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9월1일. 미국 뉴욕 존에프케네디공항을 출발해 앵커리지공항을 경유해 김포공항으로 들어오려던 보잉747기 대한항공 007편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군의 격추로 사라졌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105명의 한국인과 62명의 미국인, 27명의 일본인 등 총 269명이 이 사건으로 희생됐다. 오시포비치 소령은 민간 항공기인 것을 육안으로 확인했으나 위장한 미국의 정찰기라고 ‘믿고’ 두 발의 미사일을 쏘았다.
주검은커녕 유품조차 제대로 수습된 것이 없었고, 사건에 대한 정부의 발표는 의혹만 더욱 불거지게 할 뿐이었다. 무능한 군사정권은 사건 해결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주도적으로 외교를 펼치지도 못했다. 대신 퍼런 서슬은 유가족으로 향했다. 정부 설명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갖는 유가족들에게는 국가안전기획부의 감시가 붙었다고도 한다. 사고 책임은 전적으로 냉전시대 적들의 대장인 소련에 있고 그걸 의심 없이 믿어야 했다. 기장의 항로 이탈로 영공을 침해해 일말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다. 원인과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 직후 대한항공이 제시한 최고 10만달러의 합의금(합의 내용에는 ‘훗날 발생할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었다)을 거절한 이들은 죽은 가족을 팔아 한몫 챙기려는 파렴치한으로 몰렸다. 알려주는 대로 믿고 주는 대로 받고 침묵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미국 법원에서는 대한항공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 뒤 30여 년이 지났다. 우리는 생중계로 세월호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보았다. 제 목숨만 구하기 바빴던 선장과 돈에 눈이 멀어 안전은 안중에 없었던 사주, 사고 수습에 무능한 정부를 보았다. 제2롯데월드와 싱크홀, 대한항공 회항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후 안전은 최고의 화두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일상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안전불감증이 아니라 폭력과 폭력불감증이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의 목숨 따위는 무시해도 되며 죽음은 돈으로 덮을 수 있다는 돈의 폭력, 소수는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다는 다수의 폭력, 약자는 더욱 약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구조적 폭력, 조금이라도 권력이 더 있으면 상대를 모욕해도 된다는 관계적 폭력까지, 군사정권과 발전주의 시대를 거치며 폭력은 지독하게 진화했다.
관심받고 싶어서 희생자들을 어묵으로 비하했다는 청년, 그저 교통사고 같은 것 아니냐는 여당 국회의원들, 유가족의 단식투쟁을 조롱하며 폭식투쟁을 하는 사람들, 돈 뜯어내려는 괴물로 유가족을 묘사하는 정체불명의 카톡 메시지들, 종북 세력들이 분탕질을 하여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
사건 진상을 요구하고 책임을 분명히 따지며 의심을 하는 사람에게 정치적 혹은 도덕적 비난을 퍼붓는 것은 냉전이 끝난 현재에도 여전하다. 억울하면 종북이고 책임을 따지면 죽음을 팔아 돈에 눈이 먼 사람이 된다.
그만하자고 한다. 알려주는 대로 믿으라 한다. 그 돈이면 된 거란다. 당신들이 당하는 폭력에 무감해지라고, 굉장히 폭력적으로 말한다. 인류학자 낸시 셰퍼-휴즈는 이라는 책에서 많은 아이들이 죽어도 아무도 울지 않는 브라질의 한 빈민가를 보고 “삶이 각종 폭력의 연속으로 채워져 있을 때 죽음은 애도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고 전한다.
애도와 비통함이 금기된 폭력적 시대에 죽음의 진실을 밝히자고 하면, 정치적·도덕적 낙인이 찍힌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국가권력이 관여된 죽음에 대한 진실을 요구하는 일은 모조리 그래왔다. 무감하라고 종용하는 폭력을 거슬러야 한다.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비통함을 느끼는 것은 그래서 저항의 시작이다.
이규호 미국 일리노이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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