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23일 서울 마포구 ‘미디어카페 후’에서 만난 심용환 강사. 그는 뉴라이트의 본질을 ‘낡은 정서’라고 잘라 말했다. 류우종 기자
민중의 삶, 그 혼불을 응시하며 10권에 이르는 대하소설 을 써낸 작가 최명희(1947~98)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1990년 ‘작가의 말’)
2015년 ‘혼불’은 능욕당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11월10일 국무회의에서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부르댄 뒤 “이것은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라고 명토 박았을 때 혼불은 자지러졌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혼불을 일러 “사람의 혼을 이루는 바탕. 죽기 얼마 전에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하는데, 크기는 종발만 하며 맑고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고 한다”고 풀이한다. 역사를 단일한 해석으로 강제하고 교과서를 하나로 통폐합하려는 국정교과서 추진은 한반도 역사의 혼불을 짓밟는 짓이라는 비판에도 정권은 ‘복면 집필’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역사 전문 강사 심용환(38)씨가 분노한 지점도 마찬가지다. 사실과 해석이 씨줄과 날줄처럼 직조되는 역사학의 들보를 허물어, 친일-독재-반민주를 잇는 ‘반민족의 삼각형’을 완성하려는 정권의 시도에 부단히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 그가 지닌 무기는 단 하나, 사실이다. 그가 두 달 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카톡 유언비어 반박문’이 한 증거다. 날조돼 유포된 13가지 문제를 지적한 뒤 그는 역사 분야의 ‘아이돌’이 되었다.
최근 그는 (생각정원)을 펴냈다. 부제 ‘권력은 왜 역사를 장악하려 하는가?’에 책의 알짬이 담겼다. ‘심용환 역사&교육연구소’ 소장인 그는 15년 전 대학생 인문학 공동체 ‘깊은 계단’을 만들어 학생들과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의 블로그(lyanga.blog.me)에도 수험생과 시민을 위한 역사 정보가 담겨 있다.
12월23일 서울 마포구 ‘미디어카페 후’에서 심씨를 만났다. 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디스팩트2-정기고’ 녹음을 겸해 그의 생각을 들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 역사가 자랑스럽다. 고통에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극복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사실 정신없이 왔다. 역사 전공자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떤 목적으로 국정교과서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했다. 굉장히 많은 기사들이 공방전을 벌였는데, 다루는 얘기는 더 단순해지고 사람들은 정보에 더 목말라하더라. 한 번에 끝날 문제가 아니어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부제(‘권력은 왜 역사를 장악하려 하는가?’)에 담은 뜻을 설명한다면. 역사는 언제나 권력의 관심사였다. 아이로니컬한데, 유한한 권력이 무한한 역사를 장악하고 싶은 게 본질이다. 그게 우리 안에서도 또다시 시작된 거다. 역사 전쟁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거의 매 정권마다 있었다. 아주 새로운 사건은 아니다. 사건 자체가 이번에 격렬한 건 우리 사회가 민주화돼서 강렬한 저항이 있기 때문이다.돌아가실 분들이 살아갈 사람 규제책 앞부분에 유럽의 사회적 합의 사례를 소개했는데.
배울 건 배워야 한다. 세대의 문제가 있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도 대학에서 명예교수다. (국정 역사 교과서 집필진으로 거론된) 신형식·최몽룡 이분들도 명예교수다. 그 세대가 갑자기 부활해서 후배들에게 ‘너네 틀렸어’ 하고 있다. 돌아가실 분들이 살아갈 사람들을 규제하고 있다. 루쉰이 현대 중국에서 유교를 비판할 때,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먹는 종교라고 했다. 유럽은 아니다. 새로운 세대가 기성 주류가 되면 새로운 세대의 논쟁이 이슈가 돼서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은 모두 6부 16장으로 짜여 있다. 각 부의 제목만 살펴봐도 글의 주제가 선명히 드러나도록 편집됐다. ‘세계의 역사 논쟁들’을 시작으로 ‘과연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종북 좌파인가?’를 톺아본다. 이어서 뉴라이트 역사학의 문제를 ‘학문이 아닌 권력을 지향’하는 지점에서 비판했다.
현행 한국사의 핵심 쟁점을 ‘역사학계 대 뉴라이트+보수 진영 대연합’으로 판단한 뒤 진짜 쟁점과 가짜 쟁점을 구분해 설명했다. 특히 책의 마지막 6부에서는 2013년 거센 파문을 일으켰던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최초 검정 통과본)를 상세히 분석·지적했다. 책 전체 분량에서 3분의 1에 해당할 만큼 세밀하게 사실관계를 따졌다.
뉴라이트 쪽은 ‘우리 역사를 자랑스럽게 쓰자’고 한다. 그분들이 반칙하는 거다. 스페인 프랑코 정권이 장기 독재를 했다. 21세기 들어 프랑코 정권의 긍정적 면도 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우리와 스페인이 다른 것은, 스페인에서는 여러 굵직한 학자들이 충분한 연구 성과로 얘기한다. 치열한 학계 논란으로 합의 과정을 거쳐간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실체가 없다. 자랑스럽다는 건 그들이 만든 말이다. 낡은 정서가 본질 아닐까. 일반인들이 진보·보수·뉴라이트를 구분할 수 있는 쟁점은 무엇인가.냉정히 말하면 역사학계 대 보수대연합이다. 국정교과서 논쟁으로 우리 사회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싸우면서 지점이 단순해져버린다. 유관순이 교과서에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는 식이다. 이걸로 편 가르기를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하나의 작은 단위를 두고 맞냐 틀리냐고 한다. 정권사에 매몰되면 민중의 삶이 역사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영화 (2000)가 있다. 인물들이 옷을 멋지게 빼입고 나온다. 처음엔 완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더라.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게 아나키즘이다. 그러면 남는 건 개인의 무한한 자유뿐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영화 (2015)에서도 김원봉 역의 조승우가 멋있게 입고 나온다. 이것도 연구 주제가 될 수 있는 거다. 이봉창·윤봉길 의사가 일제에 잡힌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 화려한 민족주의적 승리만 기억하지만, 그 후폭풍은 다 그들 개인이 감당했을 거다. 또 인권이라는 주제에서 보면, 전제군주로서 백성을 동원해 영토를 넓힌 광개토대왕을 반인권적·침략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나는 국정화만 반대할 거야’는 무책임시민들은 지금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국면을 어떻게 봐야 하나. 두 가지 최악의 상황이 있다. 하나는 북한 모델이다. 정치권력의 이해관계에 딱 붙어 있는 교육 구조다. 그게 얼마나 사회를 병들게 하는지는 북한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중국·일본 동북아 세 나라가 다 자기 나라의 영광을 위한 역사학으로 가고 있다. 중국은 찬란한 중화인민의 왕조를 세우자고 하고, 일본은 교과서만 바꾸는 게 아니라 헌법도 개정하려 하고… 특정한 권력적 목표를 위해 민주 사회의 기초적 시스템을 바꿔나가고 있다. 섬뜩하다. 한국 사회가 혹시 북한이나 일본처럼 되지 않을까 굉장히 두렵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국정화만 반대할 거야’라는 게 좀 무책임하지 않을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원래 우리나라 역사교육이 좋지 않았다. 현행 검인정 교과서도 이상적인 교과서가 아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다음 단계는 교사들 내에서만 운영되는 게 아니라 일반 국민도 참여한 교육제도 개선 담론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지배권력이 역사를 지하에 파묻고 권력욕으로 쌓아올리려는 거대한 성채가 있다. 심용환씨는 후속편을 예고했다. 저들의 성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전쟁’이다.
“유럽의 역사학은 국가 주도형에서 학계 주도형으로 바뀌었다. 동아시아 모델이 여전히 국가 주도형이라면 북한은 국가 주도형을 넘어 독재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왜 국가는 역사에 개입하려는 것일까. 권력은 왜 역사학을 손안에 움켜쥐려고 하는 것일까. 역사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21쪽)
“왜 역사가 권력자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가. 농민, 노동자, 인민, 민중, 서민, 시민, 여성 등 다양한 관점과 장르로 역사를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은가. 역사 공간 전체의 변동을 다루어볼 수도 있지만 과거 역사가들이 권력자에게 집중했듯 근대 이후의 역사학은 다양한 계층과 계급을 주제로 역사를 연구하며 이는 이미 너무나 오래된 관행이다.”(70쪽)
“뻔히 옳고 그름과 우세가 보이지만 보수 언론은 상황을 간단히 정치적으로 바꿔버린다. 적극적으로 뉴라이트적인 입장을 반영하며 나머지 학계는 쉽사리 ‘좌파’로 매도한다. 그렇게 언론과 정치권의 지원을 받으며 뉴라이트 역사학은 실제로 그들이 가진 지위와 위치, 수준에 비해 한없이 팽창되어 학계와 교육계를 흩트려놓고 있다.”(109~110쪽)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의 폐해는 현재보다 미래에 더 크다. 더욱더 많은 가능성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교육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암기 교육의 문제, 학교와 교사의 문제 등등 순수하게 교육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문제가 산적해 있다.”(213~214쪽)
“사회주의 역사를 박헌영, 김일성만으로 제한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역사 왜곡이다. 오늘날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과 전혀 다른 것이 당시의 사회주의 역사다. 현재의 국가 상황 때문에 충분히 서술을 못한다면 최소한 폄하하고 왜곡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북한보다 우리가 더욱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학문적으로 탁월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289쪽)
“미래에 우리가 못사는 나라로 전락하거나 구한말과 같은 비극을 맞이한다면 그때 남는 것은 ‘자학’밖에 없는 것인가. 생각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 사고를 보다 다양하게 하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힘’이다. 뉴라이트 진영은 근본적으로 그 힘이 없다.”(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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