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복무제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 적어도 이 법정 안에선 이견이 없는 것 같다.”(강일원 재판관)
“원론적으로 합리적인 대체복무제가 만들어진다면, 그런 제도는 도입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국방부 대리인 서규영 변호사)
약간은 뜨뜻미지근했다. 십수 년간 찬반이 갈렸던 첨예한 논쟁을 다루는 법정치고는 다소 김이 샜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 도입 필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방부 대리인과 참고인 자격으로 나온 변호사와 헌법학자도 “(양심적 병역거부자 형사처벌에)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하다” “합리적 대체복무제 도입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7월9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헌재) 대심판정. ‘양심적 병역거부’를 형사처벌하는 법이 위헌인지를 따지는 공개변론이 열렸다. 병역법 제88조 1항은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을 기피하면 징역 3년 이하의 형사처벌을 하도록 돼 있다. 종교 또는 양심의 이유를 들어 집총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 평화운동가 등은 군 입대 대신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간다. 이런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매년 600~700명에 이른다.
2001년 평화주의자 오태양씨가 신앙이 아니라 양심 때문에 입영할 수 없다고 선언한 뒤, 양심적 병역거부는 한국 사회의 인권 수준을 보여주는 가늠자가 됐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아닌 이들의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도 잇따랐다. 판사들은 여러 차례 병역법의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과 대체복무제 도입을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헌재가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을 재판대 위에 올린 것만도 이번이 세 번째다. 2004년에는 재판관 7명이 합헌에 손을 들었다. 김경일·전효숙 재판관만 ‘위헌’ 의견을 냈다. 그러나 합헌에 동의한 재판관 가운데서도 5명은 입법부에 고민을 촉구했다. “입법자는 국가안보란 공익을 실현하면서도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보호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는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며, 설사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지 않기로 하더라도 법적용 기관이 양심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입법을 보완할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2004년 8월26일 헌법재판소 결정문)
정부가 답했다. 2007년 국방부는 대체복무제 도입 방안을 발표했다. 24시간 보호가 필요한 치매 노인이나 중증장애인 수발, 전염병 감염 위험이 높은 병원·시설에서 현역병의 2배 기간 동안 합숙생활을 하는 등의 내용이 뼈대다. 실제로 대만, 독일, 미국 등에서는 이같은 대체복무제를 운영 중이다. 하지만 국방부는 1년 만에 국민 정서를 이유로 도입안을 철회했다.
2011년 헌재 결정은 2004년보다 뒷걸음질쳤다. 처음으로 공개변론을 열었지만, 합헌에 동의한 재판관이 7명으로 압도적이었다. 이강국·송두환 재판관 2명만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라는 헌법적 가치가 상호 충돌하는 병역법 조항은 규범조화적 해석 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며 한정위헌 의견을 냈다. 병역법에서 못박은 ‘정당한 사유’를 종교적 양심상의 자유까지 넓혀서 해석하자는 취지다. 두 재판관은 대체복무제 도입이 국가안보, 자유민주주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봤다.
2004년 이후 6800명 1만 년 동안 수감생활국방부와 국회는 그동안 뒷짐만 지고 있었다. 17~18대 국회에서 대체복무제 도입을 담은 병역법 개정안을 4건 발의했지만,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한 채 폐기 처분됐다. 19대 국회 국방위원회에는 전해철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반면 사법적 논란은 헌재 결정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았다. 특히 징역 1년6개월이 아니면 병역거부자들이 다시 입영통지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내놓는 ‘정찰제’ 판결이 일선 판사들을 고뇌하게 했다. 지난 5월 광주지법 형사5단독 최창석 부장판사는 입영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선고는 2007년 이후 처음이다. 몇몇 판사들은 선고를 ‘거부’하고 헌재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함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내보이기도 한다.
“(헌재가 대체복무제 도입 검토를 권고했던) 2004년 이후 6800명이 투옥됐고, 이들이 감옥에서 보낸 형기의 합이 1만 년을 넘는다. 헌재는 지난 11년간 인내심을 갖고 입법권을 존중해줬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기본권 최후의 보루인 헌재의 시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헌법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해주시기 바란다. 현재 전국 43개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706명 젊은이들이 이 사회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헌법소원을 낸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대리하는 오두진 변호사가 최후변론을 하다 말고 울컥해서 마지막 말을 삼켰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이자 천주교 신자로서 병역거부를 택한 홍아무개씨의 변론을 맡은 박주민 변호사는 2011년 헌재가 합헌 결정의 근거로 삼았던 국방부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병역청은 최근 군입대 대상자가 군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보다 많아 고등학교 졸업 미만 학력자를 보충역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올해만 6천여 명이 보충역으로 전역되는데,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연 600여 명 수준에 불과하다. 대체복무제로 인해 병력 자원의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 셈이다. 이미 징집 대상자의 20%가 산업기능요원 등을 통해 사실상 대체복무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국방부 대리인을 맡은 서규영 변호사는 “앞으로 10년 이내에 인구 감소 등으로 입영병 수요·공급이 역전될 것으로 보인다. 병역의무에 예외를 허락하면 병역제도 근간을 흔들 수 있고, 양심적 병역거부가 병역기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 반박했다. 서 변호사는 특히 “헌법적으로 판단할 사항이 아니라, 입법자의 재량에 맡겨야 할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국방부 쪽 참고인으로 나온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도 “헌재가 아니라 국회가 풀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재판관 7명 바뀐 헌재가 목소리 낼까
결국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이냐가 문제다. ‘대체복무제 도입’까지 닿는 길을 정부나 국회가 터줘야 하는지, 아니면 헌재가 먼저 위헌 또는 헌법 불합치를 결정해 국회와 정부의 등을 떠밀어야 하는지 말이다.
헌재도 이 대목을 고심 중인 것으로 보인다. 박한철 헌재 소장이 이번 공개변론에서 던진 질문에는 이런 고민이 묻어난다. “입법부에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조만간 해결될 여지가 없어 보이는데 헌법학자로서 궁극적 해결책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국방부 쪽 참고인인 장영수 교수에게)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정당한 사유’를 인정해주는 한정위헌 결정을 내리면 형사처벌 조항의 효력과 법적 안정성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데, 한정위헌은 적절치 않다고 보느냐?”(청구인 쪽 참고인으로 나온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게)
박 소장은 2011년 헌재 결정 때 ‘합헌’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2011년 이후 재판관 9명 중 7명이 바뀌었다. 법조항이 폐지되려면 재판관 6명 이상이 ‘위헌’ 의견을 내야 한다. 다만 ‘합헌’이 다수이더라도 2004년처럼 대체복무제 입법을 촉구하는 식으로 헌법재판소 목소리를 낼 수는 있다. 헌재는 이르면 올해 안에 결정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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