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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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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다… 밤새 잠을 잘 잘 수가 없다”

이지테크 양우권씨의 죽음… 포스코 눈치 보던 사내하청업체, 민주노조 조직했다고 해고, 소송 끝에 복직했지만 책상에서 대기만 하다 자살
등록 2015-05-19 16:11 수정 2020-05-03 04:28

제철소 노동자의 자살 기사를 보았다. 기사는 사망 원인으로 ‘우울증’을 거론했다. 그 단어 속에 숨겨진 고단한 삶을 따라가보았다. 그가 숨진 지 이틀 뒤인 5월12일부터 이틀 동안, 전남 광양을 찾아 장례식장, 제철소, 병원 등에서 양우권씨의 행적을 더듬었다.
모두가 탈퇴한 노동조합에 홀로 남았다 세상을 등진 양씨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아내·아들·딸과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노조원들, 주치의였던 한의사 등을 만났다. 양씨의 개인 수첩과 병원 진료 기록을 살폈다. 양씨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을 직접 찾아갔다. 원청인 포스코의 입장도 들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이지테크 경영진의 입장은 들을 수 없었다. 함께 일했던 회사 동료들 상당수도 “회사 때문에 무섭다”며 익명으로 이야기하는 것마저 거부했다.

5월12일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에서 고 양우권씨의 영정 사진을 붙잡고 아내 하아무개씨가 울부짖고 있다.

5월12일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에서 고 양우권씨의 영정 사진을 붙잡고 아내 하아무개씨가 울부짖고 있다.

금속노조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조합원인 양우권씨가 2015년 5월10일 목을 매 숨진 곳은 가야산 중턱 근린공원이다. 광양만을 향해 솟은 가야산에서는 광양제철소의 공장 지붕과 굴뚝이 한눈에 들어온다.

함께 노조 만든 동료들은 외면하고

이곳에 양씨는 전날 밤부터 홀로 있었다. 용광로의 불이 24시간 꺼지지 않는 광양제철소의 밤은 낮보다 더 환하다. 그 밤엔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광양제철소의 불빛이 양씨 손에 잡힐 듯 가까웠을 것이다.

숨지기 전날 양씨의 마지막 행적지는 충남 금산이었다. 5월9일 금산에서는 이지그룹의 체육대회가 열렸다. 양씨가 일했던 포스코 협력업체 이지테크는 이지그룹의 계열사다. 양씨는 회사로부터 부당해고를 당한 뒤 복직 판결을 받아도 원직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황에 대해 항의하고 싶었다. 양씨는 2014년 5월 법정 다툼을 끝내고 복직 통보를 받았지만 회사는 그를 책상에서 대기하도록 요구했다.

체육대회가 열린 운동장 입구에서 양씨는 함께 온 금속노조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과 피켓을 들었다. 한때 양씨와 함께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이지테크 동료들은 그를 외면했다. 그들은 길 건너편에서 등을 보인 채 벽처럼 서 있었다.

함께 갔던 양동운 포스코 사내하청지회장은 양씨가 “동료들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안 했지만 속으로는 많이 끓었을 것”이라고 했다. 낮 11시30분께 집회를 접은 양씨는 운동장에 있는 회사 동료들 대신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고 말해준 금산경찰서 형사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점심 뒤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노조원들은 광양으로 돌아갔다. 양씨는 노조 사무실이 아닌 가야산 중턱 도로에서 갑자기 내렸다. 집에 차를 두고 온 것을 잊었다고 했다. 그의 건강 상태 때문에 항상 운동을 권했던 양 지회장은 “운동 삼아 집으로 걸어가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양씨는 가야산 근린공원에서 멈췄다. 가족은 그가 상경투쟁을 갔을 때처럼 으레 자고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날 밤 양씨는 딸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가 ‘오빠 어디 있냐’고 묻더니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 멈췄다. 그러곤 ‘아니다, 됐다’ 하고 끊었다.” 딸은 말했다.

양씨는 5월10일 아침 7시26분, 양동운 지회장에게 전화를 했다. 양씨는 “너무 힘들다, 죽겠다”고 말했다. “‘지금 어디냐, 가겠다’고 하고 욕도 하면서 말려봤는데….” 동광양장례식장에서 만난 양 지회장의 눈은 빨갰다.

목에는 ‘단결투쟁’ 적힌 빨간 머리띠

양 지회장과 전화가 끊긴 뒤 양씨는 아내인 하아무개씨와 통화를 했다. 양씨는 하씨에게 “미안하다. 양 지회장을 믿고 따르라”고 말했다. 아내는 위태로운 순간인 것을 알고 근린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남편은 위치를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하씨는 가야산임을 직감했다.

“우권댁(양씨의 아내)과 통화가 돼서 정신없이 가는데, ‘지회장님, 남편을 내릴 수가 없어요’라며 우권댁이 울었다. 덩치가 큰 우권이를 여자가 내릴 수도 없고 밑에서 붙잡고….” 숨진 양씨의 목에는 ‘단결투쟁’이 적힌 빨간 머리띠가 둘러져 있었다. 그는 항상 머리에 동여매는 머리띠를 가지고 다녔다. 함께하던 노조원들이 모두 떠나 혼자 남겨진 그에게 ‘단결투쟁’ 머리띠는 저승 가는 길동무밖에 되지 못했다. 양씨는 근린공원 벤치 위 등나무 구조물에 혁대와 머리띠를 이어붙여 걸었고, 거기에 제 목숨도 걸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양동운 지회장을 위시하여 똘똘 뭉쳐 끝까지 싸워서 정규직화 소송, 해고자 문제 꼭 승리하십시오. 멀리서 하늘에서 연대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화장하여 제출소 1문 앞에 뿌려주십시오. 새들의 먹이가 되어서라도 내가 일했던 곳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곳. 날아서 철조망을 넘어 들어가보렵니다.”(양우권씨 유서)

양씨가 처음부터 목숨 걸고 노조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33살에 이지테크에 입사한 양씨는 동료들보다 나이 많은 형이었다. 같이 일하는 동생들을 챙겼고, 동료들과 퇴근 뒤 소주 한잔 하는 것을 좋아했다.

평범한 공장 노동자인 그의 삶이 바뀐 것은 2006년 12월이었다. 그해 이지테크 노동자 53명은 금속노조 이지테크 지회를 결성했다. 회사와 대립적인 노조가 거의 없는 포스코 협력업체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지테크 노조는 2008년 1월 집행부 간부들이 금속노조를 탈퇴해 새로운 노조를 만들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이 새 노조로 빠져나가면서 이지테크 노조원은 53명에서 10명으로, 또 3명으로 점점 줄었다.

이지테크에는 24시간 설비를 관리하는 교대근무자와 주간에만 일하는 상주근무자가 있다. 교대근무자는 야근수당 등이 붙어 월급이 더 많다.

남은 3명을 순서대로 상주근무자로

회사는 남은 3명 가운데 1명을 상주직으로 바꿨다. 설비 운전을 담당했던 그는 난데없이 청소 작업을 해야 했다. 월급도 40여만원이 줄었다. 그는 석 달 만에 노조를 탈퇴했고, 회사는 그를 교대근무자로 바꿔주었다. 회사는 남은 2명 가운데 1명의 직무를 상주직으로 바꿨다. 그도 3개월만 버틸 수 있었을 뿐이다.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소속 해고노동자 김정기씨는 “상주직은 자신이 희망하는 경우가 아니면 징계를 받을 경우에만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이는 양씨였다.

회사는 2010년 10월29일 양씨에게 작업 대기 발령을 내렸다. 양씨는 무너져갔다. 신경정신과에서 약을 타 먹고 술을 마셔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양씨가 숨진 뒤 포스코 사내하청지회가 공개한 양씨의 수첩을 보면, 당시 회사가 얼마나 그에게 노조 탈퇴를 요구했는지 드러난다.

“2010년 10월29일부터는 현장에 나가지도 말고 운전실 테이블 앞에 앉아서 작업표준서 학습하라고 하였다.”(2010년 10월29일) “오늘부터는 작업표준서도 쓰지 않고 어떠한 업무 지시도 받지 못하고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12월29일) “오늘도 앞전과 동일하게 아무런 작업 지시도 내리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게 했다.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직원들이 나하고 대화하기를 꺼리는 것 같다.”(2011년 1월3일)

“오늘도 마찬가지로 어떠한 업무 지시도 받지 못하고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조원이란 것이 그렇게 기업이 볼 때 큰 죄를 지은 것인가? 요즘은 머리가 너무 무겁고 밤엔 잠조차 제대로 이룰 수가 없다. 외롭다.”(1월6일) “김×× 부장이 와서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해서 2층 정비대기실로 내려갔다. 그 자리에서 김×× 부장이 회사도 힘들고 양우권씨도 힘드니 이쯤에서 잘 정리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내가 회사가 힘들 게 뭐 있냐고 하니 포스코에서의 압박이 너무 심하다고 했다.”(1월20일)

“현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현장에 내보내주질 않는다. 정말 미치겠다. 어제는 병원에서 조제해준 약을 먹어서 약기운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생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다.”(1월28일) “우×× 노무팀장이 찾아왔다. 노동조합 탈퇴서를 써줄 것을 독촉했다. 탈퇴서를 써주면 오늘 있을 인사위원회를 개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노동조합을 배신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2월9일, 인사위원회에서 복장불량 위반 등으로 정직 2개월 확정)

“집에 있는데 고×× 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술을 마시는 도중 앞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노동조합을 탈퇴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다.”(2월13일)

결국 이지테크는 2011년 4월 양씨를 해고했다. 포스코 사내하청지회는 “포스코가 하청업체 위·수탁 계약 때 쓰는 핵심평가지표 가운데 20% 비중이 노사관계다. 민주노조가 있을 경우 여기서 점수를 주지 않아 하청업체가 불이익을 받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양씨의 죽음 뒤에 포스코가 있다고 주장한다. 포스코가 마련한 하청업체 평가 기준 때문에 이지테크가 금속노조 조합원인 양씨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포스코는 “외주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제공받기 위해 ‘조직 안정’을 평가 항목 중 하나로 채택한 것이고, 이 항목은 조직 내 소통, 비윤리 행위 유무 등만 평가할 뿐, 노동조합 유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핵심평가지표 20%가 노사관계

1심과 2심 법원은 사 쪽의 행위를 부당해고라고 선고했다. 2012년 11월 대법원도 이를 확정했다. 1심의 복직 결정이 내려지자 2011년 12월, 이지테크는 양씨를 재차 해고했다. 다시 기나긴 법정 공방이 있었지만, 결국 회사는 2014년 5월 대법원 상고를 취하하고 양씨에게 복직을 통보했다.

기쁨은 잠시였다. 회사는 한 번도 일해본 적 없는 제철소 밖 사무실 근무를 지시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노트북만 놓여 있었고, 머리 위에선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그를 감시했다. 외톨이가 된 양씨는 직원들과 점심도 같이 먹지 못했다. 집에 가서 혼자 점심을 허겁지겁 먹고 돌아왔다. 점심시간 뒤 1분이라도 지각하면 또다시 징계 대상이 될까 두려웠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갔다. 잠꼬대로 누구에게 욕을 하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했다. 딸은 “아빠가 매일 밤 두세 차례 깨서 담배를 피운 뒤 다시 눕는 것을 봤다”고 했다. 최근까지 그를 진료했던 전남 순천 들풀한의원 윤성현 원장은 “양씨가 복직 뒤 더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했다. “복직투쟁을 할 때는 그나마 복직을 향한 열망이 있었는데, 복직하고 나서도 존재가 부정당하니 상실감이 컸고 상처를 많이 받았다.”

박지만씨가 회장인 이지그룹 계열사

이지테크는 2015년 4월30일 양씨를 다시 징계했다. ‘양씨가 자신의 책상 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CCTV로 확인한 뒤 보안 위반으로 정직 2개월을 통보했다. 복직 1년 만이었다.

포스코 사내하청지회는 양씨의 죽음에 대해 이지그룹 박지만 회장의 책임도 묻고 있다. 이지테크는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씨가 회장으로 있는 이지그룹의 계열사다. 박지만씨는 1987년 박태준 회장에 의해 이지그룹 전신인 삼양산업의 부사장에 임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지만씨는 1990년 삼양산업 사장이 됐고, 2000년 기업 이름을 이지로 바꿨다.

양씨는 박지만씨를 향한 유서도 남겼다. “자식들 같은 직원이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당신은 호의호식하며 지냈을 것이오. 이제라도 늦지 않소. 권력 옆에서 기웃거리지 말고 제발 당신의 자리로 돌아와서, 진정 인간다운, 기업가다운 경영인이 되어주시오.” 이와 관련해 이지테크 사무실을 찾았으나 이지테크는 취재를 거부했다. 오아무개 이지테크 노무팀장의 전화기는 계속 꺼져 있었다.

“저를 화장하여 제철소 1문 앞에 뿌려달라”고 했던 양씨는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죽음에 대한 책임 인정과 사죄’ 등을 내건 포스코 사내하청지회의 특별교섭 요구에 대해 포스코 역시 응하지 않았다.

광양=글·사진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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