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공익변호사’라는 이름이 제 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그 이름을 무겁게 느낀다. 한 시민사회단체 소속 변호사는 “나를 노동변호사라고 하면 몰라도 공익변호사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개인사무소에서 활동하면서 공익활동을 병행하는 다른 변호사는 “영리활동과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활동을 같이 하는 수준인데 내가 공익변호사 인터뷰에 적절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국내 공익법운동이 도입된 지 20년이 됐지만 공익변호사라는 말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이일(34·사법연수원 39기) 변호사는 3년차 공익변호사다. 그는 사단법인 공익법센터 ‘어필’ 소속이다. 어필(APIL·Advocates for Public Interest Law)은 ‘공익법을 위한 변호사들’이란 뜻이다. 법인 이름 때문일까. 그는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했다. 그는 난민과 구금된 이주민들 관련 업무를 주로 맡고 있다. 어필은 그 밖에 국제 인신매매 피해자, 무국적자, 국외 한국 기업 인권침해 등에 관련한 활동을 한다.
5월13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어필 사무소에서 그를 만났다. 언어 장벽이 있는 난민·이주민들을 대하는 동안 익은 습관일까, 천성일까. 그는 친절했고 자주 웃었다. 난민과 이주민들이 웃고 있는 사진 액자를 흰색 벽지 위에 걸어둔 사무실 분위기도 그의 기분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질문을 받으면 진지한 표정으로 수초 고민하고 답하는 전형적인 법률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가 공익변호사를 택할 때 가장 큰 고민은 급여였다. 하지만 지금 200만원 남짓 되는 급여는 고민이 아니다.
법무관 시절이던 2012년 여름, 친구가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미국에서 인신매매 피해자들과 같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변호사처럼 거리를 두고 법률적 조력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살면 얼마나 상처받고 힘들까,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에서 처음엔 힘들고 어려웠지만 피해자들이 긍정적으로 변화돼갔다고 했다. 소수의 선택이 큰 힘을 발휘한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법무관 끝나면 판사를 해야 하나, 공익변호사를 하면 노후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는데 그 책을 보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변호사가 되려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다른 걸 계산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그 책을 보고 하게 됐다.
처음부터 공익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건가?학창 시절엔 완전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남들이 안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법 공부를 하면서도 큰 회사를 변호하는 데는 별 흥미가 없어서 다른 진로를 모색했다.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경기도 안산 이주민센터에서 법률 봉사도 하고 연수원 실무수습 때 공익법무법인 공감에서 수습도 했다. 그런데도 막상 법무관이 돼서 선택하려니 어렵더라. 연수원 때 이미 결혼한 상태인데다 로펌에서 술이랑 밥을 사주면서 스카우트 제안도 해왔다. (웃음) 책을 읽고 나서 공익변호사 쪽으로 진로를 정했는데도 급여 때문에 고민이 되더라. 부모님이 “하더라도 판사 3년은 하고 하는 게 낫지 않니”라고 하시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선택의 기로에서 큰 문제는 급여?당시를 다시 생각해보면 사람이 정말 유치하다. 선택의 순간에 거창한 것들을 늘어놓고 계산한 게 아니라, 결국 내가 이 정도 급여로 충분히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더라.
급여가 많이 적나.200만원 조금 넘어간다. 일반 NGO(비정부기구)보단 많이 받는 편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이 사는 분도 같은 생각일까.(웃음) 만 3살, 1살 된 두 딸이 있는데 주변에서 아직 애가 학교 가기 전이라 괜찮을 거라고도 얘기한다. 어찌됐든 재정이 제일 큰 문제였는데 지금은 장모님 댁에 살아서 주거비용이 안 든다. 장모님이 쫓아내지만 않으면 주거비용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웃음)
공익변호사는 없는 선례도 만들어야급여 외의 고민은 뭔가.오히려 지금 걱정은 ‘하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뛰어들었다가 오히려 (난민·이주민들에게) 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선례가 없는 소송을 하다보면 결과가 잘 나오면 좋지만 예상처럼 안 나오면 안 좋은 선례로 남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내 능력의 한계를 지금도 계속 저울질하게 되는 거 같다.
예측했더라도 좀더 세게 다가온 난관은?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고 실패하고, 그런 걸 예측은 했지만 실제 접할 때 충격이 예상보다 컸다. 그걸 희화화해서라도 이겨내지 않으면 길게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난민 소송에서 진 뒤 최선을 다했지만 미안하다고 전하는 게 참…. 나 하나 어깨에만 기대고 있는데.
군복무 끝나고 바로 왔는데 실무가 부족하진 않았나.3년간 법무관 하면서 혼자 소송하는 경험을 조금 했다. 비즈니스 법률가로서 뭔가 배워야 하지 않나 불안감이 있었는데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수습을 하면서 선배들 보니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슈가 생기면 새로 연구해야 하고 선례가 없는 것도 만들어야 한다. 후배들한테도 “막연하게 모든 걸 배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로스쿨 졸업 뒤 공익변호사를 하더라도 소송 실무는 대여섯 번 정도 해보면 어떻게 돌아가는구나 생각이 들 것 같다. 다만 혼자 시민사회단체에서 변호사 일을 할 때는 누군가 서면 내용 같은 것을 검토해주는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명이 모인 단체는 물어볼 데라도 있는데 그렇지 못한 곳은 물어볼 데가 마땅치 않아 힘들다.
판사를 하지 않은 것에 후회는 없나.판사나 검사가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너무 작아 보였다. 일단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밖으로 보이기 어렵고 주도적으로 사람들을 만나서 개선 노력을 하기 조심스럽지 않나. 가끔 혁신적 판결이 나와서 사회 개선의 전기가 되기도 하지만 개별 판사들에겐 평생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다. 대학 때는 좋은 결과물과 구조를 빨리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도 생각했다. 지금은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 옆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한다. 설령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빨리 바뀌지 않더라도 그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시급한 문제인가, 그만큼 그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당장 승소하지 않더라도 법 기술을 이용해서 권리를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난민 소송은 이기는 경우가 매우 적다. (웃음) 이쪽 일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고 안 나오고는 최선을 다해도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 많은 우연이 겹쳐서 결과가 나온다. 그런 일에 많은 기대를 걸면 낙담하고 지치게 된다. 난민 입장에서도 누군가 자기 편이 돼서 목소리를 내준다는 자체가 가장 큰 힘이 된다고들 말한다.
난민 관련 활동의 특징은?모든 소수자가 그렇지만 난민과 이주민은 장벽이 더 두껍다. 문화와 언어가 다르고 인종적 편견 문제가 있어서 이분들이 적절한 조치를 얻기까지 장벽이 더 크다. 그걸 풀어서 장벽을 제거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땐 한없는 책임감과 더불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게 맞구나 생각한다. 사법접근권(법률구조)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적용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이유는 기존 권력관계 때문이다. 난민·이주민들은 인종적·국민주의적 편견 속에서 권력관계의 열위에 놓여 있다. 이들이 최소한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입법 개정이 필요하다. (우리와 같은 변호사들이) 난민들을 위해 이전에 없던 소송을 새롭게 기획도 해야 한다. 법 자체가 기준이 아니라 법을 기술적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비장하지 않게 일하자’가 모토 활동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30초가량 고민하다가) 모든 난민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중에서 경기도 화성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돼 있던 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정부 박해를 받고 여러 나라를 돌아 한국에 온 사람이었는데, 유럽에 가고 싶다고 아랍어를 쓰는데 안 통하고 위조 여권을 들고 있다는 이유로 구금됐다. 우연히 그분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가 만났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일하고 노력 안 하면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구금돼 쭉 있다가 자국에 송환돼 잡혀가 죽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분이 나중에 말하길 자국에 돌아가면 죽는 상황에서 아무도 아랍어를 충분히 듣거나 설명하지 않고 있었는데 자기 얘기를 들어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고 했다. 그때가 기억에 남는다. 그분은 얼마 전 난민으로 인정됐다.
처음 시작할 때 공익변호사를 평생 할지 고민했다고 했는데.평생 안 해도 된다. 우리 어필의 모토 중 하나가 ‘비장하지 않게 일하자’다. (웃음) 평생 안 해도 되는데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끝까지 안 하면 도망가는 것 같다. 사실 이직도 가능하고 마음만 먹으면 로펌에 취직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난민들은 그대로 있는데 이걸 외면한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난민 변호사가 하는 일은 정말 작다. 비유하면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뛰쳐나오는 사람 한 명이라도 구명조끼 던져서 구하자는 거다. 사람들은 계속 뛰쳐나오는데 이걸 외면하고 다른 데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배 변호사에게도 그렇게 말할 건가.그럼 방금 한 말 싹 닦고 (웃음) 시작은 가볍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처음에 가장 큰 고민이 돈 문제였지만 막상 지금은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처럼. 통상적인 비즈니스 법률가는 하고 싶지 않은데 공익변호사는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많을 것 같다. 그런데 연수원 안에서도 서열이 갈린다. 판검사가 안 되면 실패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다. 판사 중에서도 서울 지역에서 근무하는 판사가 아니면 실패한 판사라고 한다. 서열화되고 폐쇄적인 구조에서 1천 명 중 900명 이상은 불행하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가 힘들다고 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권력, 자격증을 갖고 시작하는 거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밖에서 보는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걱정하지 말고 일단 이곳저곳 두드려보고 시작하면 된다.
국내의 공익 전담 변호사 규모는 70여 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엔 다양한 분야에서 생업과 공익활동을 병행하는 변호사들이 누락돼 있다. 이 때문에 ‘소수자들을 위한 공익활동을 전업으로 하는 변호사’만을 공익변호사로 이름 붙이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변호사도 있다. 꼭 전업이 아니어도, ‘소수자들을 위한 변론’에 국한되지 않아도 변호사들은 다양한 공익활동을 이미 하고 있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의 지향도 제각각이다. ‘심각한 활동가나 사회운동가’로 인식되길 거부하는 변호사가 있는 반면, ‘착한 이미지’로만 비치길 원치 않는 이도 있다. 공익법운동은 사회운동 안에서 의미가 있다고 인식하는 변호사도 있다. 그래서 이들이 공익변호사 진로를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해줄 말도 다양하다.
“전업 활동만이 유일한 대안은 아니니 다양한 방식의 공익활동을 고민했으면 좋겠다.”(시민사회단체 소속 4년차 변호사)
“아직까지는 낮은 연차 때 큰 조직에서 법조 업무 일반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업무를 충분히 익힌 후 공익변호사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공익변호사는 공익이라는 점이 아니라 변호사라는 점에 중점을 두고 활동해야 하는 법률 전문가임을 명심해야 한다.”(공익법인 소속 10년차 변호사)
진로 고민하는 법조인들에게 전하는 말“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은 (비록 경제적 문제가 남는다 하더라도) 행복한 일이다. 공익활동을 더 원활하게 잘하기 위해서라도 신입 변호사 시절에는 먼저 소송 실무를 배우는 것이 낫다.”(개인사무소 소속 2년차 변호사)
“경제적 보상이 적다는 점만 제외하면 정말 좋은 직업이고 앞으로 발전 가능성도 높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줄 변호사가 너무 적다.”(시민사회단체 소속 13년차 변호사)
“현장에 나와보니 변호사의 역할은 송무 말고도 매우 다양하고, 앞으로는 더 다양해질 것으로 보인다. 예비 변호사들이 기대하는 다양한 송무 능력을 두루, 자세하게, 훈련시키는 그런 사무실은 별로 없다. 오히려 공익변호사 활동을 하다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선배를 많이 만난다. 요컨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질러요!’가 요지다. 변호사조차 그러지 못하면 아무도 그러지 못하고, 지금 그러지 못하면 평생 그러지 못한다.”(시민사회단체 소속 3년차 변호사)
김선식 기자 kss@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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