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감염 사망자가 나왔다. 하지만 정부의 대책은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국민의 불안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유언비어 유포자를 검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주 익숙한 스토리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미국 쇠고기 수입, 경제위기, 안보위기, 4대강 등 일국의 중대한 미래를 결정하는 순간순간마다 국민의 비판적 목소리가 드높았고, 그때마다 정부는 허위 사실 유포자를 엄단하겠다고 나섰다. <pd> 사건, 미네르바 사건, 예비군 동원 허위 문자 유포, 한-미 FTA 괴담, 폭우 괴담, 신종플루 백신 괴담 등등. 물론 이러한 위기 국면에서 다소 과장된 얘기나 괴담이 떠돌곤 한다. 하지만 근거가 박약한 허위 사실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도태된다. 실제 사회가 혼란해진 것이 괴담 때문인 적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그런데도 정부는 또다시 허위 사실 유포자를 잡겠다고 나섰다. 이미 수년 동안 똑같은 대처를 해왔는데도 매번 괴담이 불거져나오는 이유를 몰라서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걸까.
괴담 때문에 사회가 혼란해진다?
괴담이건 아니건 원칙적으로 ‘표현’ 자체는 국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표현에도 한계가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대표작 에서 국가의 개입은 ‘타인에 대한 해악’을 막기 위한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했다. 그 유명한 ‘해악의 원칙’(Harm Principle)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해악’이 없는 표현은 규제 대상이 아니다. 여기서 표현의 좋음, 행복함, 정당함 등의 가치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가치판단이나 진실·허위 여부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과정에서 해결돼야 할 문제지, 국가가 나서서 금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일찍이 존 밀턴이 “(국가의 허용·금지가 아니라) 진리의 논박이 허위를 억제하는 최선의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했던 것이나, 나중에 미국의 올리버 웬들 홈스 대법관이 제시한 ‘사상의 자유시장론’이 모두 이 계보에 속한다.
그런데 해악의 원칙을 좀더 자세히 뜯어보면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해악’이다. 예컨대 ‘거짓말’ 자체는 규제할 필요가 없다. 거짓말은 논의 과정에서 그 허위가 밝혀지게 되고, 거짓말쟁이는 사회에서 퇴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지해야 하는 거짓말도 있다. 일반 사과를 유기농 사과라고 속여서 판매했다면 이건 ‘사기’다. 경제적 손해를 야기했으니 당연히 규제해야 한다. 조폭이 채무자에게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폭은 ‘표현’을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그래서 채무자가 심각한 공포를 느꼈다면 그건 분명히 해악을 초래한 것이다. 현행법상 ‘협박죄’에 해당하는 범죄이기도 하다.
여기서 해악은 ‘공동체 가치의 훼손’ ‘안보 위협’ ‘도덕적 타락’ 등 추상적인 수준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국가를 전복하려고 무기를 준비했다면 당연히 잡아가야 한다. 표현을 넘어 해악을 야기할 실제 행동이 개시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폐절의 이론적 근거를 담은 책의 출판은 어떨까?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인공기를 흔드는 행위라면? 최근 문제가 된 태극기를 불태우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표현들이 공동체 가치를 훼손하거나 안보를 위협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공적 개입이 필요한 수준의 ‘해악’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사상이나 상징적 표현 자체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해악, 예컨대 실제 국가가 전복될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일로 연결됐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연방대법원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을 표현의 자유의 한계로 제시한 바 있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있을 때
좀더 복잡한 문제도 많다. 예컨대 ‘국가 전복을 위해 무기를 준비하자’고 말한 경우라면, 실제 그런 행위를 직접적으로 부추기는 선동이었는지가 관건이다. 통합진보당 사건의 쟁점도 이것이었다. 법원은 결국 유죄판결을 했지만, 구체적 행동으로 나아갈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무죄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 부도덕한 표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포르노물이 도덕적 가치를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규제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포르노를 혐오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보여주는 것은 해악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음란물이 공중파에 방영되지 못하도록 하거나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되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표현에 대한 개입에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요소는 ‘자정가능성’이다. 무가치하거나 부도덕한 표현이라고 해도, 시민사회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국가가 나설 필요가 없다. ‘사상의 자유시장’이라는 은유는 사상도 자유시장에서 경쟁하면서 자연스럽게 살아남고 도태된다는 점을 포착한 것이다. 밀은 자율적 해결이 더 많은 효용을 가져온다고도 했다. ‘표현의 자유’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도 옳다는 것이다.
자정가능성의 관점에서 보면, 해악을 입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중요하다. 예컨대 어떤 신문에서 명예훼손성 허위 기사를 게재한 경우, 그 명예의 주체가 일반인인지 공인인지가 중요한 문제다. 일반인이라면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없으니 국가가 개입할 필요성이 있지만, 공직자의 공직 수행에 관한 문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에게는 기자회견을 열어서 똑같은 비중의 반론 기사를 실을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렇게 서로 근거 자료를 제시하면서 논박하는 가운데 옳고 그름이 가려질 수 있다. 자연스러운 해결 과정이 노정돼 있다면 국가가 나설 이유는 없다.
요컨대, 서두에서 언급한, 한-미 FTA 괴담, 폭우 괴담, 신종플루 백신 괴담, 4대강 괴담,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협박하는 것, 민간 사찰 의혹을 제기하는 것 등에 국가가 간섭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러한 표현들이 우리 사회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해악을 야기하고 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이다. 시민들이 괴담에 솔깃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가의 공식 발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짜로 해악을 야기하는 것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국가라는 얘기다.
현실적·구체적인 혐오표현의 해악
괴담 문제에 쓸데없이 열을 올리는 사이 정작 규제가 필요한 표현에 대한 관심은 시들하다. 우리가 <pd> 재판과 미네르바 재판에 국가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사이, 국제사회는 ‘혐오표현’의 규제 필요성에 대한 합의 수준을 높여가고 있다. 여기에는 혐오표현이 현실적인 해악을 초래한다는 점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전제돼 있다. ‘혐오’라는 감정 자체를 규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혐오가 밖으로 드러나서 실질적인 해악을 창출하는 경우다. 혐오표현은 어떤 소수자(집단)에 대한 혐오에 근거해 편견, 차별, 배제, 적대를 조장한다. 이것이 초래하는 해악은 무척 현실적이다. 혐오표현이 소수자에게 실질적인 고통을 야기한다는 실증적 근거도 속속 제출되고 있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외국인 노동자를 학대하거나 차별하는 행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교수가 수업 시간에 이슬람 종교에 대한 편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대학에서 이슬람교도 학생들이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할 거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성소수자 혐오가 만연한 회사에서,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는 따돌림을 당하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승진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 혐오표현은 폭력으로 쉽게 전이된다는 사례도 무수하다. 지난 5월 제출된 유엔인권최고대표의 보고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물리적 폭력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회원국에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을 금지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혐오표현에 중립은 없다
혐오표현은 자정에 맡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소수자의 사회적 힘이 충분하다면 혐오표현은 얼빠진 사람이나 하는 실없는 소리로 전락한다. 이 정도라면 국가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소수자가 ‘자연스럽게’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현실적으로도 소수자에게 ‘맞받아치면 되는 거 아니냐’ ‘무시하면 된다’는 조언은 한가한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가 인권보호를 위한 공적 개입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인권은 그렇게 ‘자정’에 맡긴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결국 어떤 표현을 금지할 것인지는 그 표현 자체가 아니라 그 ‘효과’의 심각성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표현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해악을 야기하거나 그런 해악과 직접적 연관이 있을 때만 규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공직자에 대한 ‘매우 저속하고 심한 욕설’이 초래하는 해악은 생각보다 미미하다. 반면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점잖게 드러낸 표현의 사회적 효과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구체적이다. 그래도 그 해악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혐한 시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일본에서 안전과 생계를 위협받는 재일 한국인들의 삶을 생각해보자. 여전히 구체적인 해악이 없고 자정에 맡겨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니 국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겠는가?
괴담은 굳이 국가가 나서야 할 만큼의 해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해악이 있다고 해도 국가에 대한 신뢰 회복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표현의 한계가 문제라면 ‘혐오표현’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해악이 잠재된 표현은 혐오표현이기 때문이다.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과대학 교수</pd></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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