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 좀 치워주세요.”
SBS 드라마 에서 남편 최진언(지진희)은 아내 도해강(김현주)과 이혼하기 위해 아버지(독고영재)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이혼하지 않겠다고 아내가 버티며 시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한 상태였다. 남편의 모습을 넋 나간 사람처럼 지켜보던 아내는 결국 협의이혼 서류에 지장을 찍는다. 불륜을 저지른 남편이 헤어지지 않겠다는 아내와 이혼하는 게 한국에서는 그렇게 어렵다.
한국에서 이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협의이혼과 재판상 이혼이다. 협의이혼은 원칙적으로 두 사람이 합의하면 된다. 결혼생활의 파탄이 누구의 잘못인지 법원이 따져묻지 않는다. 문제는 한쪽 배우자가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다. 그러면 부부는 이혼법정에 서야 한다. 이곳에서 상대 배우자의 잘못을 일일이 찾아내고 가정 파탄의 책임은 상대 배우자에게 있다고 소리 높여야 한다. 법원은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별거해 결혼관계가 완전히 끝났더라도 마찬가지다. 1965년 9월부터 50년간 대법원 판결은 유책주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예외적 허용 기준 추가로 연장된 유책주의 수명지난 9월15일 틈새가 생겼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용덕 대법관)에서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폭넓게 인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유책주의(양승태 대법원장 등 7인)와 “결혼생활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탄 났다면 이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파탄주의(김용덕 대법관 등 6인)가 팽팽히 맞선 것이다. 두 여성 대법관의 의견도 나뉘었다. 박보영 대법관은 다수의견에, 김소영 대법관은 소수의견에 섰다. 다수의견이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는 ‘예외적 허용 기준’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으로 유책주의의 수명을 가까스로 연장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이 유책주의에서 파탄주의 쪽으로 반 발쯤 움직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은 대법원 판결의 핵심 쟁점을 사례와 문답으로 풀어봤다.
Q. 가정이 파탄 났는데 왜 이혼할 수 없나.A. 민법 제840조는 부부 중 한 사람이 법원에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경우를 6가지로 규정한다. ①배우자의 부정한 행위가 있을 때 ②배우자가 악의로 다른 일방을 유기할 때 ③배우자 또는 그 직계존속으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④자기의 직계존속이 배우자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⑤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아니할 때 ⑥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다. ①~⑤는 유책주의가 분명하지만 ⑥은 파탄주의로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⑥을 “유책 사유를 끝없이 나열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민법은 기본적으로 유책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지난 50년간 재판상 이혼은 유책배우자가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해왔다.
Q. 이번에는 왜 대법관 6인이 소수의견을 냈나.A. 이혼 과정의 ‘폭력성’ 때문이다. 유책배우자라고 밝혀지면 법원이 재판상 이혼을 허용하지 않으니까 이혼소송 절차에서 부부는 승소하기 위해 상대 배우자의 잘못을 크게 부각시킨다. 이혼법정이 치열한 싸움터가 되는 이유다. 책임 공방에 이어 비난과 악감정이 쏟아지고 결국 부부는 더욱 적대적 관계가 돼버린다. 소수의견은 “이혼소송의 심리가 과거의 잘못을 들춰내는 것에만 집중된 나머지 이혼 과정에서의 갈등 해소, 이혼 후의 생활이나 자녀의 양육과 복지 등에 관해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소홀해지는 폐단이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혼인의 가치보다는 개인의 행복 추구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유책주의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Q. 그럼에도 다수의견(대법원장 등 7인)은 왜 유책주의를 고수했나.A. 가정 파탄에 책임이 없는 배우자나 자녀를 위한 보호장치가 충분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바람피운 남편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면 생계·자녀양육 수단이 없는 아내가 무일푼으로 쫓겨나는 ‘축출이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재산분할이나 위자료로 법원이 상대 배우자나 자녀를 배려할 수는 있지만 입법적 장치가 부족한 게 현실이다. 영국과 독일은 배우자나 자녀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거나 가혹한 결과를 낳을 경우 이혼을 제한하는 ‘가혹조항’이 있고, 미국과 독일, 프랑스는 이혼한 뒤에도 배우자를 부양할 책임을 인정하는 제도가 있다. 소수의견은 재산분할과 정신적 위자료, 면접교섭·양육비 제도를 강화하면 축출이혼의 위험성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지만 다수의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A. 최근의 사례다. 대학에서 만난 아내와 남편은 1985년 혼인신고를 했다. 두 아이를 낳자 시아버지가 자기 명의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아들 가족이 살도록 했다. 아내가 시부모와 갈등을 겪자 남편은 가출해 돌아오지 않았다. 몇 년 뒤 다른 여성을 만난 남편은 다시 두 아이를 낳았다. 남편의 가출 뒤 아내는 시부모와 관계를 개선했고 병간호까지 도맡았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남편은 가출 22년 만에 아내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상속받아 경매에 넘겼다. 법원은 남편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남편의 태도를 볼 때 아내가 ‘축출이혼’을 당해 경제적 곤궁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이혼 청구 인용은 사회정의에 반한다”고 판단했다.
Q. 유책배우자는 이혼할 방법이 없나.
A. 있다. 첫째 협의이혼이다. 유책배우자라도 상대방과 합의해 이혼할 수 있다. 진솔한 마음과 충분한 보상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면 된다. 2014년 현재 전체 이혼의 77.7%가 협의이혼이다. 둘째, 오기나 보복적 감정으로 상대방이 이혼을 거부하는 경우 법원이 예외적으로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한다. 이 원칙은 1987년 대법원 판결에서 처음 밝혔다. 셋째, 유책배우자의 책임이 반드시 이혼 청구를 배척할 정도로 남아 있지 않은 경우다. 예를 들어 △유책배우자가 상대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충분한 보호와 배려를 했거나 △혼인관계가 파탄 난 지 오래돼 상대 배우자의 정신적 고통이 상쇄됐다면 예외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9월15일 대법원 판결에서 다수의견이 추가한 예외 사유다.
Q. 보복으로 이혼을 거부하는 사례는.
A. 1987년 대법원 판례를 보자. 부부는 결혼 1년 만에 딸을 낳았지만 의사인 남편에게 다른 여성이 생겼다. 가정을 소홀히 한다고 나무라는 아내에게 남편은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다. 1983년 남편이 집요하게 이혼을 요구하자 아내는 협의이혼을 거절하면서 남편을 간통죄로 고소했다. 이혼심판도 청구했다. 남편이 용서를 구했지만 끝내 간통 고소를 취하하지 않았다. 남편은 간통죄로 실형을 살았고 의사 면허까지 박탈됐다. 가석방으로 출소한 남편이 집에 찾아갔지만 아내는 냉대했고 결국 부부는 별거했다. 남편이 청구한 이혼소송에서 대법원은 “아내가 오기나 보복적 감정으로 표면적으로는 이혼에 불응하지만 실제로는 혼인을 계속할 수 없는 행위를 했다. 상대 배우자의 이혼 의사가 객관적으로 명백한 경우에는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라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파탄주의 국가 이혼 기준은 ‘별거 기간’Q. 이번에 대법원이 추가한 예외 사례는.A. 대법원은 최근 몇 년간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는 범위를 꾸준히 넓혀왔다.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그 기준을 더욱 분명히 밝힌 셈이다. 2010년에 74살 남편이 46년간 아내와 별거하다가 이혼을 청구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부부는 1958년 결혼했는데 아이가 없었다. 아내가 시부모를 모시고 고향에 머무는 동안 남편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부터 다른 여성과 동거해 2남1녀를 낳았다. 대법원은 남편의 이혼 청구를 인용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상대 배우자의 정신적 고통이 상쇄됐다고 본 것이다.
Q. 별거 기간이 중요한가.A. 그렇다. 파탄주의를 채택한 나라들도 ‘별거 기간’을 이혼 기준으로 삼는다. 독일 민법은 “부부가 3년 이상 별거한 경우에는 그 원인에 관계없이 혼인 파탄으로 보고 이혼을 허용한다”고 돼 있다. 미국도 주마다 ‘60일에서 5년’으로 기준은 다양하지만 별거 기간이 길어지면 혼인이 파탄 난 것으로 본다. 영국은 그 기준을 별거 기간 5년으로 정했지만, 이혼 합의가 있으면 2년으로 단축한다. 일본도 1987년부터 “부부의 별거 기간이 상당히 장기간”이면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인다. 한국 대법원이 46년간 별거한 부부의 이혼을 허용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별거 기간이 10년 이상이라도 이혼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Q. 어떤 경우인가.
A.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그렇다. 원고(남편)와 피고(아내)는 15년째 별거 중이었다. 부부는 1976년에 결혼해 세 자녀를 뒀지만 남편이 1996년부터 다른 여성을 만났다. 그 여성이 아이를 낳자 남편은 집을 나왔다. 그 뒤 아내에게 월 100만원가량의 생활비를 지급했다. 남편이 신장병 진단을 받고 2011년 본처의 자녀들에게 신장 이식을 해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이혼소송을 냈다. 대법원이 원고의 청구를 최종 기각했기에 협의이혼밖에는 길이 남지 않았다.
별거 기간이 28년인데 이혼을 허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1970년에 결혼해 세 자녀를 뒀지만 아내는 1977년에 가출했다. 시부모와의 결등, 어려운 가정형편 등이 불화의 원인이었다. 1984년에 다른 남성을 만나 동거하며 아들을 낳고 키우다가 2003년 남편을 상대로 이혼을 청구했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7년에 불과했지만 다른 남성과의 사실혼 관계는 20년 이상 지속했기 때문이다. 1심과 2심은 이혼을 허용했지만 대법원이 판결을 뒤집었다. 유책배우자라는 이유에서였다.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Q. 파탄주의 도입은 언제 가능한가.A. 헌법재판소는 간통죄에 대해 4번의 심판에서 합헌을 결정했다가 올해 2월 위헌으로 결정했다. 재판관 구성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유책주의 판결도 대법관 구성이 바뀌면 파탄주의 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 이번에 유책주의와 파탄주의가 7 대 6으로 팽팽히 맞선 점만 봐도 그렇다. 마지막 순간 캐스팅보트를 쥔 양승태 대법원장이 유책주의 쪽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 수명이 어렵사리 연장됐다. 하지만 유책주의는 ‘시한부’임이 틀림없다. 다수의견도 “(파탄주의를) 아직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표현했다. ‘축출이혼’을 방지할 보호장치를 언제,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과제로 남았을 뿐이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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