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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들의 뜻은 을 스스로 묻자

국민 삶 추락시킬 노동시장 구조 개편 밀어붙이면서도 국민 의견 묻지 않는 박근혜 정부… 정치적 필요에 따라 동원돼온 국민이 나서서 정부 노동정책 실체 밝혀야 할 때
등록 2015-11-12 15:29 수정 2020-05-03 04:28
10월7일 시작된 ‘을들의 국민투표’가 종반(11월12일→11월25일 종료일 연장)을 향하고 있다. 을들의 국민투표(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 주관)는 ‘쉬운 해고’와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파견 확대 등으로 대표되는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편에 대해 국민의 뜻을 묻는 절차다. 10월7일 5개소를 시작으로 설치된 투표소는 11월5일 현재 전국 2015개소로 확대됐다. 국민투표실행본부(실행본부)는 투표 종료일까지 3천 개소로 늘린다는 방침이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을 ‘개혁’ 혹은 ‘재앙’으로 평가한 전국의 투표용지는 11월28일 서울광장으로 모아져 공개 개표된다. 실행본부는 투표 결과를 청와대와 국회에 전달하는 동시에 국민의 뜻을 반영한 법 개정안을 의원입법으로 발의할 계획이다. 투표 참여를 원하는 사람은 실행본부 누리집(http://votechange.kr)의 ‘투표함 상황판’에서 투표소 위치를 확인한 뒤 방문 투표할 수 있다. 누리집을 통한 온라인 투표도 가능하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가 ‘국민투표’의 의미를 살피며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글을 에 보내왔다. _편집자
한겨레신문사에 마련된 ‘을들의 국민투표’ 기표소에서 직원들이 박근혜 정부 노동정책을 평가하는 투표를 진행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한겨레신문사에 마련된 ‘을들의 국민투표’ 기표소에서 직원들이 박근혜 정부 노동정책을 평가하는 투표를 진행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가장 최근의 국민투표는 1987년에 실시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이 도화선이 되었다. 헌법 개정을 묻는 국민투표의 결과로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가 도입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도 헌법에 명시되었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 및 검열 금지,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 금지 규정이 헌법에 신설되었고 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제도도 도입되었다. 중요한 역사가 국민의 힘에 의해 시작되었고 국민의 손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고 역사적인 사건이 내 기억에는 없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을, 당시 열 살이었던 나는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

국민을 들러리 세우는 대통령

헌법은 헌법 개정 외에도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투표의 절차와 방식을 정한 국민투표법까지 제정되어 있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친 대통령은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대한 반대 물결이 거세게 일었을 때도 정부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지 않았다. 절반 이상의 국민이 반대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도 교육부의 행정 예고와 고시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국가 안위라는 것을 그저 ‘통일’ ‘국방’의 개념으로 좁혀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독재 정권의 수장들이 국민투표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일까.

그간 정부의 태도를 보면 둘 다 아닌 것 같다. 정치권은 선거 때만 피하면 민심을 무시해도 별 지장이 없다는 것을 터득했다. 반대로 국민은 민심을 받아줄 이렇다 할 창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때 필요한 것이 국민투표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은 국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절대다수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정책에 대해서는 국민투표에 부쳐야 옳다. 특정한 국정 사안에 대해 국민이 직접 그 정책 결정에 참가함으로써 주권을 직접적으로 행사하고 실현하는 것이 국민투표이기 때문이다.

지난 8월6일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메르스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국민 사과일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담화의 80%를 노동 ‘개혁’이 차지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대수술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목한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는 정년 보장과 임금 보장이었다. 우리 노동법제가 택하고 있는 정년 보장과 근무시간에 기반한 임금체계를 버리는 대신, 실적과 능력에 따라 근무 여부와 임금 액수를 결정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유로운 해고 제도를 택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예를 들었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 정부가 예로 든 OECD 국가들은 사회안전망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직장을 잃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대한민국에서는 직장을 잃는 것이 빈곤의 문을 여는 것이요, 비정규직이 설움의 상징이다. 사회안전망이 없이 고용만 유연화되면 직장은 정글이 되고, 동료는 나의 적이자 경쟁자로만 남게 된다. 노동자는 임금을 깎이지 않기 위해, 해고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내가 노력하는 만큼 주변 동료들도 노력하기 때문에 경쟁만 치열해지고 노동강도만 세질 뿐이다. 상사의 눈 밖에 나서도 안 된다. 회사에 잘 보이는 사람만 살아남는 무한 경쟁, 이러한 일대 대변환을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가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국민은 ‘협조와 협력의 대상’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우리 경제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재도약을 위한 정부의 국정 운영 방안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계획과 추진은 국민 여러분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적극적인 동참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것도 국민 여러분의 협조와 협력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국민투표였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투표를 실시하지 않았다. 노·사·정 합의라는 구색만 갖추어서 밀어붙이고 있다. 전문가로부터 의견을 수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새누리당은 연내에 근로기준법을 비롯해 5개 노동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한다.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손 놓고 있을 따름이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던 노·사·정 합의와 정부의 뜻대로 움직이는 전문가들이 과연 국민의 의사를 대신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국회의원들한테 당신들이 그러고서도 국민의 대표라고 생각하는지 따지고 싶다.

그래서 이해 당사자인 국민이 직접 나섰다. 국민투표라는 형식을 갖춰서 말이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이 옳은지 그른지 국민의 의견을 모으고 확인하기 위해 노동시민단체를 주축으로 지난 10월7일부터 ‘을들의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있다. 노동시민단체가 주축이라지만 말 그대로 국민 모두가 주인공이다. 투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원하는 사람은 투표함을 설치할 수 있다. 국민투표실행본부에 신청하면 누구나 기표소, 투표함과 투표용지 등이 담긴 상자를 받을 수 있다. 전남 순천의 한 의사는 병원에 투표소를 설치했고, 제주의 한 작가는 운영하는 카페에 투표소를 설치했다. 어느 부부는 자기가 사는 동네에 거리 투표소를 설치했다. 직원 수는 열 명 남짓하지만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도 투표소를 설치했다. 교회, 어린이집, 학교, 식당, 카페, 술집, 사무실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에 투표소가 설치되어 있다. 투표함을 선물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 칼럼니스트는 고용노동부 광고에 출연한 배우 임시완과 황정민에게 투표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온라인 투표함도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다양한 방식으로 투표에 참여하면 된다. 투표에 참여하는 데 연령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청소년들이 나섰을 때에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난 역사를 통해 확인했다.

국민의 운명은 국민의 손으로

‘을들의 국민투표’는 11월25일 자정까지 진행된다. 1987년 국민투표가 중요한 역사를 마무리하는 작업이었다면 이번 ‘을들의 국민투표’는 중요한 역사를 만드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시작이 될지 안 될지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윤지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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