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주에서 가장 바쁜 원희룡 제주도지사를 이 만났다. 그에게 난개발, 주택·토지 가격 폭등, 교통량 폭증, 취업난 등 현안을 묻고 대책을 들었다. 뒤이은 기사에선 ‘낯선 아름다움’의 제주어와 제주의 아픈 역사, 독특한 문화를 다룬 책들을 소개한다.
1949년 이른 봄. 6살 아이는 신이 났다. 마을로 돌아가 아버지, 어머니와 예전처럼 살 생각에 부풀었다. 그만큼 한라산 중산간 동굴에서 지낸 겨울은 추웠고 배고팠고 외로웠다. 그러나 한 계절 만에 돌아온 마을은 동굴보다 위험했다. 두 손 들고 항복하는 아버지와 동네 청년들의 머리로, 가슴으로 총부리가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군인인지, 경찰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이는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것이 31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양홍순의 아들’로 살아온 67년심한 매질을 당한 아버지를 비롯한 청년들은 ‘동척회사’(해방 뒤 수용시설로 쓰이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수용됐다. 아이와 어머니는 그곳의 다른 방에 갇혔다. 20일 뒤 아이와 어머니는 석방됐지만 아버지는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죄목은 간첩죄와 내란죄.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아버지는 대전형무소로 이송됐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까지 제주의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제주도 제주시 오라3동에 사는 양남호(73)씨는 제주 4·3사건 행방불명자 ‘양홍순의 아들’로 67년을 살았다. 1948년 5월 오라리 연미마을에서 우익단체들이 자행한 ‘오라리 방화사건’ 이후 온 가족이 산으로 피신해 겨울을 견뎌야 했던 어린 시절. 돈을 벌겠다며 일본으로 밀항했다 붙잡혀 일본과 부산에서 1년 넘게 수형생활을 했던 청년 시절…. 온화한 표정의 양씨도 가끔씩 “다시는 떠올리기 싫다”고 진처리 치는 세월이다.
그 고통스런 시간 속에서도 양씨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행방불명된 지 23년째인 1972년, 목포형무소에서 살아 돌아온 이로부터 “6·25 사변 때 대전형무소 사람들은 몰살됐다”는 말을 듣고서야 아버지를 그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집 근처 밭에 봉분 없이 표석을 세웠다. ‘음력 6월20일경 출타 미환’.
지난 7월25일, 양씨는 4·3추가진상조사단 조사위원과 만나 고된 세월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김은희 조사위원은 양씨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이따금씩 물었다. 양씨의 말은 동영상으로 녹화됐고 양씨가 꺼낸 아버지 사진과 관련 서류는 사진으로 촬영됐다. 희생자나 그 가족의 증언을 기록하며 4·3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구술조사’ 과정이었다. 양씨는 김 조사위원이 ‘오라동 피해 실태 조사’에서 만난 첫 번째 희생자 유가족이었다.
4·3사건 진상조사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도민의 끈질긴 요구로 2000년 제정된 제주4·3특별법에 따라 2003년 정부 차원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4·3사건의 비극을 모두 담지 못한 ‘미완의 보고서’였다.
4·3사건은 무려 7년7개월간 자행된 인권유린과 불법의 종합판이었다.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로 주민 18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당시 조직 노출로 수세에 몰리던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3일 ‘경찰과·서북청년단의 탄압 중지, 남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내걸고 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후 1954년 9월21일까지 무장대와 토벌대 간 무력 충돌,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했다.
4·3사건으로 사망자 1만245명, 행방불명자 3578명, 후유장애자 163명, 수형자 245명(공식 결정 현황)이 발생했다. 아직 신고되지 않은 건수를 포함하면 희생자는 2만5천~3만 명에 이를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 2∼3년간의 진상 조사로는 진실 규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던 셈이다.
여전히 발굴되는 집단희생터이에 제주4·3평화재단은 2012년 3월부터 ‘마을별 피해 실태 조사’를 벌이고 있다. 도내 마을 전수조사를 하느라 조사 기간을 ‘2014년 말’에서 ‘2016년 말’로 2년 늘렸다.
왜 마을이 중요할까. “희생자 한명 한명이 왜,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 선명하게 밝히기 위해서”라고 김은희 조사위원은 설명했다. 지금까지 희생자 수로 뭉뚱그려지던 4·3의 잔혹성을 개인의 비극적인 삶으로 톺아보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1950년 당시 표선국민학교에서 폭발물 사고로 국민학생 3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사고 원인은 60년 넘게 묻혀 있었다. 그러나 추가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 당시 사고는 4·3 토벌대로 온 군인들이 군사훈련을 한 뒤 놔두고 떠난 폭발물로 인해 발생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억울하게 죽은 어린 영혼들이 4·3사건 희생자로 인정받을 길이 열린 것이다.
“마을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몰랐던 희생터가 발굴되고 미신고된 희생자 사례도 나오고 있다.” 김은희 조사위원의 설명이다.
그러나 진상조사가 끝이 아니다. 추가로 드러난 희생자나 유가족이 정부에 공식으로 신고하려 해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4·3특별법 시행령을 개정해 추가 신고 기간을 명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3년 2월을 끝으로 희생자 신고는 중단된 상태이며, 박근혜 정부에서 추가로 이뤄질 계획도 없다.
지나가지 않은 검은 세월오히려 박근혜 정부는 이전 정부에서 적법하게 결정된 희생자의 재심사를 밀어붙이고 있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지난 2월 “4·3 희생자 중 한두 명이라도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한 인물이 있다면, 심의를 통해 희생자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희생자 재검증’ 의지를 밝혀 4·3 유족의 강한 반발을 샀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 남용을 공식 사과했음에도, 지난 9년간의 보수정권에서 4·3사건을 “폭도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왜곡하려는 극우세력의 시도가 계속된 결과다.
이런 분위기 속에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조처인 국가 배상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제주 허영선 시인의 시 ‘놋쇠 숟가락’은 4·3사건으로 27살에 남편과 생이별한 양남호씨의 어머니 문임생씨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매일 아침 더운 밥 한 사발 올렸다/ 사발에선 늘 모락모락/ 남편의 눈물 바람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모른 것이 죄였던/ 산다는 것 하나로 참아내던/ 검은 세월/ 끼니마다 놋쇠 숟가락 하나 닦았다/반짝반짝 닦고 또 닦았다”
검은 세월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글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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