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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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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겹 차벽 ‘인권 치매’ 경찰

4월18일 시청·광화문 집회의 재구성… 명백한 위헌 ‘차벽’ 둘러치고, 180도 반경으로 물포 쏘고 캡사이신 최루액 발사해
등록 2015-04-27 18:49 수정 2020-05-02 07:17

막히고 막혔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광화문까지는 1.2km 남짓한 거리다. 어른 걸음으로 20분도 안 걸린다. 4월18일 그 사이엔 6겹의 벽이 만들어졌다. 경찰이 만든 벽은 높이 3m가 넘는 경찰버스와 플라스틱 구조물로 단단했다. 도로를 막고, 인도를 막고, 사람을 막고, 차를 막았다. 넘어갈 수도 넘어올 수도 없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은 시민들과 분리돼 고립됐고, 정부는 경찰버스 차벽 안에서 시민들과 분리됐다. 집회의 자유와 통신의 자유는 차벽과 물대포 앞에서 존재의 이유를 물었다. 4월18일을 재구성했다.

오후 3시반 : 차벽 설치

최은아씨는 오후 4시가 되기 전 서울시청 광장으로 왔다. 서울시청 광장에선 오후 3시부터 시민들이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침몰 진실 규명과 희생자를 추모하는 범국민대회, 청와대 인간띠 잇기 행사가 있었다. 세월호집회 인권침해감시단인 최씨는 광화문 앞 유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차벽을 확인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서울시청 광장으로 향했다고 했다.

“오후 3시30분부터 경찰 병력이 집중되고 차벽이 견고하게 쳐지고 있었다. 광화문에서 유가족들이 연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회자가 집회를 중단하고 행진을 하겠다고 말했다.”

집회 참가자들이 세종대로 사거리로 향할 때 이미 경찰의 6겹 차벽은 솟아 있었다. 최씨가 택시를 타고 내려왔던 길에는 통행의 자유가 사라졌다. 경찰은 길을 따라 경찰버스 등의 차량을 사람 한 명 지나갈 수 없게 촘촘히 주차시켜 ‘차벽’을 만들었다. 길이 막히자 집회 참가자들은 종각역으로, 조계사로, 안국역으로 흘렀다. 가는 곳마다 차벽과 경찰이 있었다. 최씨는 “경찰에게 (길을 막는) ‘차벽은 위헌이다’라고 했지만 아무도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고 했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경찰의 차벽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경찰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서울시청 광장을 버스로 둘러싸고 출입을 막은 바 있다. 시민들은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재판소는 판결문을 통해 “통행 제지 행위는 개별적인 집회를 금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서울광장에서 개최될 여지가 있는 일체의 집회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일반 시민들인 청구인들의 서울광장에서의 통행조차 금지한 것이어서 전면적이고 광범위하며 극단적인 조치이므로, 이러한 조치는 집회의 조건부 허용이나 개별적 집회의 금지나 해산으로는 방지할 수 없는 급박하고 명백하며 중대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비로소 취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수단에 해당한다”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경찰이 차벽을 만들어 접근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행동자유권을 침해한 위헌이라고 했다.

위헌판결은 공허했다. 경찰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달리 해석했다. 박재진 경찰청 대변인은 집회 다음날 브리핑에서 “시위대들이 어느 지점으로 모이기 위한 힘을 모아가기 위해 가다보니 막히게 된 것이다. (차벽을) 예방적으로 쳐둔 부분은 (헌법소원) 판례에 가깝지만 현존하는 위험을 막는 불가피한 행위임을 이해해달라”고 했다. 세월호 추모 집회 참가자들을 현존하는 위험으로 보고 차벽을 쳤다는 설명이다.

경찰은 “서울 광장에서 전체 시위대가 (광화문을 향해) 뛰었고 그 시점인 4시30분 정도에 (차벽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경찰이 이날 동원한 것은 차벽 전용 트럭 18대와 경찰버스 등 차량 470여 대, 172개 중대 1만37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범국민대회를 주최한 ‘4월16일의약속 국민연대’(416연대)가 공개한 ‘경찰 문건’을 보면, 경찰은 오후 4시30분 이전부터 광화문 광장에 시민들이 접근하는 것을 봉쇄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시내 곳곳에 차벽을 칠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둔 것으로 드러난다.

‘4·18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문화제 차벽 및 안전펜스 운용’이라 적힌 이 문건은, ‘광화문 누각에 유동(버스) 9대’ ‘세종로남단 유동차벽 유동 17대’ ‘노스게이트(정부서울청사 옆 건물)~트윈트리타워(동십자각 앞) 입구 유동 38대’ 등 광화문 광장 주변을 차단하는 경찰병력의 배치를 상세히 그려놨다. 최은아씨는 “워낙 요소요소에 경찰버스가 배치돼 있어 차벽을 세우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차단하는 6겹의 차벽은 만들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또 집회 참가자들이 광화문 앞 유가족을 향해 다가간 것을 ‘현존하는 위험으로 봤다’는 경찰의 설명도 과잉대응으로 보인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은 ‘집회 신고를 하지 않아 경찰이 진행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집회’라도 집회 자체를 금지할 수는 없고 집회 주최자가 신고 미비에 대한 책임을 질 뿐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고 했다. 경찰이 평화롭게 진행되는 집회 참가자를 해산할 권한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경찰의 차벽 대응이 집회 참가자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경찰은 낮 12시40분부터 광화문 앞 유가족 주변에 있던 차벽을 보강하기 시작했다. ‘차벽 및 안전펜스 운용’ 문건에 나온 것처럼 촘촘히 차벽을 배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가족과 주변에 있던 시민들은 이에 저항했고, 경찰은 저항하는 유가족을 연행했다.

유가족과 함께 있었던 박주민 변호사는 “의사표현을 하려고 나왔는데 차벽을 보면 의사표현이 차단되고 화가 나는 상태가 된다. 화장실을 갈 수도 없고 물 공급이 차단되는 등 공권력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자신을 둘러싸는 경찰의 차벽을 보고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집회 참가자들은 빨리 유가족에게 가려 했지만 경찰은 이 역시 차벽으로 봉쇄했다.

집회 참가자들이 세월호 유가족에게 가려다 광화문광장 북단 경찰 차벽에 막혀 있다. 박승화 기자

집회 참가자들이 세월호 유가족에게 가려다 광화문광장 북단 경찰 차벽에 막혀 있다. 박승화 기자

오후 6시30분 : 물포

집회 대열은 차벽에 막혀 광화문 광장으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세월호집회 인권침해감시단 활동가인 곽이경씨는 광화문 광장에 사람이 있다는 소식에 대열과 떨어져 홀로 조계사 쪽으로 갔다고 했다.

“경찰들이 네 줄, 다섯 줄로 골목마다 막고 있었다. 혼자 다가가니까 길을 막지는 않았다. 경찰이 살짝 터준 길로 돌아 돌아 종로구청과 소방서가 있는 골목으로 해서 광화문 광장에 올 수 있었다.” 세월호 추모집회에 참가하려고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은 찾을 수 없는 길이었다. 결국 서울시청 광장 집회 참가자는 3만 명(주최 쪽 추산·경찰 추산 8천 명)이었지만 광화문 광장에는 1만 명(경찰 추산 6천 명)밖에 들어오질 못했다.

광화문 광장으로 들어온 이들을 맞은 것은 경찰 살수차였다. 곽씨는 “시민들이 차벽을 피해 세종문화회관 옆 골목으로 광화문 광장에 들어오려다 경찰과 충돌했다. 이때부터 경찰은 물포와 캡사이신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오후 6시10분께 집회 참가자들은 경찰과 충돌했고, 참가자들은 물대포를 맞으며 오후 6시40분께 광화문 광장 북단까지 진출했다. 집회 참가자들에게 남은 차벽은 2개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차벽 뒤에 있는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기 위해 경찰버스 유리창을 깨거나 버스를 줄로 묶어 빼서 길을 내려 했다. 이를 본 제임스 피어슨 기자는 트위터를 통해 “(유럽에서) 경찰이 경찰버스를 시위대를 가두고 진압하는 데 사용한다면 아마 박살이 날 것”이라고 했다. 서구 사회에는 정부에 의해 자신의 주권이 침해당했다고 여길 때 시민이 선택하는 적극적인 저항 방법으로 ‘시민불복종’이 있고, 이는 ‘시민저항권’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국가가 권력을 남용해 시민을 공격하면, 시민들은 부당한 권력에 맞서 자기방어를 할 수 있다는 논리다.

“마지막 남은 차벽으로 사람들이 접근하니 경찰들이 계속 물포나 캡사이신을 조준해서 쐈다.” 곽씨는 경찰의 물포 위력이 대단했다고 전했다. “살수차가 정중앙에서 시위대를 향해 맨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180도 반경으로 물포를 쐈다. 젊은 여성은 물포를 맞고 자빠지기도 했고, 수압이 굉장했다.”

곽씨는 경찰의 물포가 가슴 이하를 조준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경찰의 물포 운용 지침은 직사살수의 경우 “안전을 고려해 가슴 이하 부위를 겨냥하도록 되어 있다”고 명시돼 있다. 2014년 헌법재판소는 물포 사용 행위에 대한 위헌 신청을 각하했지만, 이정미·김이수·서기수 재판관은 소수의견으로 이를 반대했다. 이 판결문은 물포 사용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근거리 직사살수의 경우에는 발사자의 의도이든 조작 실수에 의한 것이든 생명과 신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가슴 아래 부분만 겨냥하도록 한다고 하더라도 직사살수를 맞게 되면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넘어지는 과정에서 머리나 가슴에 맞을 수도 있어, 가슴 아래 부분만 겨냥하도록 한다는 규정의 실효성 또한 의문이다.”

7시30분: 연행

집회 참가자들은 서울시청 광장에서 광화문까지 6겹의 차벽 가운데 5겹을 뚫었다. 광화문 앞 유가족과 참가자들 사이에는 경찰버스로 만든 차벽 한 줄만 남아 있었다. 경찰은 집회 참가자들이 청와대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진압에 나섰다. 세월호 유가족 21명, 일반인 79명 등 100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세월호집회 인권침해감시단으로 활동하던 권영국 변호사도 연행됐다. 권 변호사는 “경찰과 시민 사이에서 중재를 하고 있었고, 아무런 폭력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붙잡혔다”고 말했다.

집회 중 한 청년은 태극기를 불태웠다. 등 보수 언론은 태극기를 불태운 사진을 ‘태극기 불태운 시위대’라는 제목과 함께 1면에 실었다. 보수언론은 세월호 추모 집회를 폭력 시위로 규정했다. 태극기를 태웠다는 청년은 4월20일 인터넷 언론 와 인터뷰에서 “무자비한 공권력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했다. 순국선열이 피로써 지킨 태극기를 공권력을 남용하는 그들이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태극기를 불태운 이유를 밝혔다.

경찰은 연행된 이들의 휴대전화도 압수했다. 일반인 79명 가운데 42명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들여다봤다. 사이버사찰긴급행동은 “통신 비밀은 국민의 기본권으로 적법 절차에 따라 최소한으로 제한되어야 하는데, 휴대전화를 가져가 모두 들여다보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경찰을 비판했다. 휴대전화를 압수당한 이들은 경찰이 압수수색영장을 제대로 읽어볼 시간도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휴대전화 압수수색영장을 본 신훈민 변호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라는 범위가 특정되어 있지 않는 등 법원이 영장을 남발했다”며 “휴대전화에는 개인의 가장 중요한 사생활이 모두 담겨 있다.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러 나왔다가 연행된 일반 참여자들은 자신의 페이스북과 이메일 등 사생활이 얼마나 노출될지 몰라 굉장히 불안해한다”고 말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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