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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만 올라와도 심장이 콩닥콩닥

개성 배추·화순 상추 등 토종 씨앗 자라는 ‘전봇대집’ “도시 사람들도 집 앞에 푸릇푸릇한 밭이 필요하다”
등록 2016-04-14 18:00 수정 2020-05-03 04:28
일주일 전에 심은 개성 배추 싹이 파릇하게 올라왔다. 정용일 기자

일주일 전에 심은 개성 배추 싹이 파릇하게 올라왔다. 정용일 기자

6차선 도로 위로 파란색 간선버스들이 쌩쌩 달린다. 척추·관절 전문 병원, ㅇ백화점 빌딩 등 고층 건물들이 솟아 있다. PC방, 도시형 호텔과 모텔, 프랜차이즈 빵집 등으로 들어찬 건물이 도로변을 채우는 서울 은평구 불광동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서울혁신센터 앞마당. 비계와 비닐 등으로 지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조물 하나가 서 있다. 구조물의 이름은 ‘전봇대집’.

4월5일, 전봇대집 앞 ‘자루 텃밭’에서 개성 배추가 제일 먼저 파릇한 작은 싹을 틔웠다. 자루 텃밭은 쌀 포대, 커피 자루 등 ‘자루’를 재활용해 식물을 기르는 방식을 말한다. 이곳 50여 개의 자루 텃밭에는 토종 감자, 당근, 무, 땅콩, 구억 배추(제주 구억리 배추), 개성 배추, 화순 상추, 토종 노랑완두콩 등 한국 땅에서 자라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한 작물을 길러내는 토종 씨앗들이 심어졌다. 깨진 욕조 두 곳에는 물과 흙을 담고 연 씨앗을 뿌렸다.

오후 2시, 자루 텃밭과 전봇대집에서 장구 소리, 꽹과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늘 보고 별을 따고 땅을 보고 농사짓고 올해도 대풍이오, 내년에도 풍년일세.” 별달거리 노랫가락이 어우러졌다. 전봇대집에서 앞으로 이뤄질 다양한 ‘농사’가 잘 지어져 풍년이 되길 기원하는 시농제가 열렸다. ‘날라리 농부’ 김현승씨가 상모를 돌리고, 소란·유연·슬며시 등이 장구·꽹과리를 쳤다.

서울 은평구에 ‘도시 생태거점’을

이들은 대부분 ‘전환마을 은평’과 ‘동대문 옥상낙원 DRP’에서 도시의 전환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전환마을 은평은 도시를 생태적 마을로 ‘전환’하기 위해 삶의 태도와 인간 관계까지 함께 전환하려는 공동체다. 지난해부터 도시 곳곳 자투리 땅에 게릴라 텃밭을 만들고, 도시 곳곳 산과 들을 다니며 꽃과 풀을 일상에 활용하는 ‘풀학교’를 운영하며, 로컬푸드로 제철의 건강한 음식을 식탁에 올리는 동네 부엌 ‘밥·풀·꽃’을 열었다. 동대문 옥상낙원 DRP 역시 고층 빌딩이 숨쉴 틈 없이 들어선 도시 한복판에서 ‘옥상’이라는 돌파구를 찾아 옥상에서 먹거리도 키우고 지렁이도 키우고 춤도 추면서 도시에 숨통을 틔워왔다.

이들은 도시 사람들도 집 앞에 ‘문전옥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문을 열면 그 앞에 푸릇푸릇한 밭이 있는 상상을 한다. 그게 원래 사람 사는 곳이었다. 그래서 전봇대집을 택했다. 아직 공사 중인 듯한 철골 구조물을 이제 곧 초록으로 뒤덮을 예정이다.

전봇대집은 옛날 질병관리본부 부지에 있던 테니스장 자리를 활용해 세워졌다. 테니스장 조명등이 설치된 전봇대가 가운데 솟아 있어 ‘전봇대집’이다. 서울시가 ‘창의혁신공간’으로 시민들에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내준 이곳을 전환마을 은평 사람들은 초록으로 뒤덮인 도시의 생태 거점으로 만들어볼 생각이다. 전봇대 위아래로 토마토와 작두콩 등 덩굴식물을 심어 초록 잎들이 전봇대를 감싸안는다. “땅이 바뀌어나가는 상상만 해도, 싹이 올라오는 것만 봐도 심장이 콩닥콩닥해요.” 도시농부 소란이 말했다.

목·토요일 ‘누구나’ 농사 지으러 오세요
지난 4월5일 ‘전환마을 은평’과 ‘동대문 옥상낙원 DRP’ 회원들이 비계 등으로 지어진 철골 구조물 ‘전봇대집’에서 지을 농사가 ‘풍년’을 이루길 기원하며 시농제를 열었다. 정용일 기자

지난 4월5일 ‘전환마을 은평’과 ‘동대문 옥상낙원 DRP’ 회원들이 비계 등으로 지어진 철골 구조물 ‘전봇대집’에서 지을 농사가 ‘풍년’을 이루길 기원하며 시농제를 열었다. 정용일 기자

전봇대집 농사는 매주 목요일, 토요일마다 ‘누구나 와서’ 지으면 되는 공동체 농사다. 전환마을 은평 사람들이 목요일·토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까지 농사를 짓고 있으면 “같이 하러 왔어요” 말하고 참여하면 된다.

40대 유연(활동명)은 삶에 지쳐 직장을 그만두고 ‘치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동네에서 하는 생태학교, 텃밭교육 등을 신청했다. “뭐 하나 심어놓으면 내가 많은 것을 하지 않고 심지어 내가 뭘 잘못해도 농작물이 쑥쑥 자라는 게 신기했어요.” 농사하면서 사람들을 구속 없이 만나는 일은 마음을 단단하게 해줬다.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몸을 쓰면서 ‘치유’라는 게 됐죠.” 20대 농부 슬며시(활동명)는 “씨앗 하나가 사계절을 겪어내는 과정을 함께하면 그것만으로 엄청난 생명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선 네 밭, 내 밭이 없다. 소란은 요즘 주민센터 등에서 분양받아 가족 단위로 짓는 도시 텃밭에서 아쉬운 점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 농사만 짓고 가버려요. 내 가족의 건강한 먹거리, 또 아이들 체험, 그것만을 위해서 오는 거죠. 와서 식구들끼리 농사짓고 피크닉하고 쌩 사라져요. 원래 농사는 마을 사람들이 만나고 함께하는 일인데, 공동체는 없고 여전히 내 가족만 있는 텃밭이 아쉬웠어요.” 공동 경작하는 이유다. 소란은 “여기 장소가 서울혁신센터 앞마당이니 이곳을 오가는 청년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오다가다 참여하며 ‘농사일’을 가깝게 느끼고 사람을 만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전봇대집은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발라진 도시에 바람의 길, 물의 길을 새로 내고, 이 땅의 기운에 적합한 식물을 길러내며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꾀하는 작은 실험 장소다. 그래서 토종 씨앗만을 심고, 토종 씨앗을 채취하는 농사를 짓는다.

지난해 전환마을 은평이 채종한 갈현텃밭 옥수수, 갈현텃밭 수세미 종자를 비롯해 각 지역에서 어렵게 얻어온 의성 붕어초·가지, 화순 호박·노각 등을 모종을 내서 전봇대집 안팎에 심는다. “먹고살기 위한 농사를 해야 하는 시골에서는 씨앗을 채취하고 보존하기 위한 농사를 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요. 아주 극소수의 농촌에서만 토종 씨앗 보존이 이뤄지고 있어요. 우리가 평소에 농촌을 착취하고 있으니, 농촌에서 할 수 없는 걸 도시에서 보완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소란)

물고기 배설물 ‘비료’삼은 수경재배도

좁은 도시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실험도 한다. 전봇대집 2층에서 실험할 ‘아쿠아포닉’이 대표적이다. 전봇대집 아래에 연못을 파고 물고기를 길러 물고기들이 배출하는 질소오물 등이 포함된 연못물을 끌어올려 상추 등 엽채류를 키우려 한다. 물고기 배설물이 ‘비료’가 되는 셈이다. 각종 약물을 써서 공장식 수경재배를 하는 방법 대신 생태적 수경재배를 실험해보는 것이다.

“여기는 꼭 반드시 잘할 필요가 없는 곳이에요. 우리가 실패하고 틀려도, 식물은 싹을 틔우고 쑥쑥 자라나니까요. 자연을 믿으면 돼요.” 두어 달만 지나면, 비닐로 뒤덮인 삐죽삐죽한 철골 구조물이 초록 생명으로 뒤덮인다. 상상만 해도 ‘숨통이 트인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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