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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에 실질적 평등을!

경제적 상황 살펴 벌금형 선고하는 ‘일수벌금제’ 도입 뼈대로 한 형법 개정안 발의돼… 유럽 등에서는 이미 정착된 제도
등록 2015-03-28 16:01 수정 2020-05-03 09:54

19대 국회 들어 김기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대표로 33명이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2009년 제정된 ‘벌금 미납자의 사회봉사 집행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도 함께 제출됐다. 1990년대부터 벌금형 제도 개선이 논의됐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손봐야 한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돈 없으면 몸으로 때우라’는 식의 형벌은 사라져야 한다는 게 개정안의 뼈대다.

시혜가 될 수도 있는 총액벌금제

개정안에서 먼저 주목할 부분은 총액벌금제를 버리고 일수벌금제로 가야 한다는 것. 경제적 상황과 무관하게 벌금형을 선고하는 총액벌금제는 실질적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재산이 10억원인 사람한테 징역형 대신 벌금 1천만원을 선고하는 것은 사실상 ‘시혜’에 가깝다. 그러나 무일푼인 사람에게 벌금 100만원은 가혹한 형벌일 수 있다. 일당을 1만원으로 계산한 사례도 있어, 벌금 300만원이면 1년 가까이 교도소에 갇혀 있어야 한다.

반면 일수벌금제는 먼저 피고인의 재산 상황 등을 살핀 뒤 하루에 부과할 수 있는 벌금액을 결정하고 여기에 죄질에 합당한 일수를 곱하는 방식이다. 가령 타인의 편지·문서 등을 함부로 뜯어본 사람에 대해 형법(비밀침해죄)은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30일치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야 하는 경우를 가정하면, 돈 많은 갑돌이는 하루에 100만원씩 쳐서 벌금 3천만원을, 돈 없는 순돌이는 하루 1만원으로 계산해 30만원만 선고하는 식이다.

징역·금고 따위 자유형에는 집행유예를 인정하면서도 자유형보다 가벼운 처벌인 벌금형에 집행유예 조항이 없는 문제를 바로 잡을 내용도 포함됐다. 경제적 이유로 벌금 납부가 어렵거나 고령·질병 등으로 사회봉사 명령도 따를 수 없는 이들에게는 벌금형 선고 또는 집행을 유예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 개정안에 담긴 것이다.

아예 벌금 납입이 불가능한 이들에게는 노역장 유치가 아니라 자유형 또는 사회봉사로 대체하는 조항도 개정안에 포함됐다. 또한 개정안은 벌금 납부 기한의 연장과 분할 납부 또는 사회봉사 대체가 가능하다는 점을 법원·검찰이 반드시 알리도록 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형벌 감응성이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평등 원칙에 따라 불법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우는 게 형벌의 목적이라면 형벌이 개개인에게 어떻게 와닿는지를 살펴야만 실질적인 형평에 맞다”고 했다. 프랑스·독일·스웨덴 등 유럽 나라들에서는 이미 일수벌금제가 정착돼 있다.

“고통의 크기는 서로 다르다”

문제는 사법 당국이 과연 태도를 바꾸겠느냐는 데 있다. 특히 대법원은 벌금형 제도 개선의 핵심인 일수벌금제 도입에 부정적이다. 기존 양형 기준 말고 재산 상태에 과도한 비중을 둘 수 있다는 점, 현행법에서도 사회봉사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 양형 과정에서 재판부의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형법 개정안 초안을 작성한 김희수 변호사(장발장은행 대출심사위원)는 “장발장은행과 벌금제 개선은 우리 사회가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가, 벌금을 제대로 낼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형벌은 고통을 부과하는 것인데 고통의 크기는 서로 다르다. 논리가 아닌 의지의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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