이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삼성에 국민연금 동향을 전달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정원법 위반에 해당하는 위법행위로 보인다.
국정원의 유우성씨 간첩 조작 사건 변호를 맡았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용민 변호사는 “국정원이 민간 기업에 비밀 정보를 알려줬다면 직무 범위를 한참 벗어나 국정원법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민연금공단의 합병 관련 동향 등) 관련 내용이 직무상 비밀에 해당한다면 그 직원은 국정원 직원법도 위반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가정보원법 제15조의 2에는 “(국정원) 직원은 다른 국가기관과 정당, 언론사 등의 민간을 대상으로 법률과 내부규정에 위반한 파견·상시 출입 등 방법을 통한 정보활동을 하여서는 안 된다. 그 업무 수행의 절차의 방식을 내부규정으로 정한다”고 돼 있다. 또 국가정보원 직원법 제17조에는 “직원은 재직 중은 물론 퇴직한 후에도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비밀 엄수 조항이 있다.
국회는 2014년 국정원법을 개정하면서 국가기관, 민간 기업이나 언론사 등을 상시적으로 출입하며 담당하는 국정원 정보관 활동을 전부 없애지는 못했지만 엄격한 내부규정을 두도록 했다. 그러나 삼성 담당 정보관이 따로 있고 국민연금의 비밀 정보를 캐낼 정도로 국정원이 여전히 광범위한 국내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음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최근 SBS가 헌법재판소 담당 국가정보원 정보관이 탄핵심판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는 의혹을 보도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정원 국내 정보 수집 담당 부서에 헌재 등을 담당하는 법조팀 조직과 인력이 처 단위로 존재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은 국정원 쪽에 △국정원이 삼성 등 민간 기업을 출입하는 정보관을 두는 이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공개되지 않은 국민연금의 내부 정보를 삼성 쪽에 전달한 이유 등을 물었다.
국정원 쪽은 “(삼성 쪽에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해당 정보관(IO)은 국민연금공단 내부 정보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내부 정보를 전달하지도 않았다”고 답변했다. 삼성 쪽은 “장충기 전 사장과 고위 임원 A씨 등이 모두 퇴사했고 미래전략실도 해체된 상황이라 공식적인 답변을 하기엔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이재용 부회장과 장 전 사장 등 삼성 쪽 변호를 맡은 한 변호사는 “아직 특검의 수사 기록이 변호인단에 넘어오지 않아서 (국정원 관련 내용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국정원만 움직인 것은 아니다. 공정위, 금융위, 국민연금 등 정부 기관들은 삼성 뜻에 ‘의해’ 결정을 내렸거나, 삼성의 부정한 청탁을 받은 청와대의 압력에 못 이겨 삼성을 ‘위해’ 움직였다. 3월9일 공개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 실장(부회장), 장충기 전 사장 등의 공소장에는 이러한 행위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총 세 차례 독대했다. 2014년 9월 대구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에서 만났을 때 박근혜는 대한승마협회 회장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직후인 2015년 7월에는 “내 임기 안에 경영권 승계가 해결되기를 희망한다. 지난번 얘기한 승마 관련 지원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고 이 부회장을 닦달했다. 그 뒤 삼성은 최순실이 독일에 세운 코어스포츠와 컨설팅 계약을 체결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공정위·금융위에도 노골적 청탁</font></font>2016년 2월 세 번째 독대에서는 이 부회장이 금융위가 검토 중인 삼성생명의 금융지주사 전환 계획 승인,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장 뒤 환경규제 완화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삼성은 이즈음 미르·K스포츠재단 등에 200억원 이상 출연했다.
대통령에게 부탁했다고 해서 삼성의 청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이후 삼성의 다른 계열사들은 자신이 보유한 통합 삼성물산 주식을 처분해야 했다. 공정거래법에 따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등기 이후 6개월 안에 신규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2015년 10월 삼성SDI와 삼성전기가 보유한 통합 삼성물산 주식 총 1천만 주를 2016년 3월1일까지 처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되면 이재용 부회장의 의결권이 줄어들어 그룹 지배권이 약해진다.
이러한 유권해석을 통보받은 당시 김종중 삼성 미래전략실 전략1팀장(사장)은 김학현 공정위 부위원장을 만났다. 처분 주식을 줄여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다. 당시 안종범 경제수석과 최상목 대통령비서실 경제금융비서관도 거들었다. 이들은 처분 주식을 500만 주로 줄여달라는 삼성 쪽의 부탁을 거듭 공정위에 전달했다.
공정위 실무진은 1천만 주 처분을 공식 통보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김학현 당시 부위원장은 “삼성에 (1천만 주라고) 공식 통보는 절대 안 된다. 너희가 위원장이냐”고 이들을 질책했다. 공정위는 결국 그해 12월 입장을 바꿔 삼성 쪽에 500만주를 처분하라고 공식 통보한다.
삼성 쪽은 합병 외에 또 다른 경영권 승계 시나리오를 실행하고 있었다. 삼성생명을 투자 부문과 사업 부문으로 쪼개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이재용 부회장 등 총수 일가는 삼성생명 지분을 20.76% 보유하고 있는데, 지주사로 전환하면 지분이 45.78%로 ‘뻥튀기’ 된다.
삼성 쪽은 2016년 1월 금융위에 이러한 계획을 전달하면서 은밀하게 사전 검토를 부탁했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비금융 계열사 지분 6조원어치를 매각하고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하려면 금융지주회사법과 보험업법 등 관련 법에 부딪힐 수 있어, 금융위가 전환 계획을 승인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해 2월14일 금융위는 ‘삼성생명이 보유한 비금융 계열사 지분을 5년 내 매각하도록 할 경우 삼성 봐주기 논란이 제기될 수 있고 보험계약자 권익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승인이 어렵다는 뜻을 삼성에 전달했다.
그러나 금융위 통보를 받은 다음날인 2월15일, 이재용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을 만나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삼성생명이 금융지주사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고, 대통령은 안종범 전 경제수석에게 “잘 챙겨보라”고 지시했다. 삼성 쪽은 그해 4월 이 계획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재용 재판 시작… 모든 혐의 부인</font></font>이처럼 대통령과 정부 부처를 상대로 막강한 로비력을 펼쳤던 핵심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이었다. 삼성그룹은 지난 2월28일 미래전략실을 해체하고 계열사마다 대표이사와 이사회 중심의 자율경영 체제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매주 수요일에 열리던 계열사 사장단회의도 폐지했다. 미래전략실 주축인 최지성 부회장과 장충기 사장, 팀장급 임원이 모두 사임했다.
그러나 진정한 ‘해체’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가 드러난 2008년에도 전략기획실 해체를 선언했지만, 슬그머니 미래전략실로 이름을 바꿔 부활시켰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날 논평을 내고 “2008년 형식상 전략기획실을 해체한 뒤에도 계속 기능을 유지한 것과 유사한 또 다른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한편 3월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재판장 이영훈)는 이재용 부회장 등 뇌물 공여 혐의로 구속 기소된 삼성 임직원 5명에 대한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이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 등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박근혜와 공모한 최순실 쪽에 433억원의 뇌물을 건네거나 약속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이 부회장은 이날 법정에 나오지 않았지만, 변호인들은 공소장에 기재된 모든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공소장에 이 부회장이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와 삼성SDS 신주를 인수했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는데, 이는 이 부회장의 공소사실과 무관한 내용으로 유죄에 대한 예단을 부를 수 있다. 특검이 ‘공소장 일본주의’를 위반했다.” 변호인들은 특검이 법원에 ‘유죄’라는 선입견을 줄 수 있는 내용 등을 공소장에 포함시켰다고 주장했다. ‘공소장 일본주의’는 검찰이 기소할 때 다른 서류를 첨부하지 않고 공소장 하나만 제출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변호인들은 또 “미래전략실을 ‘삼성그룹의 소위 대관 업무 창구 역할을 했다’며 범죄 집단처럼 묘사한 것은 무죄 추정 원칙에 어긋나고, 특검팀이 박근혜 대통령을 한 번도 조사한 적이 없는데 어떤 근거로 이재용 부회장과의 독대 자리에서 오갔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직접 인용 형태로 (공소장에) 기재했는지 의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앞으로 진행될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 과정에서 ‘거대한 삼성공화국’ 만들기를 누가 어떻게 도왔는지, 그 실체가 하나하나 밝혀질 것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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