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5일 네팔 예술단체 아트리(ARTREE) 청년들이 서울 성북구 폐기물 처리 시설 옥상에 올라 지역 예술인들과 춤을 추고 있다. 신소윤 기자
‘룽다’라고 했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엔 늘 오색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히말라야에서는 불·흙·물·하늘·구름을 상징하는 빨강·노랑·초록·파랑·흰색의 천 조각을 중요한 길목이나 언덕에 줄지어 걸어놓는다. 여기에 소원을 써놓으면 바람이 사람들 대신 신에게 달려가 전해준다고 한다. 바람에 천이 펄럭이는 소리가 달리는 말발굽 소리와 같다고 해서 바람의 말, 룽다라고 부른다.
지난 4월25일 네팔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수천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람들은 이날 이후로 일상의 소소한 소원을 적었던 오색 깃발에 누군가의 회복 혹은 평안한 영면을 빌었다. 여기에 교육, 청년, 소통, 회복, 희망이라는 다섯 개의 단어를 나눠 적은 이들이 있었다. 9월30일 한국을 찾아 10월8일까지 9일간 머무르며 한국의 청년들과 공동체의 재건과 회복을 논의한 네팔 청년 10명이 그들이다. 현대미술을 하는 청년 예술단체 아트리(ARTREE)와 포터 출신 셰르파 청년 단체가 서울시의 초청으로 마을살이 체험을 했다. 이들은 마을과 학교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자원을 공유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데서 재건의 희망을 찾는다.
10월5일, 서울 성북구의 폐기물 처리장 한켠에 마련된 예술인들을 위한 작은 공간. 복도에 걸린 오색 깃발의 끝에 다다르자 네팔 비영리 청년 예술단체 아트리 회원들과 성북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모여 있었다. 서로 소개를 마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테이블 위에 빈 알루미늄 기름통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목장갑을 하나씩 나눠 꼈다. 탕탕탕, 아직 서로의 이름도 제대로 외지 못한 서먹한 기운을 빈 깡통을 두드리면서 날렸다. 이날 모임의 주제는 ‘생존 워크숍’. 적정기술을 이용한 난로를 만들었다. 깡통에 구멍을 여러 개 뚫고 뚜껑을 자르고 끼우는 수고를 1시간 정도 거치면 난로가 완성된다. 아주 작은 불씨와 연료로 라면 하나를 팔팔 끓이고도 남을 화력을 발휘한다.
작업에 참여한 히트만 구룽은 한국 청년들에게 네팔 주민들의 상황을 전했다. “지진으로 파괴된 일상이 회복되기도 전에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인도와 가까운 테라이 지역은 인도와 왕래가 끊겨 산업이 중지되고 가스도 기름도 다 떨어졌다.”
네팔 남부 테라이 지역은 여름에는 40℃가 넘어갈 정도로 뜨겁지만, 겨울에는 영하에 가까워지며 큰 기온차를 보인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도 단열과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혹한이 아닌데 동사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다. 그렇잖아도 열악했던 사회기반시설이 지진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됐다. 아트리 멤버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삶에 밀착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히트만은 “가스를 쓰지 않고 아주 적은 나무로 불을 피울 수 있는 기술을 알게 돼 기쁘다”며 이날 배운 대안 기술을 네팔에 가져가 여러 실험을 해보겠다고 했다.
난로 만들기를 끝내고 나니 해가 기울며 공기가 서늘해졌다. 한국 청년 예술인 한 명이 보디 퍼커션을 제안했다. 몇 가지 간단한 규칙에 맞춰 손뼉을 치고 발을 굴렀다. 리듬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금세 들통이 났다. 엉거주춤 반 템포씩 늦는 이들은 에라 모르겠다, 웃음으로 때웠다. 박장대소하며 서로 손을 잡고 걸음을 맞춰가며 몸을 움직였다.
리듬과 몸짓을 만드는 데 집중하니 품고 있던 고민과 걱정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아트리 소속 여성 예술가 쉴라샤 라즈 반다르는 이 시간을 잘 기억해뒀다가 무너진 마을의 아이와 여성들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진으로 상처 입은 ‘어머니들’을 주목했다.
실뜨기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은 대부분 집 안에서 지진을 겪었다. 네팔 사람들에게 집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건물이 붕괴됐다는 얘기가 아니다. 100년이 넘은 허름한 흙집일지라도 이들에게 집은 거대한 기억, 전통, 삶의 전부다. 무너진 집 앞에서 사람들은 “이제 우리 인생은 끝났네”라며 삶의 희망을 놓아버렸다. 일부 여성들은 자살을 시도했다. 집과 학교와 마을회관이 붕괴됐다. 같이 밥 먹을 곳, 이야기를 나눌 곳이 없었다. 사람들의 마음도 무너졌다.
아트리 멤버들은 집을 잃은 이들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서로를 위로하는 작은 축제를 열었다. 재건을 위해 마을로 깊숙이 들어온 청년들은 무너진 마을에 대한 흔적을 모으는 작업을 하고, 지진으로 잃은 친구와 이웃을 기억하는 작업을 했다. 무너진 담벼락에 살아남은 아이들의 삶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마을을 다시 예쁘게 만드는 작업을 했다. 문화와 예술이 주저앉은 사람들을 일으키고 웃을 수 있게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보면 끊어진 관계도, 무너진 공동체도 회복되리라 믿는다.
적정기술 보급 운동을 하는 문화예술단체 유알아트의 김영현 대표는 이날 아트리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며 “관계의 재생을 도모하는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화·예술로 연대하며 마을에 스며들어 개발이 아닌 재생의 방식을 통해 마을 재건에 손을 보태는 아트리 청년들을 응원했다. 이날 김영현 대표의 집에서 밤을 보낸 청년들은 태양광을 이용한 페트병 조명 등 적정기술 배움의 시간을 연장했다.
아트리 멤버들이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면 어느 한쪽에선 마을을 깨끗하게 정비하는 이들이 있었다. 셰르파 청년들은 지진이 일어나 무너진 건물에 서서 다시 쇠망치를 들어야 했다. 금이 간 벽으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건물들이 위험했다. 미처 주저앉지 못한 집을 그들 스스로 깨끗하게 무너뜨리는 일은 가슴 아픈 작업이었다. 몸이 아픈 주민들을 돌보고 대피소를 지으면서 이들은 당장의 구호 작업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더 힘을 쏟아야 할 일이 있다는 데 생각이 모아졌다. 셰르파 청년들은 교육을 통한 마을 재생과 관계 회복을 꿈꾼다.
상게, 펨바, 니마, 도르지, 소남 이들 다섯은 가족은 아니지만 모두 같은 성을 쓴다. 티베트어로 ‘동쪽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의 셰르파는 티베트계 네팔인을 통칭한다. 주로 험하고 높은 히말라야 산악지대에 거주하고 에베레스트 등반객을 돕는 포터로 활동하며 생계를 잇는다. 상게, 펨바 등은 포터로 일하며 대학 생활을 병행한다.
이들은 늘 열악한 교육 환경에 놓여 있었다. 상게(30)는 도시의 대학에 진학하기 전, 책 한 권을 사기 위해 2~3일씩 걸어 산 아래 시내로 내려가야 했다. 그나마 찾는 책이 있으면 다행인데, 없으면 헛걸음이었다. 통학하는 데는 3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발을 혹사하며 학교에 가도 좋은 선생님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이들은 마을과 학교가 연계해 아이들을 품어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돌봄과 배움, 회복과 희망을 같은 선상에 놓고 얘기했다.
소남(25)과 펨바(23)는 마을 도서관을 짓는 꿈을 갖고 있다. 펨바는 이번 방문을 통해 마을의 작은 도서관을 돌아보며 ‘이건 도서관인가, 아니면 다른 세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책, 필요한 책에 허기져 있던 이들은 단순히 책만 갖다놓으면 도서관이 완성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준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보며 도서관과 일상, 책과 삶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10월7일에는 네팔 예술 청년들과 셰르파 청년, 서울의 작은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소남은 8일간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네팔과 시스템, 시간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다르다는 게 인상 깊었다. 한국에서는 1분 늦으면 불평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1시간 늦었을 때 미안하다고 하면 끝이다. 우리는 늘 불안정한 시스템 안에 있는데, 한국의 정비된 시스템이 부러웠다.”
모든 게 잘 짜인 대도시 서울이 좋지만 한편으론 분절된 관계, 배움보다는 경쟁에 가까운 교육 시스템이 숨 막히기도 했다. 펨바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네팔에서는 돈을 버는 것, 좋은 옷을 입은 것을 행복인 줄 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다른 것 같다. 처음엔 도대체 한국 사람들은 뭐하고 살까, 생각했다. 차도 집도 돈도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더 할 일이 있을까. 그런데 며칠 있어보니 지진으로 몸도 마음도 힘든 우리보다 한국 사람들이 더 힘든 것 같았다.” 쉴라샤는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의 전통이나 문화에 대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2008년부터 한국 청년들과 교류하며 네팔과 한국을 오갔다는 상게는 “물질적 시스템이 잘 갖춰지려면 다른 많은 것이 망가진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네팔도 빨리 발전해야 하지만 마을마다 다른 좋은 문화를 지켜가면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게 예술과 교육의 힘이다”라고 덧붙였다.
네팔 청년들이 영감을 얻은 순간은 서울의 반짝이는 도시 경관을 볼 때, 잘 짜인 시스템을 경험할 때가 아니었다. 도시의 빈 곳, 낡은 곳, 그늘진 곳에서 오히려 희망의 빛을 찾았다. 네팔의 낮은 지붕 집들과 꼭 닮은 서울 양천구 목2동, 고층의 주상복합건물 사이에 있는 키 작은 빌라촌 마을살이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강북구 수유동에서 활동하는 청년문화기획자들과 연대했다. 서울 동대문구 신발도매상가 B동 옥상의 대안공간 동대문루프탑파라다이스(DRP)에서 다른 생태계를 꿈꾸는 사람들을 만나며 공존의 싹을 보았다.
그렇게, 너무 다른 시공간에 사는 두 나라의 청년들은 같은 답을 공유하며 8일간의 여정을 마쳤다. 고독한 경쟁 사회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도, 무너진 마을 공동체를 재건하는 힘도 작은 관계와 소통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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