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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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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맹구씨의 고작 1만마일짜리 하루

탑승객 권리가 법적으로 갖춰져 있지 않아 항공사 잘못으로 입은 피해는 직원의 감정노동이나 항공사의 ‘선심’으로 해결되곤 해
등록 2015-06-06 20:42 수정 2020-05-03 04:28

인터넷 벤처기업가 김맹구(31)씨는 4월12일 미국 애틀랜타에서 텍사스 댈러스를 경유해 인천으로 오는 아메리칸항공(AA)을 이용할 예정이었다. 이른 새벽 2시에 공항으로 나섰다. 병든 닭처럼 고개를 떨구며 쪽잠을 잔 아침 7시30분께 댈러스공항에 도착했다. 오전 10시, 인천행 AA281에 올랐지만 출발의 기미가 없었다. 기장은 수리해야 할 게 있어서 늦어질 거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므로 얌전히 기다렸다. 결국 낮 12시30분께 기장은 다른 비행기로 교체해서 탑승하라고 한다.

이규호 제공

이규호 제공

하지만 그날 인천행 비행편은 AA의 허브공항에서 대체편 하나도 구하지 못해 완전히 취소가 됐다. 단 두 개의 카운터가 열렸고 보잉777을 가득 채웠던 승객들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유사한 상황이 한국에서 발생했더라면, 윽박지르는 사람부터 고개 숙여 사과하는 직원까지 아수라장을 볼 수 있었겠지만 승객들은 애간장을 태울 뿐 점잖게 굴었다. 사람들이 점잖아서인지, 아니면 영어를 못해서인지, 이곳이 미국 땅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다. 내일 당장 부대로 복귀해야 하는 군인부터, 급히 떠나야 해서 수수료 60만원을 물고 이 비행편에 탑승했다는 사람까지 줄은 줄지 않았다.

줄을 선 지 4시간30분 만에 김맹구씨는 내일 일본 도쿄를 거쳐 서울로 가라는 일정표와 근처 공항호텔 바우처를 받았다.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으로 가서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로 당일로 가는 루팅도 가능했지만, AA 쪽에서는 자신의 연맹체인 원월드 운항항공편으로만 변경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원월드는 한국에서 가장 노선이 취약한 연맹체였다. 미국 연방법엔 항공편 취소시 항공사가 대체 운항항공편을 마련해주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명기돼 있지만, 항공편 취소로 인한 승객 불편보다는 자사의 손실을 줄이는 게 더 중요했을 것이다.

셔틀을 1시간 기다려 도착한 호텔은 방이 딱 하나 있었는데, 스프링클러가 망가져서 물을 찍찍 쏟아내고 있었다. 호텔 직원은 그 방에서 자고 싶냐고 되물었다. 다시 공항으로 가 다른 호텔을 받았다. 저녁 9시30분 낡은 호텔방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인천 직항에 운 좋게 탑승했고, 좌석의 기내 엔터테인먼트가 망가져 있는 것은 보너스였다. 그가 서울로 돌아와 항공사에 항공편 취소에 대한 보상을 요청하자 AA는 관대하게도 김맹구씨에게 별 쓸모도 없는 무려 1만마일 마일리지를 넣어주었다.

우리는 항공권을 구입할 때 각종 변경 및 취소 수수료를 안내받는다. 하지만 천재지변이나 기상 문제 등 불가피한 사유가 아니라 항공사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 항공편 지연 및 취소가 됐을 때 어떠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고 관련법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 상황에서 한국 항공사들은 주로 고객 담당 직원을 총알받이로 승객들의 온갖 분풀이를 받게 해서 해결을 하는 경향이 있고, 미국 항공사들은 불만을 접수한 고객만을 대상으로 자사 우수회원 등급별로 차별적 보상을 해주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안전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엄연히 사전 준비와 책임을 다하지 못해 계약을 지키지 못한 것을 교묘히 피해가기도 한다.

유럽연합(EU)에서는 항공사 귀책으로 인한 지연 및 취소에 대해 항공 거리와 지연 시간에 따라 최소 250유로부터 최대 600유로에 이르는 현금과 숙식 등의 보상 책임을 지운다. 하나 우리처럼 탑승객 권리가 법적으로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항공사 귀책으로 인한 피해는 직원의 감정노동이나 항공사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선심’으로 귀결된다. 탑승객에 대한 권리와 보상을 법제화하자고 요구하는 것은 항공권 가격만 올려놓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거, 너무 불공정한 거 아닌가?

이규호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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