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은 2002년 민권사회부 기자였다. 김훈은 이렇게 적었다. “18년 전의 사실을 진술하는 인간의 언어는 허약할 수밖에 없다. 양심 또한 고립된 상태에서는 허약하다. 이 허약한 언어를 서로가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의 말도 살아남기는 어려워 보인다. 말로써 말을 부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렇게 쌓여가는 말의 쓰레기는 사회적 비극이다. 이 비극 속에는 사실을 진술하는 언어와 욕망을 진술하는 언어가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있다. 지금, 허 일병 죽음의 진실은 이 말들의 쓰레기 위에서 표류하고 있다.”(2002년 10월31일치 ‘거리의 칼럼’ ) 허 일병은 누구인가. 2002년에서 다시 13년이 지났다. 허 일병 죽음의 진실은 무엇인가.
1984년 첫 정기휴가 전날 죽은 허 일병
육군일병 허원근은 죽었다. 22살이었다. 가슴 양쪽과 머리에 총상이 있었다. M16 소총에 맞았다. 1984년 4월2일 강원도 화천군 7사단 3연대 1대대 3중대. 거기서 허원근은 죽었다. 바로 다음날은 허원근의 첫 정기휴가일이었다. 다림질한 ‘A급 군복’은 주인을 잃고 구겨졌다. 허원근은 1983년 9월28일 전남 진도군 고향집에서 아버지 농사일을 한 달가량 도와주고 추석을 쇤 뒤 입대했다. 허원근에게 추석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9월16일 서울 종로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사무실에서 허원근의 아버지 허영춘(75)씨를 만났다. 사건 당시 44살 장년이었던 아버지는 백발의 노년이 되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르겠으면 판결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보상금이고 위로금이고 다 필요 없어요. 안 받을 거예요.” 올해도 아버지는 큰아들 없는 32번째 추석을 맞았다.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2002년 9월과 2004년 6월 허원근 사건을 조사해 발표했다. 결론은 2차례 모두 ‘타살’이라는 것. 의문사위 보고서를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의문사위는 허원근이 부대원이 쏜 총에 맞아 숨진 것으로 판단했다. 1984년 4월1일 밤. 3중대장과 16소초장, 19소초 선임하사는 술판을 벌였다. 16소초장이 중위로 진급하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허원근은 안주를 준비했다. 중대장은 안주가 부실하다며 자신의 방에서 허원근을 구타했다. 이튿날 새벽 2시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취한 19소초 선임하사가 중대장과 말다툼을 시작했다. 화가 난 선임하사는 중대장실을 박차고 나와 중대 내무반으로 왔다. 병사들에게 욕설을 하고 책상을 걷어차며 화풀이하던 선임하사는 행정반 입구 근처에 있던 M16 소총을 들고 병사들을 위협했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선임하사를 뒤에서 안으며 말렸다. 그러다 발사된 총알에 허원근이 오른쪽 가슴을 맞았다는 것이다.
중대장·대대장·보안주재관의 사건 은폐가 있었다는 점도 의문사위는 지적했다. 허원근이 첫 발을 맞은 뒤 3중대장은 대대 상황실에 ‘허원근이 자살했다’고 허위로 보고했다. 1대대장은 보안대 담당 하사와 함께 당일 아침 3중대를 찾아갔다. 이후 3중대장은 보안대 하사에게 ‘사건 수습’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3중대장이 평소에 하지 않던 철책 순찰을 나간 사이 내무반에 흩어져 있던 허원근의 피를 닦기 위해 물청소가 이뤄졌다. 그리고 당일 오전 11시께 ‘누군가’ 허원근의 왼쪽 가슴과 오른쪽 이마에 M16 소총으로 2발을 더 쏘았다는 게 의문사위의 판단이다.
허원근이 발견된 3중대 폐기름 창고 근처에서 탄피가 2발만 발견됐다는 것도 자살이 아닌 타살의 유력한 증거로 지목됐다. 사건 당일 7사단 헌병대 수사관들이 작성한 현장 약도에는 동일하게 탄피가 2발만 묘사돼 있다. 당시 부검의 또한 첫 발과 이후 2발 사이에 ‘수 시간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만약 허원근이 자살했다면, 첫 발을 먼저 오른쪽 가슴에 쏜 뒤 ‘수 시간’ 뒤에 다시 2발을 이마와 왼쪽 가슴에 쏘았다는 것인데 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의문사위의 결론이었다. 당시 16소초장이었던 장아무개씨는 2002년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사건 당일) 오전 10시께 두 발의 총성을 듣고 현장에 가보니, 허 일병이 숨져 있었다. 몸에 세 발의 총구가 있었으나, 옆에 있던 허 일병의 총에는 두 발만이 격발된 것을 확인하고 의아해했다.”
의문사위는 단호하게 “타살” 결론허원근이 발견된 현장에서 피와 뇌 조직이 발견되지 않은 것도 사건 조작을 강력히 의심케 하는 증거였다. 의문사위는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경찰청 법의학자와 수사관 10여 명에게 법의학적 소견을 물었다. 이들은 한결같은 소견을 보냈다. “주검 주위에서 피를 볼 수 없다. 머리 총상에 의해 많은 피부조직과 골편(뼛조각), 피, 뇌조직 등이 산재되어야 하나 그렇지 않은 걸로 봐서 누군가 시체를 이동시켰다.”
허원근과 관련자들의 총기 번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정된 점도 의문사위 조사에서 드러났다. 사건 2일 뒤 군 헌병대는 현장에서 발견된 총기와 탄피를 육군과학수사연구소에 맡겼다. 그리고 4월9일에는 관련자 총기 7정을 추가로 감정 의뢰했다. 그런데 2차례 감정이 의뢰된 총기의 번호가 서로 다르게 고쳐져 있었다. 허원근이 자살에 썼다는 총기가 허원근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다.
2000~2004년 2차례 조사를 거친 의문사위의 최종 결론은 단호했다. “허원근은 복무 중 중대 간부들이 규정을 어기고 술을 마신 것이 발단이 되어 상관인 노아무개(19소초 선임하사)가 발사한 총탄과 나머지 2발의 총탄(주체는 불확정)을 맞고 사망에 이르렀고, 중대 간부들은 허원근이 최초 총격으로 쓰러졌을 때 구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자신들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자살로 위장하였는바, 허원근의 사망은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의하여 사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군과 국방부는 사건 발생 31년이 지나도록 ‘허원근=자살’이라는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다. 1984년 4월24일 육군 2군단 헌병대, 4월30일 7사단 헌병대, 5월1일 1군사령부 헌병대 모두 허원근이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후 1990년 육군 범죄수사단, 1995년 육군본부 법무감실 조사에서도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특히 2002년 8월20일 의문사위에서 허원근이 타살되었다는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하자, 국방부는 불과 6일 뒤인 8월26일 육군중장 장수성을 단장으로 한 특별조사단(특조단)을 신속하게 꾸려 대응에 나섰다. 3개월 뒤인 11월28일 특조단은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는 조작”이라며 ‘허원근=자살’ 논리를 되풀이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허원근이 중대장의 가혹행위로 군 복무에 염증을 느끼다 중대장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자살했다는 것이다. 1984년 군 헌병대 수사와 동일한 결론이었다.
의문사위를 겨냥한 군의 신경질적인 반응도 이어졌다. 2004년 7월 의문사위(2기) 조사관들은 정수성 1군사령관(2002년 당시 국방부 특조단장)이 같은 해 3월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자신들과 만나 협박성 욕설을 했다고 폭로했다. “저번 의문사위처럼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언론에 까발리면 당신네들 다 죽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정수성은 협박 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정수성은 전역 뒤 2007년 한나라당 박근혜 캠프 국방·안보특보단을 거쳤고 현재 새누리당 국회의원(경북 경주)이다.
손해배상 소송은 진실 위한 마지막 선택허원근의 유가족은 2007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진실을 가리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민사36부(재판장 김흥준)는 3년 만인 2010년 타살로 판결했다. 그러나 이어진 항소심에서 서울고법 민사9부(재판장 강민구)는 1심과 반대로 자살이라는 판결을 내놨다.
그리고 지난 9월10일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최종 심급이면서도 자살·타살 여부를 확정하지 못했다. 누가 M16 소총의 방아쇠를 3차례 당겼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대법원의 결론이다. 그런데도 군 헌병대의 초기 부실 수사 부분만을 인정해 손해배상 금액을 정한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3억원이다.
“허원근이 타살되었다는 점에 부합하는 듯한 증거들과 이를 의심하게 하는 정황들만으로는 허원근이 소속 부대원 등 다른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 집행으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그렇다고 하여 허원근이 이 사건 사고 발생일 오전에 폐유류고에서 스스로 소총 3발을 발사하여 자살하였다고 단정하여 허원근의 타살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도 없다.”(대법원 판결문)
31년 만에 다시 원점. 허원근의 아버지 허영춘씨가 진실 규명을 위해 보낸 1천여 일의 풍찬노숙을 법은 철저히 외면했다. 허씨는 31년 세월이 거짓말만 같다. 사건 뒤 1988년까지 허씨는 제대로 된 진상 규명 요구조차 못했다. 전두환 군사독재가 미쳐 날뛰던 시절이었다. 육군범죄수사단에 찾아가 민원을 내려다 수사관한테서 “생명에 지장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협박도 받았다.
5공 정권이 막을 내린 뒤 허씨는 1988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의문사 유가족들과 함께 스티로폼 한 장 깔고 겨울을 나며 농성을 했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1년 넘게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서울 여의도 천막농성도 이어갔다. 전국 팔도를 두 바퀴 돌면서 부대 동료들을 찾아 증거와 진술도 모았다. 평범한 농부였던 그는 법의학 서적을 탐독해 관련 지식을 습득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의문사위의 활동 기한을 연장하는 것을 뼈대로 한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의 통과를 요구하며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겨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법안을 2차례나 반려했고 16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은 지난 2월까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이었다.
허씨는 대법원 판결을 인정할 수 없고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다. “아들과 마음으로 약속했어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꼭 너의 진실을 밝혀주겠다고요. 그런데 30년이 넘게 지났는데 발전은커녕 옛날 5공 시대로 회귀했어요. 우리나라가 한심스러워요. 군대에서도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는 불복할 수 있도록 해야 돼요. 그러나 내 아들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단 하나 있어요. 보상금이나 위로금은 다 필요 없어요. 검시 제도를 바꿔야 해요. 조선시대에 (증수무원록대전)이란 게 있었어요. 당시엔 세 번 검시를 했어요. 원혼이 없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어요. 검시 제도를 바꿔주세요. 그러면 깨끗하게 물러날게요.”
대법 판결 인정 못해… 재심 청구할 것검시관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한 ‘검시를 행할 자의 자격 및 직무범위에 관한 법률안’은 2005년 발의됐다. 허씨가 앞장서 요구한 법안이다. 그러나 법안은 2008년 5월 17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됐다.
허원근은 살릴 수 없다. ‘허원근법’은 살릴 수 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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